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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Apr 03. 2023

영화 같은 인생, 인생 같은 영화

홍대. KT&G 상상마당 시네마. 파벨만스.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영화관에서 처음 본 영화로 기억되는 것은 심형래 감독의 <용가리>이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고 영화를 사랑하게 된 계기를 얘기할 때면 피터 잭슨 감독의 <반지의 제왕> 트릴로지를 꼽는다. 2001년 지금은 CGV가 된 동네 영화관에서 엄마의 손을 잡고 가서 본 영화가 <반지의 제왕: 반지원정대>이다. 영화는 한 편으로만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과 달리 3편으로 구성된 영화는 <반지의 제왕>이 처음이었고, 중세를 배경으로 인간, 엘프, 난쟁이, 오크 등 다양한 종족의 대서사시를 그린 서양 판타지도 처음이었다. 나아가 원작 소설을 3번 이상 읽은 것 역시도 <반지의 제왕>이 처음이었다. <반지의 제왕> 트릴로지는 2003년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이 개봉하면서 끝났지만 아이의 인생에 파고 들어온 서사는 끝나지 않고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 덕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아이는 여전히 좋은 서사가 무엇인지 혼자 고민하고 있긴 하다. 비록 그 고민이 가족, 특히 부모에게는 환영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한량 같은 인생이라며 격하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아이는 자신의 고민을 멈출 수 없다. 오히려 서사를 사랑하게 된 자신의 삶을 괴로워도 사랑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 각자에게 무언가 인생에 스며드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필자에게 스며든 서사만이 아니라 스필버그 감독의 자전적 영화인 <파벨만스>의 샘(가브리엘 라벨 분)처럼 누군가에게는 영화가. 마음 한 켠에서 존경심을 느끼는 누군가에게는 미(美)가, 응원을 넘어 개인적으로 팬심을 가지고 있는 누군가에게는 노래가. 무한하기까지 한, 스며드는 그 무언가는 불시에 운명처럼 다가온다. 마냥 행복하지도 그렇다고 마냥 괴롭지만도 않은 이 운명은 마약과 같다. 도망치건, 벗어나려고 하건, 쳐다보지 않건 저절로 떠오른다. 단순히 돈을 버는 직업에 대한 소명으로서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삶 그 자체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한 번 사는 인생, 후회 없이 하고 싶은 대로 살자고 하지만 대체 뭘 해야 후회가 없을지 생각할 때 운명을 마주한 이는 공허하지 않다. 공허할 틈이 없다. 삶에 스며든 운명이 끊임없이 곁을 맴돌며 삶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스필버그 감독의 <파벨만스>는 이처럼 운명처럼 찾아온 그 무언가 중 영화를 인생처럼 이야기한다. 반대라고 해야 하나? 인생을 영화처럼 이야기하나? 둘 다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삶과 그에 스며든 운명을 구분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저 사랑할 따름이다. 


1. 마주한 운명을 다르게 말하다 : <바빌론>과 <파벨만스>

<파벨만스>를 이야기 하려면 시기상 공교롭게도 데미언 셔젤 감독의 <바빌론>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두 영화 모두 영화를 다루는 영화이다. '어떻게 영화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가?'라며 영화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는 영화이다. 다만 두 영화는 전혀 다르게 자신이 마주한 운명, 삶에 스며든 운명인 영화를 다른 톤으로 이야기한다. 감독의 젊은 혈기가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바빌론>은 광기가 느껴질 정도의 열정 속에서 영화에 끊임없이 채찍질을 가한다. 태생부터가 자본에서 벗어날 수 없는 탐욕스러운 예술. 하지만 사실 그 채찍질은 영화에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감싸 안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 하고 있는 것이다. 너무나 화려한 꿈과 상상으로 가득해 허망해 보이는 꿈조차도 현실로 이뤄줄 것 같은 슬픈 예술. 광기로 보일 정도로 활활 타오르는 열정은 영화를 가차 없이 대하면서도 너무나 사랑스럽게 안고 있어서 이 영화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게 한다. 마치 "추해 보여도 이렇게 아름다운데 어떻게 안 사랑할 수 있어?!"라고 말하는 듯하다. 


