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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Nov 12. 2023

한 세대의 끝에서 다음 세대를 축복하다

용산. CGV.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세대를 처음 배웠을 때 기억나는 것은 한 세대를 보통 30년으로 본다는 것이다. 30년 정도가 지난 이후에는 다음 세대가 등장한다는 이 관점에서 본다면 100세 정도로 인간의 수명이 늘어난 현재는 최소 3개의 세대가 세계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아직 자라며 세계를 배우고 있는 유년기의 세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며 세계를 변화시키는 청년기의 세대, 세계에서 자신의 끝을 기다리는 노년기의 세대. 보통은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잠깐 다른 상상을 해보자. 우리는 세계가 단일하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각자가 보는 세계는 다를 수 있지만 보고 있는 세계 그 자체는 하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세계는 과연 단일하게만 존재하는가? 세계 그 자체는 단일하면서도 다중으로 존재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우리 각각이 보고 있는 세계가 조금씩 다르다면 세계 그 자체는 사실 우리 각각이 보고 있는 세계의 합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를 세대에 적용한다면 최소 3개의 세대가 공존하는 현재는 최소 3개의 세계가 경합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은퇴 번복을 처음 접한 것이 2013년이었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다시 새로운 작품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로 돌아왔다. 전작 <바람이 분다> 이후 10년 만이다. 1941년 생으로 전쟁을 경험한 전후 세대라 할 수 있을 하야오 감독의 전작 <바람이 분다>는 <붉은 돼지>를 본 입장에서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파시스트에 맞서 인간 그 자체의 자유로움을 비행과 연결해 보여주던 <붉은 돼지>가 <바람이 분다>로 추락하는 기분. 물론 <바람이 분다>라는 영화 기저에는 <붉은 돼지>와 마찬가지의 주제의식이 깔려 있다. 제로센 전투기라는 비행기 이전에 비행과 비행기 자체를 동경하며 인간 그 자체의 자유로움을 꿈꾸었던 지로. 사실 <바람이 분다>를 봤을 때도 알고는 있었다. 지로가 우주를 동경하며 과학자가 되었으나 V2 미사일 개발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던 독일의 폰 브라운과 비슷하다는 것을. 혹은 자신의 원래 꿈과 달리 현실에 짓눌리고 이용당하며 결국 변질된 꿈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사람들과 비슷하다는 것을. 하지만 하야오 감독의 낭만적이고 동화적인 그림체로 표현되는 제로센 전투기 개발기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제국의 침탈에 대한 면죄부처럼 느껴졌다.


태세 전환하는 것 같으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보고 나니 <바람이 분다>를 다시 보고 싶어졌다. 어쩌면 다시 봐도 여전히 마음에 안 들지도 모르겠지만 이전과는 다른 감정을 느낄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지금까지 하야오 감독 본인의 필모그래피를 총망라한 듯한 이미지들을 엮어 만든, 어른을 위한 동화에 가깝다. 이 동화는 노년기 세대의 한 인간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지금까지 만들어왔던 세계의 끝을 받아들이고 뒷세대가 만들어나갈 세계에 대한 기대와 축복을 전한다. 3개의 세계가 서로를 진정으로 바라며 다음 세대를 향해 기대와 축복을 전하는 낭만적인 동화를 통해 3개의 세계가 경합하고 있을 현실을 향해 은퇴를 번복하면서까지 전하고 싶은 말을 전하는 것을 보면 하야오 감독도 결국 꼰대라면 꼰대일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어린이와 같은 시선에서 세계의 끝을 받아들이면서도 새로운 세계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과 축복을 전하는 꼰대가 있다면 오히려 그것은 이 세계가 살만한 세상임 반증하는 것 같아 행복하다.


