brunch

매거진 WatchTalk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ozetto Apr 13. 2023

영원과 찰나 사이의 다정함

신촌. CGV. 이니셰린의 밴시.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영원과 찰나는 정말 다른 것일까? 말장난(?)을 좀 하자면, 끝없이 이어짐을 의미하는 영원과 일어남의 바로 그 순간을 의미하는 찰나는 전혀 반대의 의미이기에 서로를 가능케 한다. 찰나가 없는 영원 혹은 영원 없는 찰나는 불가능하다. 끝없이 이어지는 상태는 다르게 말하면 이어짐이 일어나는 그 순간이다. 이어짐이 일어나는 그 순간은 이미 끝이 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영원과 찰나는 같은 것이 아닐까? 뭔 소리인지 모를 잡소리에 인간을 더해보자. 영원과 찰나가 같은 것이라면 인간의 삶은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시간의 인식 자체가 무의미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여전히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시간을 인식하기 위해서 인간은 어떤 의미가 필요하다. 자신의 삶 자체를 인식하기 위해서 인간은 영원과 찰나 사이를 방황한다. 끝없는 이어짐을 희구하기도, 일어남의 그 순간을 탐닉하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이 자신의 삶을 인식하게 되는 것은 영원이나 찰나를 통해서가 아니다. 영원이면서 찰나이기도 한 다정함은 영원과 찰나 사이 '지금 여기'에 인간을 존재하게 하고 나아가 인간이 자신의 삶을 인식할 수 있게 한다.


1. 영원을 좇는 이와 찰나를 사는 이 : 무의미에 대한 저항과 회귀

마틴 맥도나 감독의 <이니셰린의 밴시>는 영원과 찰나를 이야기하기 위해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하되 배경으로 하고 있지 않다. 이니셰린은 아일랜드이지만 아일랜드가 아니다. 가상의 섬으로 찰나의 시공간이지만 동시에 실존하는 아일랜드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영원의 시공간이다. 한창 내전 중인 아일랜드 본토가 보인다는 점에서 공간적으로 고립된 섬이나 시각적으로는 고립되어 있지 않아 이니셰린의 영원과 찰나의 사이 시공간성을 더욱 강화한다. 실재인지 가상인지. 영화가 끝나면 사라질 찰나인지 영화가 끝나도 이어질 영원인지. 이니셰린은 영원과 찰나 사이 경계 위에서 이미 흔들리고 있다. 시공간이 흔들리고 있는 만큼 이니셰린의 주민들은 삶이 흔들릴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 평화롭기 그지없다는 표현을 넘어서 평화가 땅에 굴러다니는 이 섬에서 주민들은 삶의 무의미와 그에 따른 지루함을 고독하게 견디고 있는 것이다. 작은 숲조차 보이지 않는 척박한 땅 위에 거센 바닷바람과 흐린 구름 사이로 내리는 햇빛. 그런 햇빛과 함께 울려 퍼지는 성가. 이니셰린은 너무나 평온해 무서울 정도로 지루하여 시간이 흐르고 있음에도 정지한 듯하다. 모든 것이 정지한 듯 지루한 평온만이 가득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시공간성을 지닌 이니셰린에 작은 균열이 발생한다.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이들 때문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다른 주민들이 보기에 어떻게 친구가 됐나 싶을 정도로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듯한 파우릭(콜린 파렐 분)과 콜름(브렌단 글리슨 분). 지적이면서 사색과 음악을 즐기는 콜름과 달리 무던하면서도 무식하고 수다를 즐기는 파우릭. 완전히 반대되기에 두 사람의 우정은 내부에서부터 무의미로 가득한 이니셰린의 시공간성에 균열을 가한다. 아직 살 날이 한창인 파우릭은 찰나를 사는 이다. 할 일 없는 이니셰린을 한량처럼 돌아다니는 파우릭의 찰나는 하루 그 자체이다. 지루하기는 해도 아무런 사고 없이 평안하게 반복되는 하루를 시시콜콜한 수다로 채우며 고독과 외로움을 잊고 사는 이다. 죽음을 서서히 체감하는 콜름은 영원을 좇으려는 이다. 이니셰린의 주민들이 모이는 펍에서 원할 때면 바이올린을 키는 콜름의 영원은 음악이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처럼 적어도 이니셰린의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기억될 음악을 남기는 것을 어느 날 갑자기 벼락같이 느낀 이다. 이니셰린의 무의미한 시공간성에 발생한 균열은 달리 생긴 것이 아니다. 무의미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존재론적 몸부림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그 첫 번째 몸부림은 인생의 친구인 파우릭에게 갑작스러운 절교를 선언하며 영원을 좇는 콜름에서부터 시작한다.