오죽하면 <바빌론>을 보고 난 다음에는 데미언 셔젤 감독을 지금의 자리에 있게 한 결정적인 영화, <라라랜드> 조차도 단순히 꿈, 사랑, 향수 이야기로 읽히지 않는다. 더 나아가 <위플래쉬>의 광기와 <라라랜드>의 향수는 모두 <바빌론>을 만들기 위한 초석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그렇기에 <라라랜드>를 생각하고 <바빌론>을 보면 굉장히 당황스럽다. 그렇다고 <위플래쉬>가 떠오르지도 않는다. 두 영화의 가장 큰 감정 축(?) 혹은 시작점(?)을 가져왔을 뿐 <바빌론>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영화이니 말이다. 관객 입장에서 자기 영화 사랑을 거국적으로 귀에 때려 박는 <바빌론>은 <위플래쉬>의 광기와 <라라랜드>의 향수가 추한데 아름답게 섞인 기묘한 영화로 보인다. 현실에서 가장 비슷한 인간상을 제시한다면 어딘가 하나에 깊이 몰두한 오타쿠 정도로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도 자신이 깊이 몰두한 그것을 자기는 욕하면서도 남이 욕하는 것은 참지 못하는, 정말 갈 때까지 간 오타쿠로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자신의 사랑에 심취한 오타쿠의 모습은 애닯기도 하고, 미소가 지어지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고... 영화의 혼란한 광기만큼이나 <바빌론>이라는 영화 자체에 복잡한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반면 <파벨만스>는 감독의 오래 묵은 관록이 느껴진다. 자신의 인생에서 영화가 처음 어떻게 다가왔는지, 인생에서 영화가 어떤 의미였는지를 분명하되 차분히 전달하는 나이 든 이야기꾼의 모습이 보인다. 샘이 영화를 처음 만나는 순간을 보자. 세실 B. 드밀 감독의 <지상 최대의 쇼>(1952)를 영화관에서 처음 봤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바로 그 직전 시작 장면이 영화에 대한 <파벨만스>의 톤을 만들어낸다. 샘은 아빠 버트(폴 다노 분)와 엄마 미치(미셸 윌리엄스 분)의 손을 잡고 영화관에 왔다. 영화관에 들어가기 직전 샘은 영화관에 가고 싶다던 마음은 온데간데 없고 어두운 영화관에 들어가는 것을 주저한다. 그런 샘의 손을 붙잡고 버트와 미치는 각각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면 재밌을 것이라고 말하며 샘을 달랜다. 요새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아직 필자가 어렸을 때만 해도 영화관은 부모님의 손을 잡고 가는 곳 중 처음으로 신나는 와중에도 조용히 가만히 있어야 하는 공간이면서 익숙해지기 전에는 그 어둠 때문에 주눅이 들고 심한 경우엔 무섭기까지 한 공간이다. 그렇기에 영화관에 처음 간 아이는 부모와 첫 경험을 위한 작은 기싸움을 하게 된다. 필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이 영화의 시작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돌이키며 읊어주는 나이 든 이야기꾼이 관객의 첫 영화관 경험을 일깨우는 목소리이기도 하다. 

