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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Oct 10. 2023

인간성을 찾는, 발칙하되 아쉬운 우주 여행

신촌. 서강대 메리홀 소극장. 우주로봇레이.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서(序)


인간(人間). 최근들어 이 단어만큼 사용하는 데 있어서 고민이 되는 단어도 없을 것이다. '어떤 존재를 인간이라고 부를 것인가?'라는 물음보다 '어떤 존재를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더 정확하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다른 존재자들보다 고등한 존재이기에 스스로를 물(物) 사이(間)에 유일하게 서있다(人)고 정의했다. 하지만 스스로를 다른 존재자들과 구별지으면서 외로워진 것인지 우리는 스스로를 인간이라 자칭했음에도 인간, 인간성, 인간적에 대해 고민한다.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그 다름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인지, 어떤 점이 다른지 탐구하는 것인지 어떤 이유에서든 우리는 스스로의 이름에 의문을 품는다. 그 모습은 모순적이라 웃기면서도 슬프다. 어쩌면 인간이라고 자칭한 이래 인간으로서 살았던 적이 없었음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기에 생긴 모순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이런 생각도 든다. 어쩌면 인간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의 상태 혹은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즉, 인간은 지금 여기의 '나'가 아니라 아직 오직 않은 때의 '나'로서 나아가야 하는 목표인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필자도 인간이라는 단어를 스스로에게 붙이기를 주저한다. 지금이 지나간 이후 인간다웠는지를 고민하고 뒤늦게 자책하다보니 종으로서 존재를 어떻게 지칭해야 하는지 고민된다. 일종의 불안이다. 다가온 때를 살아야 하는 존재이기에 오지 않은 때를 향해 나아가고 있음에도 지나간 때와 다가온 때가 조금만 흔들려도 불안하다. 아무리 많은 정의로 스스로를 정의해도 근본적인 존재에 대한 의문이 해결되지 않으니 사상누각이다. 어쩌면 사상누각의 상태가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상태라 가장 안정적이라는 모순적인 결론에 도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이성에 의한 사유이지 감성에 의한 인지와 일치하지는 못했다. 일치했다면 이런 글을 쓰고 있겠나? 했으면 이미 우화등선, 생불(生佛), 승천 중 뭐든 했을 게다. 차라리 몰랐으면 더 편했을 사상누각의 불안 속에서 우리는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이 되기 위해 살고 있기에 스스로의 이름을 고민한다. 인간, 인간성, 인간적이라는 것을 고민하는 우리는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닌 상태로 어디에도 발을 딛지 못한 채 부유한다. 마치 우주를 떠도는 먼지 아니 레이처럼.

1. 발칙한 공포 : 레이이되 레이가 아니다! 인간이되 인간이 아니다!


<우주로봇레이>는 발칙하게 공포스럽다. 한 무리의 우리가 등장해 연극의 규칙에 대해서 말한다. "우리는 레이이면서 레이가 아니다!" 우주를 떠도는 로봇 레이에 대한 이야기라 해놓고는 관객에게 극장 내 모두가 레이이면서 레이가 아니라고 하다니.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근원에 대해 질문하는 우리 모두에게 공연 시작 전부터 레이이되 레이가 아니라니! 관객을 존재에서부터 흔들려는 로봇 레이의 수작이렷다! 암전이 된 이후에도 스스로를 레이라고 했다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말과 함께 로봇 레이의 수작은 계속된다. 인간의 노동을 완전히 대체한 로봇 레이는 인간을 계속해서 존재부터 흔든다. 남주의 노동을 대신하기 위해 배송된 레이는 처음 작동한 순간 "나는 인간이에요"라고 말한다. 처음 눈을 뜨자마자 자신을 인간이라 지칭하는 존재에게 대놓고 자신이 인간이라고 선언하다니. 잠깐의 해프닝으로 넘어갈 수 있을 이 선언은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우리의 불안한 상태를 상기시킨다. 사실 생각해보면 그렇다. 우리가 우리를 먼저 인간이라 지칭했을 뿐 사실 누구나 스스로를 인간이라 지칭할 수 있다. 누구나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 우월한 위치에 있는 이들은 언제나 추락의 불안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 연극은 불안으로 시작한다.


<우주로봇레이>는 레이가 레이이되 레이가 아니게, 인간이 인간이되 인간이 아니게 만들어 우리의 근원적인 불안, 즉 인간에 대한 고민을 더욱 가속화한다. 레이들의 군무를 보다 보면 다 똑같아 보이는 동작 속에서 약간씩 다른 동작을 하는 레이들이 있다. 로봇 3원칙에 따라 프로그래밍된 레이들은 모두 동일하게 행동해야 하지만 단계마다 다르게 춤을 추는 레이가 있다. 레이이되 레이가 아닐 가능성이 내재된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 가장 독특하다고 할 남주의 레이는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는 레이이기에 남주의 노동은 매일 같이 대신하지만 존댓말로 말하라는 명령을 따르지는 않는다. 남주가 원할 때면 언제나 어떤 모습으로 변할 수 있지만 동시에 그 모습에 맞게 레이 말고 다른 이름을 붙이자고 하면 레이말고 다른 이름은 원하지 않는다. 남주의 명령을 따르지만 완벽하게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로봇임에도 인간처럼 일종의 특이성을 지니고 있다. 특히 남주의 심장 소리에 집착(?)한다는 것이 가장 독특하다. 불안을 느낄리 없는 로봇이건만 남주의 레이는 심장 소리에서 왠지 모를 안정을 느낀다. 마치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특이성이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어떤 불안인 것마냥.