1. 비약으로 이어지는 기승전결

영화의 제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렇게 불친절한 영화도 없을 것이다. 제목과 달리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삶의 방법에 대해서는 1도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이든 노인의 넋두리처럼 두서없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래서 무슨 이유에서 들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심지어 기승전결의 연결도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노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듯하다. 잠시 영화의 시작을 생각해보자. 소란스러운 집안 소리에 잠에서 깬 '마히토'는 화마에 휩싸인 병원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벽을 헤치며 달려가다 이내 모든 것을 집어삼킨 불길의 벽, 그러니까 병원을 둘러싼 사람들의 불길에 휩싸인다. 화마에 휩싸여 그렇게 엄마 히사코가 어린 시절 자신에게서 사라졌다는 듯. 2차세계대전의 태평양 전쟁이 한창인 시대적 배경까지 겹치면서 소년이 엄마를 잃는 아픔과 결핍의 과정인, 마히토가 잠에서 깨어나 병원으로 달려가기까지의 과정은 한 노인이 자신의 유년 시절을 먼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듯 표현된다. 여기에 화마에 휩싸인 엄마는 사람들의 불길에 휩싸인 마히토로 치환되면서 즉각적인 감정적 비약의 과정을 거친다. 작품의 기승전결 중 기도 아닌 그 이전의 서(序)에 해당할 영화의 시작은 2차세계대전이라는 시대적 배경과 맞물려 한 소년의 상실과 결핍을 압축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압축의 서에 이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비약의 과정을 이어간다. 노인의 중얼거림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나 엄마를 상실한 소년이 아빠의 재혼으로 엄마의 고향에 내려가는 것으로 이어진다. 아버지가 엄마의 동생이자 이모인 '나츠코'와 재혼했다는 서사가 있지만 그 사이 마히토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마히토가 엄마를 그리워하고 있으며 이모와 재혼하는 아빠를 받아들이지 못해 고통스러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엄마가 떠오를 정도로 닮은 나츠코에게 선을 긋 듯 깍뜻하게 대하는 점, 그와 최대한 말을 섞지 않으려 한다는 점, 전학을 간 학교에서 겉돌면서 따돌림을 자해로 숨기려 한 점 등. 마히토는 엄마를 향한 그리움으로 괴로워 하고 있다. 괴로움과 외로움 속에서 마히토의 눈에 들어온 것은 처음 자신이 이모의 저택에 온 날 한 번도 지붕 밑으로 날아든 적 없더니 자신을 쳐다보라는 듯 자신의 눈앞을 스쳐지나간 왜가리이다. 눈에 왜가리가 들어온 순간 마히토는 보통 왜가리가 아님을 직감하고 왜가리를 쫓아다닌다. 영화의 주인공이라 여겨지는 마히토는 감정 변화의 결과만 보이고 있을 뿐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관객이 주인공을 이해하기 어려운 상태가 된 것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그런데 왜가리를 쫓아다니는 마히토의 모습도 어딘가 당황스럽다. 첫 눈에 그 왜가리가 보통이 아님을 직감한 것도 그렇지만 소학교 그러니까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의 나이에 왜가리에게 활을 겨누며 "너 평범한 왜가리가 아니지?"라고 물을 뿐만 아니라 사람 말을 하는 순간에도 잠시 놀랄 뿐 이내 평정심을 되찾는다. 오히려 엄마를 만나게 해줄 수 있다는 왜가리의 말에 더 흔들릴 뿐이다. 죽은 엄마를 떠오르게 하는 나츠코를 피하는 것과 사람 말을 할 줄 아는 왜가리보다 엄마를 만나게 해주겠다는 제안에 더 흔들리는 모습이 중첩되면서 마히토에게 엄마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알려준다. 그럼에도 왜가리를 쫓는 마히토의 모습은 완전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마히토의 나이, 엄마 히사코를 향한 그리움, 갑작스러운 아빠의 재혼 등이 중첩된 와중에 정체모를 왜가리에게 집착하는 마히토의 모습은 너무나 갑작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즉, 엄마를 누구보다 그리워 하는 마히토와 아직 마히토에게 완전히 이입하지 못한 관객 사이에 깊고 넓은 비약의 순간이 존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게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비약의 순간으로 기승전결의 기를 채운다. 왜가리만이 아니라 마히토가 저택의 뒤에 있는 신비한 탑을 인식하고 찾아가는 과정도 살펴보자. 왜가리를 눈에 담은 마히토가 다음으로 눈에 담은 것은 저택 뒤에 있는 탑이다. 일본식 저택 뒤에 누가 세웠는지도 알 수 없는 신비로운 탑. 백설공주의 일곱 난쟁이들처럼 작달만한 할머니들은 마히토에게 옛날 이야기 혹은 괴담을 전하듯 이전 세대의 큰할아버지가 탑을 세웠다고 말한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탑을 세운 시기가 참 공교롭다. 책에 빠져 살던 큰할버지가 하늘에서 떨어진 별동별을 쫓아 탑을 세운 시기는 메이지 유신, 즉 모든 전통을 서구의 것으로 바꾸며 새로운 일본을 꿈꾸던 시기이다. 일본 역사에서 가장 급격한 비약의 시기 중 하나인 메이지 유신. 그 시기에 탑을 세운 할아버지는 증발하듯 사라진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기는 그야말로 모든 정보가 갑작스럽게 전달되면서도 정보 자체의 내용도 급격한 변화의 알레고리로 가득하다. 변화의 시기와 갑작스러운 실종. 두 세대가 지난 이후 엄마를 잃은 소년의 갑작스러운 왜가리와 탑을 향한 집착. 인물의 변화도 인물이 맞이하는 사건도 모두 비약으로 가득하다.