출처. 왓챠피디아

이 목소리를 시작으로 나이 든 이야기꾼은 자신의 분신 혹은 자신 그 자체인 샘의 인생에서 영화와 관련된 지점을 차분히 하지만 분명하게 보여준다. 알아 듣지도 못할 잔상 효과를 설명해주는 버트의 목소리가 겹쳐진, 머리을 헤집고 눈 앞에서 반복되는 기차와 자동차의 충돌 장면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다시 찍은 유년기. 보이 스카우트에서 사진 기능장을 준비하면서 친구들과 서부 영화를, 가족들과 일상 혹은 여행을 담은 가족 일기 영화를, 나아가 아빠 버트의 전쟁담을 기반으로 가장 규모 있게 찍은 전쟁 영화를 찍은 청소년기 전반부. 두려움과 회의를 느낀 영화에 다시 가까이 다가가는 고등학교 졸업 영화를 찍은 청소년기 후반부. 나이 든 이야기꾼은 삶과 구별할 수 없게 스며든 운명을 짊어진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따뜻하면서도 어떤 순간에는 스스로를 섬뜩하게 바라보는 냉정함도 갖춘 채 인생의 희노애락을 단 하나도 빼놓지 않고 알려준다. 한 올 한 올 풀어내는 이야기는 관객에게 스며든다. 이야기꾼의 인생은 영화의 시작부터 관객을 자극해 계속해서 문득문득 자신의 인생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야기꾼의 이야기는 더 이상 이야기꾼만의 이야기가 아니게 된다. 샘의 인생을 채운 가족과의 추억, 가족 내 불화, 유대인 혐오, 풋풋한 첫사랑 등은 그대로 관객의 인생을 채운 가족과의 추억, 가족 내 불화, 누군가에게 당한 혐오, 풋풋한 첫사랑 등으로 치환된다. 자신의 옛날 이야기에 진심을 담아 말하는 정겨운 시선만큼이나 관객도 자신의 과거에 정겨운 향수를 느낀다.


2. 동에서 서로 : 스며든 운명을 받아들이는 흥미로운 여정

하지만 <파벨만스>의 정겨운 시선 하나 때문에 관객이 영화와 공명한 것은 아닐 것이다. 큰 틀에서 이 영화는 이미 스며든 운명을 받아들이게 되는 예정된 결과로 나아가고 있다. 그리스 신화 속 오이디푸스부터 시작해 인간은 자신의 삶에 침투하려는 운명을 거부하려고 한다. 하지만 운명은 이미 주어진 순간 삶 그 자체로 스며들어 있다. 결국 인간은 삶과 운명이 그 자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받아들이는 모습은 체념하며 끝을 맞이하는 종말의 순간일 수도 있으나 동시에 삶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어 새로 시작하는 종말의 순간이기도 하다. 새로운 시작으로서 종말의 순간은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며 좌절하고 체념하는 감각에 반하는 비약의 감각을 동반한다. 엉키고 설켜 풀 수 있을지 알 수 없던 실이 한 번의 당김으로 언제 얽혀 있었냐는 듯 단 번에 풀려 단일한 실이 되는 비약을 통한 일치. <파벨만스>의 샘의 인생도 비약을 통한 일치로 나아가고 있으며 관객은 샘의 인생을 통해 영화와 인생을 일치시키는 나이 든 이야기꾼의 관록을 느낌과 동시에 영화와 공명한다. 자신의 인생에서 스며들어 있는 혹은 스며들었다고 여겨진 그 운명의 순간에 대한 정겨운 향수를 떠올리는 것이다.