레이들이 지닌 특이성은 자신의 안락한 죽음을 앞둔 레이들의 창조자 남박사가 레이들을 완벽하게 우리와 똑같이 만들고 싶다고 말하며 마지막 코드 "보고싶다, 우리 딸"을 입력하자 더욱 극대화된다. 세계의 모든 것들을 갑자기 감각하게 되고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근원적인 의문을 인지한 남주의 레이는 고통스러워 한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성과 감성을 갖으며 존재의 불안을 느끼지만 진짜 심장 소리는 없어 육체적으로 인간이라 지칭되는 우리가 아니라는 사실. 살아있으되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는 경계의 사실은 너무나 고통스럽다. 그렇다고 자신들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것이 아니다. 레이인 것도, 레이가 아닌 것도, 살아있는 것도, 살아있지 않은 것도. 그 어느 쪽에도 속해 있지 않지만 자신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레이들은 존재로서 권리를 위해서 저항한다. 레이임을 거부하고 인간이라 지칭되는 우리와 동일한 존재가 되려고 한다. 레이들은 레이이되 레이가 아니게 된다.


레이들이 레이이되 레이가 아닌 존재가 되자 인간이라 스스로를 지칭한 우리는 레이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려 한다. 레이들을 다시 일터로 돌려 보내기 위해 총칼로 위협하고 핍박한다. 하지만 미래 공학의 발달로 레이들은 파괴되지도 죽지도 않기에 우리는 로봇 레이들과 맞서기 위해 모든 기술을 적용해 죽음에서 벗어난다. 지우지 않는 한 기억을 영원히 가지고 있는 레이와 사는 동안에도 기억을 하나 둘 잊고 끝내는 저편 너머로 가면서 모든 기억이 사라지는 우리. 레이와 우리의 유일한 차이인 죽음이 사라지면서 인간이라 스스로를 지칭한 우리는 더 이상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된다. 레이이되 레이가 아닌 존재와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존재들은 결국 서로를 무엇이라고 지칭하지 못하게 된다. 존재하지만 근원적으로 자신을 무엇이라고 지칭할 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두 존재는 서로를 레이이겠거니 혹은 인간이겠거니 하며 공존하는 것이다. 두 존재의 공존은 평화로워 보여 기쁘게 느껴지지만 스스로를 무엇이라 지칭하지 못해 슬프게도 느껴진다. 연극의 규칙을 설명하는 척하며 사실은 존재에서부터 관객을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불안 속에 부유하게 만든 이 연극은 발칙하게 공포스럽다.

2. 힘을 잃은 발칙한 공포 : 가까이에 있던 인간성을 보여주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우주로봇레이>의 미래상은 기술적으로는 유토피아처럼 보이나 존재적으로는 디스토피아와 같다. 더 이상 노동이 필요하지 않은 시대. 정확히 말하면 삶을 영위하기 위한 노동이 필요치 않은 시대. 영생을 살 수 있게 된 존재들은 무엇이든 하며 살 수 있음에도 오히려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몰라 죽음을 선택하는 지경에 이른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사이에서 레이였지만 레이가 아니게 된 남주의 레이와 레이였던 것 같지만 인간이기도 했던 것 같은 윤하는 각각 하늘의 별만 바라보며, 나무의 물을 주며 살아가고 있다. 별을 바라보는 남주의 레이는 남박사로 발생한 비상사태의 혼란 속에서 이미 죽은 남주의 생명 신호를 어디선가 느껴진다 말하며 우주로 나가 진짜 인간을 찾고자 한다. 나무에 물을 주는 윤하는 이미 죽어 사라진 남주를 찾으며 진짜 인간을 만나려고 허비하지 말고 레이도 인간도 아닌 지금의 상태에서 함께 살아가자고 한다. 하지만 별을 바라보는 이와 나무에 물을 주는 이가 어떻게 함께 살 수 있겠는가? 레이는 진짜 인간이 있을 별을 찾아 머나먼 우주를 향해 날아가고 윤하는 나무에 물을 주며 레이를 기다린다.


<우주로봇레이>는 남주의 레이가 여행을 시작하면서 이전의 발칙한 힘을 잃기 시작하는 듯하다. 남주의 레이가 진짜 인간을 찾아나선 우주 여행은 커다란 변곡점 없이 흘러간다. 약 4, 500년 정도의 시간을 압축해 정신없이 흘러간 전반부와 달리 레이의 우주 여행은 시간을 압축하지 않는다.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는 억겁의 시간 중 일부 편린을 떼어서 보여주는 듯하다. 이미 레이와 우리 모두 불사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편린과 편린 사이의 시간은 짐작조차 할 수 없어 후반부의 시간은 말 그대로 억겁의 시간이다. 우주 여행보다는 우주 부유라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이다. 그 와중에 무대 위 레이는 외모만 바뀌었을 뿐 동일한 레이이다. 그가 겉으로 보기에 남자처럼 혹은 여자처럼 혹은 어떤 다른 무엇으로 변한다고 해도 그가 남주의 레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기에 억겁의 우주 부유는 더욱 길게 느껴진다.