그다음 승.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승은 나츠코가 탑이 있는 숲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마히토가 왜가리가 찾아오라는 탑으로 가면서 시작된다. 마히토의 태도는 어딘가 이해하기 어렵다. 나츠코를 어려워하는 것 같으면서도 정작 나츠코가 사라졌다는 말을 듣자마자 할머니 키리코의 만류에도 주저없이 자신이 직접 만든 죽궁을 들고 찾아간다. 나츠코가 자신의 배다른 동생을 임신하고 있기 때문인가? 마히토는 인의(仁義)가 넘치는 인물인가? 하지만 도쿄에서 전학왔다는 이유로 관심을 받는 가운데 아이들과 시비가 붙고 시비 중 다친 것을 감추려고 일부러 돌로 자신의 머리를 치는 모습을 봐서는 마히토는 엄마를 잃은 고통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든 잠재우려는 감수성 높은 소년이 더 가까운 듯하다. 한 가지 더 의문인 지점. 마히토는 왜가리의 목소리를 따라 탑 안으로 들어왔다가 소파에 누워있는 여인을 보고는 나츠코와 엄마라는 말이 뒤섞인 모습을 보인다. 물론 마히토가 나츠코를 찾고 있었기에 나츠코라고 먼저 말하려다 엄마가 떠올라 엄마라고 말한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마히토는 엄마를 만나게 해주겠다고 탑으로 찾아오라는 왜가리의 말을 이미 들은 상태이다. 엄마를 향한 그리움에서 어른스러운 아이의 모습을 보였기에 나츠코와 엄마를 헷갈려하는 모습은 당황스럽기만 하다.


나츠코와 엄마를 헷갈리던 마히토는 이세계를 모험하면서 점점 자신이 찾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진다. 자신은 사라진 나츠코를 찾아온 것인가? 엄마를 만나기 위해 온 것인가? 그런 가운데 탑의 이세계가 점점 눈에 들어온다. 먹을 것이 없어 펠리컨과 앵무새는 식인을 하며 버티고 끝내는 나는 법을 잊은 땅을 기다 비참하게 죽음을 맞는다. 멀리 있는 지평선에는 햇살을 받으며 배의 무덤이 떠다니고 있다. 환상적이면서도 아름답고 평화로워 보이는 탑의 이세계는 점점 죽어가고 있다. 강력한 불의 마법을 아는 '히미'는 탑의 이세계에서 바깥의 세계로 생을 이어주는 '와라와라'들을 펠리컨들에게서 지키고 있지만 언제부터 탑의 이세계에 들어와 와라와라들을 지키고 있는지 모른다. 목표를 잃은 마히토처럼 탑의 이세계 역시 맹목적인 삶만이 존재할 그저 끝을 향해 달리고 있다. 탑의 이세계는 결과들만 존재할 뿐 전사 즉, 원인은 알 수 없기에 이해할 수 없으며 그로 인해 목적을 상실한 듯한 추락을 느끼게 한다. 기의 비약에 이은 추락의 승.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의 비약은 또다른 비약의 순간을 예고하는 듯하다.