<파벨만스>의 공간은 너무나도 직접적으로 영화로 향하고 있다. 미국 동부에 위치한 뉴저지에서 중부의 애리조나를 거쳐 서부의 L.A.에 도착하는 샘의 이야기는 이미 영화를 향해 있다. <지상 최대의 쇼>의 기차와 자동차의 충돌 잔상을 되풀이 하다 결국 자신의 영화로 만들어낸 샘은 차근차근 영화라는 운명을 맞이하러 나아간다. 동부-중부-서부로 이어지는 이 과정은 앞서 언급한 유년기-청소년기 전반부-청소년기 후반부와 연결되면서 운명인 영화와 샘의 삶 사이 일치를 더욱 강화한다. 공간의 전개와 삶의 전개 사이를 좌절과 체념을 거쳐 비약을 통한 일치라는 종말의 서사로 채우며 말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뉴저지라는 도시 공간에서 유년기의 샘이 마주한 영화는 환상과 상상을 현실화하는 하나의 놀이에 가깝다. 이러한 놀이가 가능한 것은 뉴저지라는 도시 공간에서 영화를 마주했기 때문이다. 도시라는 공간에서 샘은 다른 누구보다 빠르게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수 있었고 나아가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카메라까지 얻는다. 심지어 영화를 찍기 위한 물질적 요소까지 풍족한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한 공간에서 샘은 영화를 놀이로 체화한다. <지상 최대의 쇼>의 기차와 자동차의 충돌 잔상을 되풀이 하다 결국 자신의 영화로 만들어낸 뒤로 샘은 자신이 보고 들으면서 상상으로만 남긴 이미지들을 영상으로 남긴다. 치과에서 있을지 모를 무서운 일. 살아 움직이는 미라. 귀신의 집이 아니라 정말 살아있는 해골을 본다면. 상상을 현실화한다는 것은 통제할 수 없는 줄 알았던 것을 통제하는 것이다. 기차와 자동차의 충돌을 눈 앞에서 재현해보고 싶다는 샘의 욕망에 대해 미치는 악보를 보며 자신의 방식대로 연주하는 것에서 자신만의 세상을 통제하고 싶어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즉, 샘에게 영화는 남들은 모두 도망가는 토네이도를 보러 갈 정도로 위험천만하면서도 재밌는, 세계를 통제하는 놀이인 셈이다. 샘이 상상의 산물을 현실화하는 것을 넘어 가족의 일상까지도 영상으로 담으며 영화로 만들게 되는 것은 필연이었을 것이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하지만 뉴저지를 떠나 애리조나에 오면서 영화는 샘에게 밑바닥으로 추락하는 좌절과 체념의 감각을 새긴다. 뉴저지가 영화를 놀이로 즐길 수 있는 도시였다면 애리조나는 더 넓은 야외에서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촬영 공간이 확장된 곳이자 그렇기에 영화에서 느낀 통제감을 잃게 되는 곳이기도 하다. 샘에게 영화를 통해 세계를 통제하려는 욕구는 알게 모르게 계속해서 자라난다. 엄마의 하이힐에 구멍난 악보를 보고 총격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발포 효과가 없어 가짜처럼 느껴진 자신의 서부 영화 필름에 바늘로 구멍을 내 발포 효과를 빛으로 낸다. 자신이 만든 영화 중 가장 많은 인원이 투입된 전쟁 영화에서는 수륙탄 특수 효과, 총격에 따른 피 효과와 같은 특수 효과만이 아니라 배우의 연기까지 하나 하나 지도한다. 하지만 서부 영화에 대한 통제와 전쟁 영화에 대한 통제는 중간의 두 사건으로 인해 전혀 다른 맥락을 지니고 있다. 전자는 아직 운명으로서 영화를 자각하지 못해 영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유년기의 놀이로서 통제감의 연속에 가깝다. 하지만 후자는 운명으로서 영화를 받아들이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깨달으면서 느낀 두려움으로부터 달아나려는, 즉 운명을 애써 잊으려는 몸부림으로서 통제감에 가깝다. 이러한 차이를 일으킨 사건 중 하나는 삼촌 보리스(주드 허쉬 분)와의 만남이고 다른 하나는 가족 캠핑 영화 편집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삼촌 보리스와의 만남은 처음으로 삶에 스며든 운명을 자각하는 사건이다. 이전의 샘에게 영화는 하나의 놀이였다. 취미라는 버트의 말에 발끈하기는 해도 그것을 운명으로 진지하게 자각한 것은 아니다. 자신이 좋아하기에 하고 싶은 일일 뿐이다. 하지만 보리스는 외할머니의 죽음에 슬퍼하는 미치를 보라고 말한다. 뛰어난 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었던, 샘과 자신처럼 가슴 속에 예술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던, 그렇기에 버트를 사랑하지만 너무나 다른 그에게 온전히 마음을 맡기고 기댈 수 없어 말라 죽어가고 있던 엄마 미치. 보리스를 통해 샘은 미치가 단순히 외할머니가 죽었기에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슴 속 열정에 가족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말라 죽고 있음을 깨닫는다. 심지어 보리스는 미치처럼 결국 예술이라는 마약에 빠진 샘도 가족과 영화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며 결국 영화를 선택할 것이라 말한다. 강하게 샘의 볼을 부여잡으면서. 보리스가 새긴 육체적 고통에 샘은 환상으로 가득할 뿐만 아니라 남들과 다른 자신만의 재능을 깨닫게 해 마냥 즐겁고 기쁘게만 여겨진 영화에 대해 처음으로 어렴풋하지만 찝찝한 두려움을 느낀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이내 현실로 다가온다.