콜름의 몸부림이 무의미에 저항하는 몸부림이라면 파우릭의 몸부림은 무의미로 회귀하려는 몸부림처럼 보인다. 영화의 시점에서 콜름은 삶을 무의미한 찰나로 보고 있다. 그런 그에게 파우릭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당나귀 제니(제니 분)가 싼 배설물에서 나온 이물질로만 3시간을 떠들 정도로 지루하고 무식한 한량. 한 때 콜름에게 파우릭은 이니셰린의 시공간성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했다. 하지만 영원을 좇고자 하는 시점에서는 이니셰린의 시공간성이 육화된 존재이다. 그렇기에 생의 마지막이 다가오는 시점에서 생이 끝난 뒤에도 영원으로 새겨질 음악을 위해 콜름은 파우릭에게 간곡하면서도 단호히 말한다. "이제 자네가 싫어졌어." 반면 파우릭은 생을 반복되지만 행복한 찰나로 보고 있다. 그런 그에게 콜름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당나귀 제니가 싼 배설물에서 나온 이물질로 3시간을 떠들며 반복되는 찰나를 함께 즐겁게 보내는 친구. 파우릭에게 콜름은 이니셰린의 시공간성을 잊게 만든다. 하지만 콜름이 영원을 좇으면서 파우릭은 지루하게 반복되는 이니셰린의 시공간성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렇기에 작곡과 사색으로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려는 콜름에게 파우릭은 간곡히 매달린다. "혹시 요즘 우울해요?" 두 사람의 몸부림은 삶에 의미를 새기기 위해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 충돌하는 각자의 저항 방식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2. 영원과 찰나 사이를 연결하는 다정함: 무의미에 의미를 새기는 인간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며 충돌하기에 콜름과 파우릭의 사이에서 더욱 다정함이 돋보인다. 콜름이 삶에 음악으로 영원을 새겨 의미를 만든다면 파우릭은 찰나를 수다로 채우며 무의미를 견딘다. 콜름은 정면으로 무의미에 맞서 음악으로 의미를 만드는 것이고 파우릭은 수다를 떨며 무의미 주변을 맴돌며 잠식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둘의 차이는 영화에서 서로를 대하는 방식에서도 나타난다. 콜름은 다가오는 무의미에 단호히 맞서는 고집불통 늙은이이다. 말을 거는 순간 양털 깎는 가위로 손가락을 잘라서 줄 것이라는 자신의 경고를 무시한 파우릭에게 망설이지 않고 자른 손가락을 파우릭의 집 대문에 던지는 콜름은 대문에 선명하게 남는 선혈 자국처럼 활활 타오르는 고집으로 가득하다. 그의 고집은 영원을 향한 그의 마지막 집념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반대로 파우릭은 다가오는 무의미를 끈질기게 외면하는 고집불통 젊은이이다. 외롭지 않냐는 동생 시오반(케리 콘돈 분)의 물음에 파우릭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오히려 왜 외롭냐고 반문한다. 더 나아가 그러한 외로움을 느끼는 동생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투덜거린다. 누구보다 외로움을 느껴 가축을 친구라 생각해 집으로 들이며 콜름의 절교에 가장 안절부절 하지 못해 매일 이니셰린을 배회하며 콜름을 주시하는 파우릭은 고독함의 무서움을 가장 절실히 느낀다. 고독에 대한 그의 무시는 찰나를 채우는 그만의 집착이다.