출처. 왓챠피디아

목적을 상실한 추락의 순간의 비약은 그 다음 바로 전이다. 승의 부분에서 관객을 당황스럽게 하는 장면은 마히토가 히미를 만나 함께 하는 장면일 것이다. 맹목적인 삶 속에서 끝을 향해 나아가는 종말의 세계에서 마히토는 나츠코를 찾으러 왔다는 처음의 목적을 부여잡고 알 수 없는 상실감을 잊으려 한다. 그런 마히토에게 히미는 저택의 할머니들이 전해준 이야기를 떠오르게 한다. 엄마도 어린 시절 큰할아버지의 탑에 들어갔다가 1년 뒤에 실종됐을 때의 모습과 똑같이 나타났다는 이야기. 히미는 마히토가 나츠코를 찾고 있다는 말에 여동생을 말하는 거냐며 나츠코에게 데려다주기까지 한다. 그런데 마히토의 반응은 또 당황스럽다. 엄마를 만났음에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츠코를 찾으러 왔다는 것이 더 중요한 듯 그를 찾아 히미의 인도에 따라 탑의 하층 신성한 돌의 방으로 향한다. 신성한 돌의 방에 도착한 마히토는 임신한 나츠코가 잠이 든 듯 누워있는 것을 발견한다. 바로 이 순간, 마히토는 어찌된 일인지 나츠코를 엄마라 부르며 그와 함께 탑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 단순히 헷갈려 하는 것이 아니다. 방의 금줄들이 나츠코와 마히토 사이를 갈라 떨어뜨리려고 하는데 마히토는 나츠코를 엄마라고 부르며 기절한 순간에서도 그를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대체 왜?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감정적 비약이자 상황적 비약이다. 전의 시작이다.


"내 아들이 될 자의 어머니가 될 내 여동생을 돌려주세요."라고 탑의 돌에게 기도를 한 히미 덕에 마히토는 풀려나지만 정작 히미도 나츠코도 모두 사라졌다. 과거의 엄마인 히미와 현재의 엄마인 나츠코를 모두 찾아야 하는 마히토에게 탑의 주인인 큰할아버지가 등장한다. 별동별이 떨어진 곳에 세워진 신비로운 탑. 그 탑의 바깥에 또다른 탑을 세워 탑을 가린 큰할아버지는 탑의 안에서 돌을 쌓으며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탑 안의 세계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고 새롭게 쌓이는 돌로 하루하루를 겨우 버티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마히토에게 새로운 극적 순간이 도래한다. 히미와 나츠코를 찾아 밖으로 나갈 것인가, 큰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탑의 세계를 이어갈 것인가. 두 개의 선택을 받은 마히토에게 빠르게 결정의 순간이 다가온다. 큰할아버지의 꿈에서 깨어난 마히토는 왜가리와 함께 히미를 구하기 위해 앵무새 왕국을 빠져나가던 중 앵무새들의 왕이 기절한 히미로 큰할아버지와 협상을 해 자신을 다음 대 탑의 주인으로 선택해달라고 할 것을 알게 된다. 비록 큰할아버지는 자신과 히미 모두 각자의 원래 현실로 돌려보낼 생각이긴 하지만 이를 알지 못하는 마히토에게 히미와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다가온다.