샘에게 가족 캠핑 영화는 전쟁 영화보다 흥미가 없는 영화이다. 외할머니의 죽음에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슬퍼하고 정신이 없어 보이는 미치에게 어찌할 바를 모르는 버트의 애원에 전쟁 영화 촬영을 미루고 만들게 된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샘은 처음으로 카메라를 통해 느낀 통제감이 세계 앞에서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 깨닫게 된다. 누구보다 사랑하는 미치와 의지하던 베니(세스 로건 분)의 외도가 고스란히 담긴 캠핑 영화 필름.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찍히게 된 외도 장면들은 샘에게 카메라에 의해 통제하던 세계가 사실은 전혀 통제되고 있지 않다는 혹은 통제되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카메라에 담긴 미치가 베니의 품에서 웃을 때 짓는 미소는 버트를 향한 미소와 분명 다르다. 피사체는 대상이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이기에 자신의 의도에서 벗어난 모습으로 필름에 새겨질 수 있다는 사실. 통제하지 않았으나 어쨌든 자신의 카메라에 흘러들어온 세계. 통제하지 않았다고 해서 자신의 영화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는 중압감을 알지 못했다. 

출처. 왓챠피디아

하지만 단순히 통제감이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느껴져 영화에 섬뜩함을 느낀 것이 아니다. 보리스가 볼에 남긴 육체적 고통. 예술과 가족은 양립할 수 없어 언젠가 선택해야 할 것이고 결국 영화를 선택할 것이라는 물리적 고통. 그 고통이 잔상이 아닌 실재로 느껴진다. 세계를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은 날뛰는 세계에 자신의 가족까지 포함한 타인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통제할 수 없기에 어디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는 영향에 노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필름에 새겨진 외도는 자신의 의도가 아니기에 자신의 영화가 아니라고 말할 수도, 그렇다고 영화라고 말하며 보여주면 평범하게 행복하다고 생각한 가족을 불행의 구렁텅이로 밀어넣을 수도 없다. 영화로 자신만의 작은 세계를 통제하며 즐겁게 놀던 아이는 거대한 운명을 우습게 봤다는 것에 섬뜩한 두려움을 느껴 당황한 채 뒷걸음질 친다. 통제할 수 없다는 감각을 넘어 통제되지 않은 세계가 자신의 현실로 돌아오는 가능성의 섬뜩함을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샘은 전쟁 영화를 촬영하면서 모든 특수 효과를 비롯해 배우의 연기까지 모두 통제한다. 서부 영화에서 샘은 바늘을 활용한 특수 효과를 거치며 영화를 진지하지만 여전히 놀이로 대하며 자신의 통제 재능에 취해 있다. 하지만 운명인 영화가 지닌 통제 불가능의 가능성을 깨달은 채 전쟁 영화를 찍는 샘의 모습은 통제 재능에 취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깨달은 운명의 섬뜩함을 잊으려고 촬영에 집착적으로 몰입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해본 적 없는 배우의 연기 지도에서는 배우에게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강압적으로 주입한다. 자신의 눈으로 본 운명의 섬뜩함을 잊은 것처럼 통제감을 최대로 발휘한다. 하지만 카메라로 영화의 마지막 장면, 죽은 전우들을 바라보며 죄책감에 허우적대며 눈물을 쏟는 배우를 찍으며 샘은 카메라로 보이는 화면에서 불안감을 느낀다. 혹시라도 통제하지 못한 것이 있지 않을까? 이 카메라에는 내 눈으로 본 것만 담겨 있을까? 샘의 불안감은 곧 현실화된다. 샘의 통제를 비웃기라도 하듯 자신의 연기에 몰입한 배우는 촬영이 끝났음에도 자신의 감정을 허우적대며 화면 바깥으로 걸어간다. 


