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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Mar 17. 2023

혐오에서 사랑으로 비약: 모순적인 자기 구원의 아름다움

코엑스. 메가박스. 더 웨일.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두운 스크린 안에 한 사람이 있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목소리로 스크린 너머에 존재한다. 코로나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활성화되기 시작한 화상 강의에서 강의를 진행 중인가 보다. 보통은 학생들이 화면을 켜지 않는 것과 달리 이 강의에서는 학생들이 모두 화면을 켠 상태이고 오히려 강사가 화면을 닫아놨다. 뭐 학생이건 강사건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을 수 있으니 그럴 수 있다 싶으면서도 학생들에게 신뢰를 줘야 하는 강사가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것은 신뢰감을 떨어뜨린다. 그걸 모르는 강사는 없을 듯하고... "왜 오늘도 화면을 안 켜시지?"라는 한 학생의 메시지처럼 그것은 관객인 우리도 궁금하다. 그리고 그 호기심에 빠져들 듯 카메라는 점점 검은 창으로 들어간다. 이내 창 너머에 있는 강사의 모습이 보인다. 아! 학생들보다 먼저 알게 된 강사의 모습은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낸다. 보는 것만으로도 징그러우면서도 안타까우며 외형에서 느껴지는 혐오스러움과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모습. 272kg의 거구 찰리(브랜든 프레이저 분)가 소파에 앉아있다. 앉아있다는 표현이 부자연스럽다. 소파의 쿠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소파 깊이 파고들어 있는 찰리의 몸은 앉아있다기 보다는 소파 그 자체처럼 보인다. 비만이라는 말로도 설명이 부족할 정도의 그는 이미 인간이 아닌 그 무언가처럼 보인다.


우리가 무언가를 혐오한다고 했을 때 왜 그것을 혐오하는지 생각해보면 그것의 존재와 그것의 현 상태 사이에서 일종의 어긋남이 보이기 때문일게다. 관객이 찰리를 보는 순간 느끼는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의 소용돌이는 윤리적인 감정과 그 감정과 반대되는 어떤 감정들의 충돌이다. 이러한 충돌은 인지하는 대상이 평소 우리가 인지하는 일반적인 그것, 이른바 정상성 안쪽의 그것이 아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한 충돌에서 혐오의 감정도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에게 정상성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식되어 있는 정상성은 자기 자신조차도 구분하는 기준이 되고 그로 인해 인간은 모든 생물들 중 유일하게 자기 혐오를 하는 생물이 된다. 다른 모두가 괜찮다고 해도 스스로를 벌하며 한없이 깊은 굴로 침잠해 마음을 걸어 잠그는 존재. 그렇기에 사회적으로든, 영적으로든 구원은 인간에게 언제나 중요한 화두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결코 "완전히" 사랑하지 못하기에 그런 혐오의 순간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너무 깊어 숨이 막히고 그렇기에 죽고 싶지만 동시에 살고 싶은, 빌어먹게 모순된 생명의 본능 속에서 우리는 살아있으면서도 죽어있는 순간, 즉 구원을 바란다. 밑바닥에서 한없는 고통을 견디는 웅크림의 추진력을 모으며 인생에 다시 없을 비약을 꿈꾼다.


1. 스크린을 넘어 체험되는 물질성

대런 애로노프스키 감독의 <더 웨일(The Whale)>은 사무엘 D. 헌터의 동명 연극을 영화화한 것이다. 연극과 영화. 두 예술 매체의 가장 큰 차이는 물질성이라 할 것이다. 연극은 무대라는 한정된 공간에서만 사건이 발생한다. 무대는 공간 자체만이 아니라 공간 안의 배우, 조명, 음향, 소품 등 감각으로 경험하는 수많은 물질성의 총체이다. 이러한 무대의 물질성을 토대로 관객은 이론상 혹은 실제로 연극의 무대 너머로 상상을 통해 연극 세계에 대한 인식을 확장한다. 이렇게 보면 연극의 무대는 영화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확장되고 변화무쌍할 수 있다. 하지만 상상으로 인식이 확장된다고 해서 무대의 물질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 관객은 무대 위 물질성과 관련된 공간을 제외하면 그 이상으로 공간을 확장하지는 못한다. 상상하려고 해도 감각되는 무대의 물질성이 인간의 상상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실질적인 물질성을 지닌 공간과 물질성에 따른 인식의 한계는 영화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연극의 속도감을 줄이고 무게감을 늘린다.