앵무새 왕과 큰할아버지의 협상이 끝난 순간 마히토는 큰할아버지와 마주선다. 바깥에서 나츠코를 향해 악의가 있었기에 스스로에게 상처를 낸 마히토는 자신이 탑의 돌로 악의 없는 세계를 만들 수 없기에 후계자로 적합하지 않다고 말한다. 큰할아버지는 전쟁으로 불타오를 세상에 돌아가고 싶으냐고 묻는다. 그런 그에게 마히토는 자신을 도와 혹은 자신과 함께 탑을 모험한 키미코, 히미, 왜가리와 같은 친구를 만들며 살아갈 것이라 답한다. 목적을 상실하고 혹은 목적을 선택해야 했던 모든 순간을 경험한 마히토는 살아가는 것을 선택한다. 목적을 상실하더라도, 목적을 선택해야 하더라도 그 순간을 다른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 삶이기에. 마히토의 선택은 곧 탑의 세계에 대한 종언과 같다. 실제로 흐뭇한 미소를 지은 큰할아버지는 마치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듯 가기 전에 돌을 쌓아 세계를 만들어 보라고 한다. 그리고 이를 지켜본 앵무새 왕은 큰할아버지를 저주하며 자신이 대신 돌을 쌓는다. 하지만 온갖 악의로 가득한 앵무새 왕이 쌓은 돌은 흔들려 무너지려 하고 참지 못한 왕은 결국 스스로 칼로 돌을 베어 이세계의 종말을 가져온다.

출처. 왓챠피디아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결은 감정, 상황, 선택의 비약을 거쳐 단 하나의 결론으로 나아간다. 이세계의 종말은 큰할아버지 세대, 즉 노년기 세대의 종언일 뿐이다. 마히토, 히미, 나츠코가 무너지는 이세계를 탈출해 각자의 현실로 돌아가려는 때 마히토는 히미에게 원래 세계로 돌아가지 말고 자신과 함께 하자고 한다. 히미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은 곧 미래에 자신을 낳고 죽을 운명일 것이기에. 하지만 히미는 오히려 마히토에게 웃으며 말한다. "널 낳는 일은 정말 멋진 일인걸!" 이렇게 아름다운 말이 있을까? 감정과 상황의 비약을 넘고 넘어 도달한 곳에는 시간을 넘어 도달하는 인연의 비약이 있다. 결국 삶이란 무언가를 선택하는 것. 어떠한 선택이든 아름답고 멋진 일이란 것. 선택으로 우리는 서로 만나 삶과 세계를 만든다는 것. 그것이 곧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로서 지금 바로 여기 이 세계에 있다는 것일 게다. 한 세대의 끝을 예감하고 있던 탑의 주인은 굳이 자신의 세계를 이어가려고 아등바등 하지 않는다. 후계자가 자신의 세계를 더 이어나갈 수 있을 지도 모름에도 붙잡지 않고 오히려 그의 선택을 축복하듯 미소를 지을 뿐이다. 자신의 운명이 죽음으로 향할지라도 소년의 엄마는 죽음을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를 선택을 하지 않는다. 자신의 우연한 선택이 시간을 뛰어넘어 아름답고 멋진 세대의 시작이 될 것이니 말이다.