영화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지닌 섬뜩함을 체험까지 하면서 샘은 완전히 영화를 포기한다. 영화를 찍지 않겠다 다짐하며 카메라를 팔고 이직하는 아버지에 의해 가족과 함께 캘리포니아로 떠난다. 하지만 샘의 다짐과 다르게 베니는 말한다. "캘리포니아에서는 누구나 영화를 찍어!" 그리고 베니의 말에 관객도 공감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 캘리포니아에는 미국 영화 산업의 중심지, 즉 온갖 영화들이 모이는 영화의 수도인 할리우드가 있다. 영화가 내재되어 있는 공간을 넘어 그 자체로 이미 영화인 곳. 영화에게서 멀어지려는 샘은 모순되게도 오히려 영화 그 자체로 들어간다. 영화를 잊으려고 해도 샘에게서 영화는 떠나가지 않는다. 오히려 유대인을 혐오하는 캘리포니아 거인들 사이에서 샘은 삶의 희노애락을 더 직접적인 형태로 경험한다. 학교 폭력, 첫사랑, 부모님의 이혼, 고등학교 졸업 등. 샘에게 영화 그 자체인 캘리포니아는 오히려 영화로 만들 수 있는 감정과 사건이라는 소재들이 쌓이는 공간이다. 동시에 영화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어렴풋하게 사유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공간이다. 잊고 있던 영화를 다시 찍게 된 땡땡이의 날, 샘은 영화가 지닌 섬뜩한 두려움은 신경 쓰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에게 쌓인 소재들을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영상으로 남길 수 있는지만 생각한다.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그대로 따라가면서 좋은 영화를 위해 찍을 뿐이다. 


이처럼 샘이 자신의 삶에 스며드는 운명인 영화를 있는 그대로 받는 과정은 예정된 운명을 향해 동에서 서로 이동하는 공간과 그 공간에서의 샘의 삶이 연계되어 있다. 그 연계는 영화에서 느끼는 쾌감, 좌절과 체념, 비약의 실 당기기로 더욱 견고해진다. 견고함은 나이 든 이야기꾼의 따뜻하면서도 냉정한 시선으로 더욱 힘을 얻는 듯하다. 땡땡이의 날 영화를 촬영한 다음 샘은 두 편의 영화를 찍는다. 하나는 캘리포니아의 새 집으로 이사하는 가족이고 다른 하나는 미치와 버트의 이혼에 절규하는 여동생들이다. 이 중 전자보다 후자의 영화에 대해 나이 든 이야기꾼은 영화를 받아들인 샘, 즉 자신의 모습이 기괴하다는 것을 인정하듯 냉정한 시선을 보인다. 베니를 잊지 못하는 미치, 그런 미치와 이혼을 선택하는 버트, 미치와 버트에게 애원하며 이혼하지 말라는 여동생들. 샘은 그들을 관찰하다 거울에 비치는 자신을 본다. 그들의 감정과 행동을 카메라에 담으며 영화를 찍고 있는 자신의 모습. 거울 바깥에서 영화를 찍는 거울 안의 자신을 바라보는 샘은 자신의 눈을 피하지 않고 거울 안의 자신을 직시한다. 그러한 직시처럼 샘은 가족의 불화가 있었는지도 신경 쓰지 않고 그저 땡땡이의 날 영화를 편집한다. 편집을 마친 다음에는 엄마와 가장 닮았음에도 엄마를 이해하지 않으려는 자신을 탓하러 온 여동생과 함께 본다. 