집념과 집착. 콜름과 파우릭은 서로 다른 영원과 찰나를 좇음에도 너무나도 비슷하게 그로테스크(grotesque)하고 크리피(creepy)하다. 콜름이 영원한 의미를 위해 집착적인 집념으로 음악을 작곡하는 모습은 얼핏 보면 모차르트처럼 자신의 예술에 심취한 것을 넘어 광기에 빠진 것 같다. 파우릭이 찰나의 행복을 위해 집념으로 무장한 집착으로 콜름의 주위를 배회하는 모습은 자신을 버린 연인의 주위를 맴도는 스토커의 광기와 같다. 광기에 빠진 콜름과 파우릭은 인간의 탈을 쓴 무엇에 가깝다. 왼손의 약지와 계지를 잘라 파우릭의 집에 던지고는 피를 뚝뚝 흘린 채 굳은 표정으로 파우릭을 보지도 않고 지나가는 콜름. 콜름의 새로운 친구인 음대생에게 아버지가 죽었다는 거짓말로 이니셰린을 떠나게 하고는 우정을 위해 그랬다고 말하는 파우릭. 둘은 인간이지만 인간답지 않다. 그런 그들만큼이나 이니셰린의 주민들도 인간이지만 인간답지 않아 보인다. 둘의 갈등이 최고조로 향하고 있음에도 너무나 다른 둘이 어떻게 친구가 됐는지 의아했다고 말할 뿐 콜름과 파우릭에게 필요 이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마치 그런 인간관계는 언제고 결국 파탄에 이르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고독과 외로움이 가득해 정지된 시공간의 섬에 어울리지 않는 관계였다는 듯 아무도 그들의 관계를 걱정하지 않는다. 무의미에 침잠한 이니셰린으로 다시 되돌아가듯 콜름과 파우릭의 관계는 극단으로 치닫는 듯하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영원과 찰나를 각각 좇는 역동 속에서 둘의 다정함이 빛나며 무의미로 침잠한 이니셰린에 의미를 새긴다. 영화에서 가장 역설적이면서도 다정함으로 가득한 장면인 술 취한 파우릭과 그를 달래는 콜름의 대화를 보자. 이 장면에서 콜름보다 파우릭이 영원에, 파우릭보다 콜름이 찰나에 닿아 있다. 콜름은 자신에게 우정의 회복을 요구하는 만취자 파우릭에게 다정한 것으로 기억되는 17세기 사람은 없지만 모차르트처럼 예술을 남긴 17세기 사람은 영원히 기억된다고 말하며 파우릭을 달래며 요구를 거절한다. 이에 파우릭은 화려한 미사여구나 다정에 대한 학문적 고찰이나 근거는 없이 거칠지만 투박하게 작고한 부모님의 다정함을, 동생 시오반의 다정함을 자신은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 말한다. 찰나를 살고 있는 콜름이 영원히 다정함을 기억할 것이라는 모순. 그 모순에 콜름은 말한다. "다시 좋아질 것 같아." 반면 콜름의 영원에 대한 지식에 시오반은 모차르트가 18세기 사람이라고 정정한다. 적어도 이니셰린에 불후의 명곡을 남기려는 콜름이 실상은 금방이라도 사라질 찰나의 지식에 의지해 영원을 좇으면서도 취한 파우릭을 달래는 모순. 역설 속에서 다정함이 넘치는 장면이 아닌가?