2. 다음 세대를 향한 낭만적이되 현실적인 축복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제목 그대로의 의미 밖에 없다. 관객들에게 삶을 그렇게 살아서야 어떻하냐고 힐난하거나 혹은 비아냥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삶에 대한 아무런 답을 주지 않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 답은 굉장히 선문답에 가까운 포괄적인 형태이다. 삶은 선택 그 자체라는 것. 그저 그 선택에 악의가 없길 바랄 뿐이라는 것.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악의는 무엇이고 선택은 무엇인가? 그에 따른 제목 그대로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렇기에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를 보기에 앞서 <붉은 돼지>, <하울의 움직이는 성>, <바람은 분다>를 봤으면 한다. <붉은 돼지>와 <바람은 분다>로 자유로운 인간에 대한 하야오 감독의 이미지를, <하울의 움직이는 성>으로 선택과 인연에 대한 하야오 감독의 이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전쟁과 2차 세계대전에 대한 하야오 감독의 입장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2차 세계대전. 한국인에게 있어 이 전쟁은 거의 모든 세계가 참여한 사상 초유의 전쟁으로서 사건보다는 광복, 즉 일본으로부터 해방을 위한 전쟁으로서 사건의 의미가 더 크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2차 세계대전과 관련된 일본의 영화를 볼 때면 그 영화를 대체로 객관적인 시각에서 보기가 쉽지 않다. 비록 대부분의 관객이 일제강점기의 당사자가 아니지만 대한민국이 세워진 이래 역사, 사회, 경제, 문화, 교육 등 다양한 영역에서 반일적 분위기를 경험하며 성장했기 때문일게다. 필자 역시도 이러한 분위기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으며 과거 일본의 반인륜적 행태, 회피성 혹은 면피성 발언, 더 나아가 적반하장식의 발언과 행동 등에 당연히 분노한다. 어쨌든 한국의 입장에서 일본은 역사적으로 가해자이자 전범 국가이며 이에 대한 국가적, 민간적 차원의 진실된 사죄가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과 같은 전쟁을 경험한 전후 세대라는 경계 위의 세대이다. 미야자기 하야오 감독 개인의 위치성은 바로 이 경계에 있다는 이유로 복잡해진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전작들을 보면 감독은 분명 지속적으로 파시스트, 군국주의, 전쟁 등에 비판하고 반대하는 입장을 명확히 하고 있다. <붉은 돼지>만 봐도 하야오 감독은 파시스트가 되느니 인간을 비웃기 위해 돼지가 되는 '포르코 로쏘'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는 무슨 이유로 발발한지 알 수 없는 전쟁, 군국주의 국가, 대규모 군대, 도시의 파괴 등을 적나라하게 보여줘 섬뜩한 기분이 들게 하고 오히려 이러한 분위기와 동떨어져 있는 '하울'과 '소피'의 자유와 사랑이 세계의 평화로까지 이어지는 것을 그린다. 하야오 감독은 반파시스트와 반군국주의를 명확히 보여주면서 우경화를 경계하고 있음은 분명한 듯하다. 하지만 <바람이 분다>를 본 한국 관객들의 입장을 살펴보면 반으로 갈리는 듯하다. 필자도 <바람이 분다>를 보는 순간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붉은 돼지>를 만든 감독이 맞나 싶었다. 2차 세계대전 일본 제국 공군의 주 전투기인 제로센 전투기의 제작기. <바람이 분다>를 <붉은 돼지>의 후속작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역사적, 국가적 배경 상 한국 관객에게는 개인차가 있을지라도 어렵다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바람이 분다>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야오 감독 개인의 위치성을 이해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전쟁을 경험한 전후 세대. 전후 세대인데 전쟁을 경험했다니. 모순적이다. 하지만 1941년생인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약 4살 정도에 핵폭탄 투하와 일본 천황의 항복을 경험했을 것이다. 즉, 하야오 감독은 세계를 인식하고 경험하며 이를 기억하며 갈무리 하는 시기 이전에 전쟁을 경험했다고 봐야 한다. 생물학적으로 그는 전쟁을 경험한 전쟁 세대이나 동시에 그는 전쟁을 어렴풋하게 기억하거나 아예 기억하지 못하는, 즉 전쟁을 모르는 전후 세대나 다름없다. 이런 그의 경계적 위치성은 일본에 의한 태평양 전쟁과 그에 대한 만행을 모두 비판적으로 대하되 이를 온전한 악으로만 규정하기 어렵게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분명 악의로 가득한 세계임에도 그 세계는 자신이 태어난 세계이다. 온전히 기억나지 않아 모르는 세계라 할 수 있지만 자신의 기억 속에 잠재되어 있는 세계이다. 이 세계를 완전히 악으로 규정하는 것은 그 세계에 속한 자신도 악으로 규정하는 것으로 느껴지지 않을까?