반면 카메라만 있으면 이론상 어디서든 사건을 찍을 수 있는 영화는 스크린을 통해 물질성을 시각으로 국한해 반감시킨다. 대신 기술을 통해 연극보다 더 또렷하게 대상을 감각하게 한다. 영화의 촬영 기술만이 아니라 적용되는 모든 기술은 대상을 실재보다 더 실재처럼 시각화한다. 연극과 달리 카메라를 매개로 세계를 파편화하는 영화는 자본만 충분하다면 얼마든지 물질성을 다양하게 포착하거나 구현할 수 있다. 비록 감각을 시각으로 국한해도 영화는 인간이 현실에서 감각하는 것 이상으로 대상을 스크린에 시각화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가볍지만 변화무쌍한 세계를 구현할 수 있다. 시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을 차단 당한 관객은 물질성에서 자유로워지기에 상상을 통한 인식의 확장을 더 자유롭게 할 수 있다. 물론 어두운 공간에서 오롯하게 빛나는 스크린이라는 물질성은 영화의 관객이 인식의 확장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이지만 일반적으로 프로시니엄 무대라는 물질성을 바라보는 연극의 관객도 비슷하게 인식의 확장을 자유롭게 못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결과적으로 스크린이라는 매개물을 거쳐 시각으로만 인식되는 물질성은 연극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영화의 속도감을 높이고 무게감은 줄인다.

출처. 왓챠피디아

상반된 물질성을 지닌 두 예술 매체를 상호교차하는 과정에서 <더 웨일>은 연극의 물질성을 스크린에 최대한 극대화해 구현하면서 관객을 구원의 아름다움으로 비약시킬 준비를 한다. <더 웨일>은 암전 상태에서 서서히 조명이 들어오며 시작하는 연극처럼 어두운 화상 강의 스크린으로 카메라가 침잠해 들어가 찰리의 방으로 빠져나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무대에 들어오는 조명을 통해 최초로 물질성을 인식하는 연극의 관객처럼 영화 <더 웨일>의 관객은 침잠했다가 빠져나오는 카메라라는 조명을 통해 272kg인 찰리의 거구를 맞이한다. 이 일련의 과정은 관객에게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차라리 연극의 관객이 영화의 관객보다 어떻게 보면 더 안전하다. 연극의 관객은 눈으로 조명이 비치는 대상의 전체를 무대와 거리를 둔 관객석에서 전체로서 인식한다. 즉, 연극의 관객은 상대적으로 대상의 정체를 차근차근 파악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 하지만 영화의 관객은 다르다. 스크린과 얼마나 거리를 두고 있는지는 무의미하다. 애초에 카메라는 현실의 대상을 파편화해서 보여준다. 영화의 관객은 대상을 부분에서 전체로 파악하게 된다. 완전히 인식해 이해하기까지 걸리는 시간만큼 관객은 현실과 대상 사이에서 간극을 느끼기 시작한다.


찰리가 대체 얼마나 비만인 상태인지는 영화의 포스터로 대충 파악할 수는 있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는 포스터의 찰리와 달리 스크린 속 찰리는 살아 움직인다. 심지어 방금까지 강의를 하고 있던 찰리는 강의를 마친 뒤 거칠게 숨을 쉬고 있다. 거친 숨과 함께 그의 몸이 위 아래로 흔들린다. 스스로를 위로하는 열락의 순간이다. 한 번에 인식되지 않은 272kg의 거구가 자위를 하며 거친 숨을 몰아쉬는 모습은 시각을 중심으로 한 영화의 물질성이 오감에 기반한 연극의 물질성에 가닿게 하는 인식적 극대화이다. 맥락에 따라서야 누군가의 자위는 야릇하면서도 사랑스러울 수 있지만 이제 막 조명이 켜진 영화에서 관객은 이러한 인식적 극대화에 간극을 느끼며 감정의 소용돌이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윤리와 혐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수많은 감정을 담은 한숨. 을 막 쉬려는 순간 찰리가 심장을 부여잡고 숨을 헐떡이며 고통스러워 하는 와중에 종이 더미를 살핀다. 영화는 관객에게 한숨을 쉬기 어려운 상황으로 시각화한 물질성을 끊임없이 관객에게 쏟아낸다. 쌓이는 물질성이 너무나 크기에 관객은 순식간에 곤두박질친다. 무겁다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인 찰리의 거구가 스크린이라는 시각을 넘어 체험되는 영화의 시작이다.