출처. 왓챠피디아

나아가 땡땡이의 날 영화를 상영한 졸업식 파티를 통해 샘의 모습에서 기괴함은 서서히 옅어진다. 유대인 혐오에 기반해 괴롭힌 자신을 영웅으로 보이게 만들어 결국 사랑하는 여자에게 선택 받기까지 한 로건(샘 레흐너 분)은 영화에서처럼 영웅이 될 수 없기에 영화를 만든 샘에게 따지며 괴로워한다. 하지만 그런 로건에게 샘은 자신은 그저 좋은 영화를 만들 생각일 뿐이었다고 답하고, 자신의 앞에서 흐느끼고 괴로워 한 로건의 이야기를 어디 가서 얘기는 안 해도 영화로는 만들 수 있다는 농담을 던지기도 한다. 그에게 영화는 어린 시절 본 <지상 최대의 쇼>,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처럼 상상으로 떠다니는 일을 현실화해 사람들의 즐거움과 흥미를 자극하는 것이다. 영화를 찍는 과정은 통제할 수도, 통제할 수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과정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찍다 보면 좋은 영화가 나온다. 그러면 그 영화는 생각지도 못한 다정함을 마주하게 한다. 졸업 영화에서 찌질하게 찍힌 것에 분노해 자신에게 달려드는 채드(옥스 페글리 분)를 대신 막아서 오히려 한 대 갈겨주는 로건처럼. 다정함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정하고 말고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그저 그런 영화를 만드는 과정이 즐겁과 가장 자기답다고 느껴질 뿐이다. 


나이 든 이야기꾼의 냉정한 시선으로 관객은 샘의 모습을 외면하고 싶을 정도로 기괴하다고 느끼면서도 외면할 수 없다. 샘을 외면하는 것은 관객이 스스로를 외면하는 것과 같다. 누군들 샘과 비슷한 경험을 하지 않았을까. 자신의 삶에서도 운명이라고 생각한 그 무엇을 마주한 적이 있지 않은가. 혹은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혹은 그 운명을 찾기 위해 방황하고 있지 않은가. 자신에게 영화가 어떤 의미인지를 삶에서 체화하고 깨달으며 결국 자신의 삶을 살기로 선택하려는 샘은 관객의 모습이기에 외면할 수 없다. 정말 관록 있는 이야기꾼이다. 자신이 먼저 자신의 모습을 냉정하게 기괴하다고 말하다니. 치사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고. 가장 즐겁게 자기다울 수 있는 일에 끌리는 이 아이처럼 우리도 결국 스며든 운명을 받아들이게 되지 않겠냐고. 나이 든 이야기꾼의 시선이 관객의 시선에 들어와 들려온다. 비록 그것이 이기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하고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미치로 다시 한 번 나이 든 이야기꾼은 치사하지만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지독하지만 그래, 인정.