이러한 하야오 감독의 모순적인 위치성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말하는 악의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하야오 감독은 기억나지 않지만 악의로 가득한 자기 세계에 <붉은 돼지>와 같은 판타지로 가장 먼저 접근한 것은 아닐까 싶다. 자신의 모국이 저지른 만행과 악의를 직접적으로 표현해 비판하기 보다는 전범 동맹국이었던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마법과 포르코 로쏘의 낭만적인 판타지로 치유하고 비판한 것이다. 이후 인간으로서 가장 성숙했다고, 감독으로서 가장 성장했다고 느껴진 종심(從心)의 나이 70에 모국인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당시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결심을 한 것은 아닐까 싶다. 포르코 로쏘와 마찬가지로 창공을 바라보며 자유를 끝없이 만끽하고 싶어 한 인간 '호리코시 지로'의 삶을 빌려 자유를 향한 꿈을 이용하고 결국 하늘을 수놓은 비행기의 무덤에 죽어서야 갈 수 있었던, 악의로 가득한 세계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인간을 통해 자신의 모국인 일본을 비판한 것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 나무위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도 이와 같은 파시스트와 군국주의의 이미지는 앵무새 국가를 통해 드러난다. 앵무새들은 펠리컨들처럼 인간을 잡아먹는다. 하지만 하늘을 나는 법도 잊어 땅을 기며 죽음을 기다리는 펠리컨과 달리 앵무새들은 국가 체계 속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인간들을 잡아먹으려고 한다. 히미를 넣은 유리관을 옮길 때 앵무새 군인들은 왕 뒤에서 군가에 맞춰 도열하고 행진한다. 이들의 모습은 현실의 나치 독일, 파시즘 이탈리아를 떠오르게 한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탑의 세계는 더욱 빠르게 종말을 맞이한다. 악의로 가득한 앵무새 왕은 자신의 악의를 깨닫지 못한 채 탑의 주인을 저주하며 자신이 세계를 구성하는 돌을 쌓으려다가 오히려 엉망인 돌탑을 쌓고 탑이 무너지는 모습에 화를 참지 못해 칼로 탑을 베어 세계의 멸망을 자초한다. 하야오 감독이 말하는 악의는 곧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존재와 체계를 말하는 것이다. 자신의 자유를 위해 타인의 자유를 빼앗는, 전체의 발전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그 모든 것. 개인의 차원과 공동체의 차원 모두에서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맹목적인 삶을 추구하게 해 세계를 화마에 휩싸이게 하고 결국에는 종말까지 자초하는 순수한 악의인 것이다.


악의를 짐작하면 선택 역시도 유추할 수 있게 된다. 악의에 대해 하야오 감독은 마히토의 머리에 난 상처를 통해 절대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마히토가 큰할아버지에게 말했듯 상처를 기억하며 다른 사람들과 인연을 만들며 세계를 살아갈 것이라 말한다. 히미도 마히토에게 그를 낳는 일은 멋진 일이기에 죽음도 무섭지 않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하야오 감독이 말하는 선택은 다른 존재의 자유를 헤치지 않으면서 자신의 자유를 펼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뜬구름 잡는 소리에 가깝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비약이 더욱 빛을 발하는 느낌이다. 수많은 우연과 가능성 속에서 시공간을 뛰어넘어 찾아올 인연. 그러한 인연은 결국 자신의 자유만이 아니라 다른 존재와 함께 산다는 것을 기억하며 자유를 행할 때 맞이할 행복이며 인연의 행복을 안다면 죽음도 아무렇지 않을 것이다. 삶은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지만 과정에서 자신의 흔적은 곳곳의 인연에 남아있을 테니 말이다.