2. 더 깊이 침잠해 더 높이 비약하리 : 찰리-예수

찰리는 자신의 유일한 친구이자 간병인인 리즈(홍 차우 분)에게 말한다. "사람은 타인에게 무관심할 수가 없다고. 사람은 놀라운 존재야." 이 영화를 보면서 찰리에게 무관심할 수 있는 관객이 있을까? 찰리라는 인물이 시각을 넘어 극대화된 물질성으로 인식되는 순간 관객은 그것이 혐오에 기반한 것이든 연민에 기반한 것이든 '왜?'라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찰리에게 자위는 천국으로 가는 열락의 과정이 아니다. 비만인 그에게 자위는 심장에 무리를 주는 행위, 즉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자기 파괴의 과정이다. 왜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고 가고 있을까? 병원에 가지 않으면 1주일 안으로 죽을 것이라는 리즈에게 찰리는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말한다. 왜 죽음을 피하려고 하지 않을까? 이미 찰리의 삶은 죽음에 거의 근접해 있다. 육체적으로 비만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 속 찰리는 모든 지점에서 죽음으로 침잠하고 있다. 그는 집 밖으로 나가 사람들과 교류하지 않고, 집 안에서도 소파에서만 머무르며, 움직이기 위해서는 보조기구가 필요하다. 뭔가를 먹는 것은 그에게 생명 유지 혹은 미식을 위한 것이 아니다. 혐오. 그것도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가족으로부터 혐오를 받으며 스스로를 말려 죽인 연인에 대한 추모이다. 자신의 연인을 죽인 혐오스러운 세상에 대한 분노를 속으로 밀어넣는 행위이다. 찰리의 집은 누구에게도 사랑 받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며 스스로를 유폐시킨 감옥이면서 거식증으로 말라 죽은 연인의 추도실이며 세상을 향한 분노를 숨기고 있는 고래의 침실이다. 그렇기에 찰리가 죽기까지 1주일이라는 영화의 시간은 관객에게 죽음을 향해 침잠하는 찰리에게 관심을 갖게 하는 시간이자 극대화된 물질성이 서서히 퍼지며 찰리와 같은 우울의 감정을 이입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영화는 관객이 우울감빠져 있게 두지 않는다. 모순되게도 영화는 찰리의 우울감에 이입하는 관객에게 비약을 향한 기대를 심는다. 자신을 위하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는 찰리가 유일하게 자신을 위해 과거 사랑을 위해 내팽개친 친딸 엘리(세이디 싱크 분)와 만나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찰리의 선택이 성소수자임에도 죽음을 앞둔 순간 결국 아버지로서 자신의 혈육을 찾는 "나쁜 아버지의 갱생" 서사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문제는 잠시 미뤄두고 찰리와 엘리의 관계에서 느껴지는 비약의 기대는 무엇일지 생각해보자. 찰리가 엘리로부터 바라는 것은 온전히 자신을 위한 행동이 아니다. 단순히 죽음을 앞둔 순간 딸이 생각난 것이 찰리를 움직이한 최초의 원동력일 게다. 천국의 유무와 그에 대한 믿음과는 관계없이 삶의 마지막에 자신의 죄를 조금이라도 덜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또한 사랑하고 미안했기에 '애써' 잊으려고 했을 뿐이다. 아마 찰리는 삶의 마지막에 엘리의 얼굴을 보고 잠깐이나마 같이 있기만을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만난 엘리는 자신을 향한 분노만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서도 냉소와 분노를 보낸다.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이다. 온갖 멍청이들과 그들에 의한 혐오로 가득한 세상에 자신도 냉소하고 분노한다. 하지만 세상에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인간은 자신의 관점으로 모순된 세상을 다양하게 가꾸어 내고 서로를 보듬으며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도 하다. 생의 마지막에 찰리는 자신의 사명을 깨닫는. 미처 마무리 하지 못한 일을 결자해지 하는 것. 오랜 기간 애써 잊고 살았던 엘리가 자신이 그 자체로 아름다운 인간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관객이 찰리와 엘리의 관계로부터 보게 되는 비약의 기대는 무저갱과 같은 우울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찰리가 엘리와의 만남을 이어가는 가운데 살고자 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롯하게 엘리만을 바라보는 찰리의 사랑이 누군가를 연상시킨다. 인간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고 승천했다고 하는 예수. 찰리에게는 예수의 이미지가 연결되어 있다. 찰리는 자신의 죽음은 확정하고 있다. 그저 그는 자기 생의 마지막을 엘리라는 인간을 위해 희생하고 있다.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신의 딸인 엘리가 한 명의 인간으로서 스스로를 사랑하게 되는 것을 바랄 뿐이다. 즉, 찰리와 엘리의 관계는 생물학적으로 아버지와 딸이라는 상하 관계이되 둘의 관계는 대등하다. 아버지로서, 성소수자로서, 한 명의 인간으로서 찰리는 삶을 완전히 포기한 인간이다. 반면 엘리는 아직 삶을 온전히 시작하지 않은 상태에서 현재와 미래 모두에 냉소와 분노를 보내는 인간이다. 이 둘은 겉으로 보이는 온도가 달라보여도 똑같이 우울에 침잠해 있는 인간이다. 그런 엘리를 위해 찰리는 마지막 순간을 바친다.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7. 5조로 쓰인 엘리의 시에서 찰리는 엘리의 재능을, 마찬기지로 이단인 새생명 교회의 토마스(타이 심킨스 분)을 도운 엘리에게서 따뜻한 마음을 발견한다. 죽음까지 1주일 정도 남은 상황에서 찰리는 엘리를 위해 온전히 모든 시간을 바친다. 수면제를 먹이고, 까마귀를 위해 음식을 내놓는 접시를 깨기도 하며, 자신의 사진을 SNS에 욕설과 함께 올려도 찰리는 엘리를 기다리고 엘리에게 자신의 발견을 하나씩 전한다.