잠시 추가로, 다른 소리를 하자면, 사실 이 영화에서 백미는 단연 마지막 장면이라 할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샘은 영화를 받아들인 것과 달리 대학에 적응하지 못해 공황에 빠진 채 살아간다. 그런 샘에게 영화 같은 순간이 찾아온다. 영화를 찍겠다는 일념으로 여러 스튜디오에 보낸 취업 편지 중 찾아오라는 TV 스튜디오. 그 스튜디오의 사장은 영화를 찍고 싶어하는 샘을 기특하게 여기더니 갑자기 바로 옆 스튜디오에 있는 영화의 거장을 소개한다. 존 포드(데이빗 린치 분). 심지어 어떤 여성의 키스 린치를 당해 알 하나가 사라진 선글라스를 끼고 들어온 존 포드가 자신에게 10분(실제로는 5분도 안 되었다만)을 할애해 만나준다고 한다. 하지만 만남 자체가 영화 같은 순간인 것이 아니다. 정말 영화 같은 순간은 그 만남 이후이다. 존 포드는 영화 감독이 되고 싶다는 샘에게 왜 사람 말려 죽이는 영화를 찍고 싶냐고 냉소적으로 말한다. 그런데 갑자기 샘에게 벽에 걸린 영화 장면 사진 앞에 보내더니 사진을 설명해 보라고 한다. 샘은 긴장했지만 자신의 재능을 보이고 싶다는 일념으로 장면에 이야기를 붙여 설명하려고 한다. 그런데 존 포드는 그런 샘에게 일갈한다. "수평선이 위에 있으면 흥미롭고, 수평선이 아래에 있으면 흥미로워. 수평선이 중간에 있으면 존나 재미없어. 이제 꺼져!" 


아, 왜 잊고 있었지? 이야기 그 내용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영화를 어떻게 하면 흥미롭게 보일 수 있을지이다. 그리고 그것을 이미 전쟁 영화를 준비하며 보리스에게 콘티를 보여주며 신나서 설명한 적도 있지 않은가. 이야기는 살면서 수없이 쌓일 것이다. 그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흥미롭게 보일지만 생각하면 된다. 영화는 이미 받아들였다. 남은 것은 그냥 찍으면 된다. 어디 스튜디오에 속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다시 어린 시절처럼 카메라를 들고 찍으면 된다. 존 포드의 사무실을 나서 평소 보던 세상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는 샘의 눈이 빛난다. 그런 빛나는 샘을 나이 든 이야기꾼이 시선에 담는다. 아차차. 수평선이 중간에 있다. 위로? 아래로? 지금은 아래가 낫겠다. 카메라가 수평선을 아래에 둔다. 스튜디오와 세트장 건물들 위로 하늘이 넓어지고 구름 사이로 해가 환한 빛을 샘에게 내린다. 영화 같은 샘의 인생, 인생 같은 샘의 영화가 막을 내린다. 


<파벨만스>는 영화와 사랑에 빠진 늙은 영화 감독의 자전적 영화이자 영화에 대한 감독의 사랑 고백이다. 그 사랑 고백은 거국적이지도, 화려한 미사여구로 치장되지도 않았다. 그저 삶을 찬찬히 돌이키며 따뜻하게 회고할 뿐이다. 그 회고는 비약의 일치를 지닌 종말의 서사에 예정된 운명을 향해 나아가는 공간의 이동에 자신의 삶을 덧입힌 평범한 모습이다. 하지만 그런 평범성을 전달하는 차분하면서도 따뜻하고 정겨운 목소리는 관객에게 영화 속 감독 자신의 삶과 더불어 자신의 삶을 회고하게 한다. 지금 자신의 흥미로운 영화처럼 삶은 사실 굉장히 영화 같지 않냐고, 오히려 영화가 삶 같지 않냐고, 그래서 사랑스럽지 않냐고 묻는 듯하다. 비슷하게 과거 연극 동아리의 한 선배가 한 말이 있다. 연극은 정말 참 거지 같다고. 그런데 또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고. 거지 같은 것과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는 것이 참 짜증나지만 49:51이라서 계속 연극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 어느 순간에 어떻게 스며들었는지 모를 그 운명은 짜증나지만 단 1% 만큼 좋아서 어쩔 줄 모르기에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1%의 차이는 인생이 운명인지, 운명이 영화인지 모를 만큼 인생과 운명을 일치시킨다. 그런 운명을 어떻게 싫어할 수 있을까. 조금이라도 더 그 운명에 가까워지기 위해 당장이라도 나가야지, 어쩌겠는가? 


Thank you, sir. 


My pleas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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