 

악의가 남아있음에도 선택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낭만적이고 낙관적인 희망은 하야오 감독만의 현실적인 낭만일 것이다. 오직 악의만 가득한 존재는 없다는 것은 곧 악의란 삶에서 항시 존재하고 언제든 나타날 필연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오히려 악의가 있을지라도 선택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은 얼마나 낭만적이고 낙관적이되 현실적인가. 하지만 이러한 희망에 하야오 감독 본인은 포함하지 않은 듯하다. 이 지점이 <붉은 돼지>, <바람이 분다>와 비교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다른 지점이라 생각된다. 하야오 감독은 이제 자신의 시대가 끝나감을 알고 있는 듯하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마히토가 하야오 감독의 분신이듯 탑의 주인인 큰할아버지도 하야오 감독의 분신이다. 의학과 과학이 발전했으나 언제 죽음이 찾아와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 그런 나이에 악의로 가득한 세계의 종말과 악의를 기억하며 선택하며 살아갈 새로운 세계를 모두 그린 이 영화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 물론 하야오 감독 본인은 다시 새로운 작품으로 돌아온다고 말했으나 앞으로 있을 자기 세계의 새로운 모습보다는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세계를 기대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그렇다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단순 의문형, 비난, 힐난 등이 아니라 어떤 선택을 하며 어떤 인연으로 가득한 세계를 만들 것인지를 기대하는 제목 그대로의 의미이지 않은가?

출처. 왓챠피디아

이런 생각을 해본다. 이 영화를 설교, 비난, 무의미 등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삶의 선택이 그만큼 무겁다는 의미이겠다는 생각을. 온갖 불안으로 점철된 현실에 한 치 앞을 알 수 없어 역시 불안한 미래까지. 삶 그자체는 정답이 없기에 가이드가 필요하고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누군가가 자신을 이끌어주길 바라는 것일 게다. 이 영화를 필자와 같이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도 삶의 선택은 여전히 무겁긴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생각보다 필자는 낙관적인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각설하고, 그럼에도 인간은 자유를 원한다. 다양한 정답이라는 삶의 모순 속에서 자신만의 정답을 찾아 헤매길 원하고 각자의 정답을 찾는 와중에 자신만의 인연으로 가득한 세계를 구성하길 원한다. 그러한 개인의 세계가 비슷한 지점들끼리의 인력과 반대되는 지점들끼리의 척력을 거치며 세대로서 세계가 될 것이다. 각자의 정답으로 만든 인연의 고리로 구성된 한 세대의 세계. 이전 세대가 끝을 받아들이며 다음 세대가 앞으로 나아가길 축복하는 이 인간을 위한 동화 영화가 좋다.


학부 시절, 뮤지컬 관련 강의를 듣던 때 조별 모임으로 뮤지컬 대본을 만들어 발표해야 했다. 당시 교수님은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 한 가지 당부이자 조언을 남겼다. 냉소의 시선에서 쓰지 말라고. 지금 불안하고 힘든 것 안다고. 그래도 조금은 낙관적이고 따뜻한 시선으로 대본을 써보라고. 그 당시에는 어떤 의미인지 인지했으되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영화를 보며 그리고 이 동화 영화를 보며 다시 느꼈다. 세계를 계속 나아가게 하는 것은 결국 다정함이다. 다정한 시선에서 이 영화를 다시 볼 수 있었으면 한다. 비약의 순간에 담겨있는 악의에 대한 경계와 선택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느꼈으면 한다. 당신의 삶이 선택의 무거움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안다. 아마 필자와는 다를 혹은 상상도 못할 무거움에 지쳐있을 것이기에 조심스럽다. 하지만 그렇기에 잠깐은 가벼워지길 바란다. 그 잠깐의 가벼움으로 당신은 삶을 더 사랑하고 행복하게 느낄지도 모른다. 단순히 이 영화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서 노망난 늙은이의 넋두리로 여기기 보다는 넋두리 속에서 느껴지는 낭만적이고 따뜻한 축복의 감정에 자신의 삶을 상상하는 여유의 순간이 피어나길 바란다. 당신과 함께 삶을 선택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멋진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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