오로지 어느 한 사람을 향해 오롯한 사랑을 전하는 찰리의 모습은 예수의 이미지와 연결되어 있지만 그로 인해 관객이 비약의 기대를 느끼는 것이 아니다. 이미 무저갱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파괴의 상황과 오롯하고 순수한 사랑을 전하는 행동 사이 격차. 스스로를 파괴하며 죽음을 기다리는 이가 다른 누군가에게 "당신이라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엄청난 비약의 에너지를 품고 있다. 찰리는 엘리가 글을 쓸 줄 아는 재능이 있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글쓰기 강의에서 찰리는 학생들에게 솔직해지라고 말한다. 자신이 진정 하고 싶은 말을 하나의 주제로 만들어 솔직하게 쓰라고 말한다. 세상을 향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이라는 것이다. 즉, 찰리에게 엘리의 글쓰기 재능은 재능이라 사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엘리가 정말 솔직하게 자신을 세상에 보이고 있기 때문에, 그 사실 자체가 사랑스러운 것이다. 누구도 가르쳐 준 적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감정과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일 줄 아는 용기. 그것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다만 그 용기가 냉소와 분노로만 가득찬 것이 안타깝다. 냉소와 분노로만 가득한 용기는 거식증이든 폭식증이든 세상 속 자신을 끊임없이 파괴할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타인을 혐오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싫어함에도 여전히 관심을 가지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 가능성은 세상의 아름다움을 일깨운다. 그런 가능성을 부디 스스로 받아들이길 바랄 뿐이다. 그렇기에 찰리는 마지막 순간을 불태우며 엘리를 대등한 인간으로 대하며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비약을 보인다. 죽음을 향해 침잠하는 고래는 반대로 사랑을 향해 비약하고 있다.