출처. 왓챠피디아

실상 콜름과 파우릭은 서로 가장 멀어지는 와중에도 가장 다정하게 가까워지고 있다. 콜름은 영원한 의미를 위해 선혈로 얼룩진 고집불통의 집념으로 예술의 광기에 빠져있어 다정함과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정작 그의 뮤즈는 지루하고 무식한 파우릭이다. <이니셰린의 밴시>의 작곡을 마친 것에 대해 파우릭이 축하하면서도 왜 제목을 그렇게 지었느냐는 물음에 콜름은 관련 설화는 없지만 이니셰린(Inisherin)과 밴시(banshee)의 "sh" 발음이 연속되어 느껴지는 운율이 좋아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모차르트나 베토벤과 같은 예술가를 흠모하지만 실상은 그런 예술가들의 그림자만이라도 되고 싶은 시골 예술인의 허영(?)이 느껴진다. 하지만 있을 법한 허영에서 시작한 콜름의 인생 역작은 실상 은연중에 떠오르는 파우릭의 우정에서 시작해 파우릭의 죽음에 슬퍼하는 장송곡으로 지어진 곡이다. 자기 생 이후에도 세상에 남겨질 영원한 의미에는 파우릭과의 우정을 그리고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콜름 자신의 감정이 실려 있다. 그가 파우릭에게 절교를 선언하는 순간도 생각해보자. 변명처럼 들릴 수 있으나 콜름은 영원한 의미를 향한 마지막 여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지루하고 무식한 파우릭이 자신의 절교 선언에 상처 입을 것을 걱정한다.


콜름만큼이나 파우릭도 뒤틀린 다정함을 보여준다. 콜름의 주위를 배회하며 그와 관계를 회복하려는 파우릭은 시오반이 떠난 뒤 자신의 외로움을 그나마 달래주던 제니가 콜름의 손가락이 목에 걸려 죽으면서 콜름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분노한다. 하지만 파우릭의 분노는 그가 정말 콜름에게 분노했는지 의심이 든다. 콜름에게 방화를 주일 오후 2시에 할 것이라 예고한다. 그의 개에게는 화가 나지 않았으니 집 밖에 내놓으라고 한다. 집에 있든 말든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는 말과 다르게 차마 발을 돌리지 못하고 집 안을 살핀다. 떠날 때는 콜름의 개를 데리고 가 돌본다. 불에 그을렸지만 살아있는 콜름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한다. 콜름의 분노는 마치 자신을 봐주지 않는 어른을 향해 자신을 봐달라고 떼쓰는 어린아이 같다. 자신을 봐주지 않는 어른에게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어떻게든 관심을 받고 싶어 한다. 결국 봐주지 않는 어른에게 화가 나 폭력을 행사하지만 정작 그 어른이 사라지는 것은 원치 않는다. 자신의 집을 태웠으니 이제 다 끝난 거냐고 묻는 콜름에게 당신이 죽어야 끝이라고 답하면서도 개를 돌봐줘 고맙다고 말하는 콜름에게 언제든 말하라고 답하며 자리를 뜬다. 뒤틀린 와중에도 마지막까지 다정하게 서로를 대하는 둘의 모습은 영원과 찰나라는 무의미를 좇는 와중에 그 사이를 다정함으로 엮어 시공간의 의미를 새기며 존재하는 인간을 보게 한다.

출처. 왓챠피디아

영원과 찰나 중 어느 쪽을 좇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말장난일지라도 구분이 불가능한 영원과 찰나 중 무엇을 좇든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시공간에 던져진 인간에게 영원과 찰나는 아무런 답을 내주지 못하는 것이다. 영원과 찰나의 반복인 시공간에서 인간이 의미를 찾는 것은 단 한 순간이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무의미한 시공간의 고독을 견디며 영원과 찰나 사이를 방황하는 타인에게 다정한 순간이다. 타인의 죽음에 슬퍼하는 불후의 장송곡을 남기든, 의미 없는 일상을 수다로 나누든 타인이 있기에 가능한, 무의미의 고독에 대한 각자만의 역동이다. 절교를 앞둔 상황에서도 상대의 감정을 걱정하고, 방화로 상대를 죽이려는 상황에서도 상대의 개를 돌봐주는 다정함의 모순. 영원과 찰나의 연속으로 무의미한 시공간에 인간이 유일하게 생의 의미를 남길 수 있는 이유이다.


"개 돌봐줘서 고마워."


"언제든 말해요."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 같은 인생, 인생 같은 영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