3. 신 없이도 구원에 이르는 인간

출처. 왓챠피디아

이 영화의 비약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는 오롯하게 인간 스스로가 이뤘기 때문이다. 전작 <노아>나 <마더!>를 생각해보면 본작에서도 감독인 대런 애로노프스키는 끊임없이 신에게 냉소적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인간에 의해 창조된 신에게 냉소적이다. 본작에서는 이러한 냉소가 퀴어와 연결되어 직접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신을 증오하는 무신론자 찰리, 종말을 외치며 선교하는 새생명 선교회, 그런 선교회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선교하다 성소수자임을 깨닫고 찰리에게 다가온 리즈의 오빠, 그런 아들을 가족과 교회로부터 완전 파문한 리즈의 아버지 등. 만물을 창조하고 고루 사랑하는, 전지전능(能)한 신은 신기하게 성소수자를 악으로 규정하고 징벌할 수 있게 한다. 기독교의 신에게는 전지전능하다는 수식어 외에 전선(全善)하다는 수식어도 붙는다. 모순의 발생이다. 이 글에서 모든 모순을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되 가장 큰 모순을 하나 말하자면 모든 것을 알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존재는 다른 것을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으로 판단할 수 없다. 이러한 모순에 대해 대런 애로노프스키 감독은 전작 <마더!>에서 세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정 없이 인간만을 사랑하는 괴이한 신의 모습을 제시해 신을 비웃었다. 만물을 창조했다고 하는 신이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멋대로 파괴하고 있는 인간만을 사랑하고 정작 세계에게는 끝없이 희생을 강요하는 기이하고도 뒤틀린 상황. 과연 신이 있는가?


<더 웨일>에서 감독은 신과 구원의 구조로 유지되는 종교에서 신을 아예 지워버린다. 인간에 의해 창조된 신에게 구원은 신 그 자체이다. 그가 예수를 인세에 내려보낸 이유는 인간의 죄를 자신이자 예수를 통해 대속하고자 함이요 언제고 다가올 종말의 시기에 자신의 율법을 기준으로 인간을 구원하는 새로운 도정의 시작을 위함이었다. 하지만 정작 <더 웨일>에서 신은 그 누구도 구원하지 못한다. 종말을 외치며 신을 믿으면 구원에 이를 수 있다 말하는 토마스는 신에 의해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 엘리에 의해 구원 받는다. 애초에 신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 영화는 찰리의 외침으로 이를 더욱 명확하게 한다. "알아야겠어! 내 인생에서 잘한 일이 하나라도 있다는 걸!" 엘리를 향한 찰리의 오롯한 사랑은 삶의 마지막을 불태우며 구원으로 도달하는 찰리 자신의 에너지이지 신에 의한 어떠한 도움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이다. 회개와 사랑은 모두 타인을 경유해 자신에게 돌아오는, 인간이 스스로를 위하는 행위이다. 인간에 의해 창조된 신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며 오직 인간만이 자신의 의지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 죽기 직전 눈에 비치고 귓가에 울리길 바란 어린 시절 엘리의 <모비딕> 감상문을 엘리의 목소리로 들으며 찰리는 272kg의 거구를 아무런 보조기구 없이 혼자의 힘으로 온전히 일어선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순을 활용해 간극을 벌리고 간극 사이 에너지를 자극해 그 간극을 순식간에 비약한다. 연극의 물질성을 파편화된 시각으로 극대화하는 시작은 모순의 힘을 빌리고 있다. 오감으로 파악해야 하는 물질성이 파편의 중첩으로 현실보다 더 거대한 물질이 되어 시각된다는 것이 모순적이다. 찰리는 스스로 생의 마지막을 불태우며 투쟁해 구원에 도달한다. 이 결과조차도 참 모순적이다. 신에 대해 누구보다 냉소적인 감독이 가장 종교적인 순간을 아름답게 그려내다니. 이런 모순마저도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침잠과 비약의 모순에 연결되는 듯하다. 관객은 침잠에 이입해 고통스러워 하면서도 구원으로 비약해 평안을 느낀다. 모순에 기초한 비약은 너무나도 순식간이라 더할 나위 없는 카타르시스에 도달한다. 카타르시스는 에너지의 발산이자 비움이다. 비워진 공동에 무엇을 채울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이 신을 통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는 아름다운 가능성이 채워질 수 있지 않을까? 우리 각자의 안에 있을 고래의 가능성. 비록 삶이 침잠해야 하는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하더라도 고래는 그 더러운 것을 이겨내며 더욱 깊이 잠수할 것이다. 잠수는 반대로 비약이다. 더 깊이 침잠할수록 더 높이 비약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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