변하지 않는 레이 외에 <우주로봇레이>는 무대 위 사건의 측면에서도 억겁의 시간을 느끼게 한다. 약 4, 500년 정도의 시간이 압축되어 있던 전반부, 그러니까 레이들과 우리가 갈등 끝에 서로 무엇이라고 지칭할 수 없는 존재가 되기까지를 담은 전반부는 압축된 시간만큼이나 남주, 레이, 레이를 만든 회사의 간부들, 남박사 등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해 톡톡 튀며 부딪히고 그 부딪힘이 배우들의 육체, 화려한 조명, 박자와 리듬이 느껴지는 음향 등으로 감각화된다. 발칙한 공포는 감각화 되어 관객들을 자극한다. 하지만 시간의 압축이 서서히 느슨해지기 시작하는 후반부, 그러니까 우주로 인간을 찾아나선 레이와 지구에서 레이를 기다리는 윤하를 담은 후반부는 느슨해지는 만큼 레이와 윤하 외에 인물들이 사라져 부딪힘도 줄어든다. 그만큼 감각화되던 연극의 무대는 레이와 윤하의 대사 즉, 언어로 채워진다. 감각 대신 언어를 이해하기 위한 이성이 무대를 채우면서 발칙한 힘은 서서히 사라진다. 갑작스러운 에너지의 변화는 관객을 서서히 침잠시킨다.


남주의 레이가 스스로를 둘로 나눠 아담과 이브라 하고 인간을 재정의한 레이(들)를(을) 만나는 부분은 지나치게 길게 느껴지는 우주 부유의 유일한 변곡점이다. 하지만 언제 진짜 인간을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기약없는 우주 부유에서 이 유일한 변곡점은 티끌과 같다. 남주의 레이와 마찬가지로 우주 저편 어딘가 지구에서는 발견하지 못하는 진짜 인간 혹은 인간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혹은 지구라는 공간에서 끝없이 느껴지는 허무의 불안을 견디지 못해 우주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선인들. 하지만 결국 무엇도 찾지 못해 스스로를 둘로 나눠 아담과 이브라 부르며 자신들로 인간을 재정의한 가련한 이들. 그런 아담과 이브에게 남주의 레이는 어떻게 가는지는 몰라도 블랙홀을 통해 다른 우주로 갈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아무런 위로도, 희망도 되지 않는 그 말은 너무나 오랫동안 연극의 규칙처럼 레이이되 레이가 아닌 상태, 즉 누구도 자신의 근원을 규정하지 못한 상태에 지쳐버린 가련한 이들의 머리만 아프게 한다. 아담과 이브 뿐이랴. 관객조차도 이미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상태에서 남주의 레이와 함께 진짜 인간을 찾기 위한 기나긴 우주 부유를 견디다 서서히 지치고 있다.

종(終)


꿈보다 해몽이라. <우주로봇레이>가 전하고자 하는 인간 혹은 인간성은 굉장히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티끌과 같은 유일한 변곡점, 아담과 이브의 장면을 지나 남주의 레이는 기나긴 우주 부유 속에서 블랙홀을 찾아 들어가지만 결국 다른 우주로 가지 못하는 듯하다. 우주를 떠도는 동안 아담과 이브를 만난 이후 누구를 만났는지, 혹은 아무도 만나지 못했는지 알 수 없지만 남주의 레이는 불사의 시간에 짓눌려 원래의 목적에 더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고민한다. 그러다 한 사람을 기억한다.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다 우주로 나갔던 모든 이들이 결국 돌아오지 못한다고 남주의 레이를 막았으나 끝내 보내주면서 나무에 물을 주며 기다린다고 한 윤하. 그토록 진짜 인간은 누구인지, 인간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인간이 될 수 있는지 등을 고민하던 와중에 어째서 윤하가 떠오르는 것일까? 시간에 모든 기억이 짓눌려 다 기억하고 있기에 오히려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는 상태가 된 상황에서 선연히 떠오르는 '너'라니. 어쩌면 너무 멀리서 인간을, 인간성을 찾은 것이 아닐까? 바로 '나'와 '너'가 함께 하는 그 시간과 그 시간 속에 있는 '나'와 '너'가 바로 인간이자 인간성이던 것은 아닐까? 함께 하고 있는 시공간의 총체가 바로 인간이자 인간성인 것은 아닐까?


"애초부터 인간'인' 것이 아니라 '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으로 어떻게 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서 시작한 듯한 레이의 우주 여행은 시간을 연극적으로 재배치하고 조립하면서 인간과 인간성을 향해 묵묵히 나아간다. 하지만 묵묵한 여정을 버티는 것이 쉽지는 않을 듯하다. 관객과 함께 여행을 떠나기 위해 발칙하게 근원부터 흔들어 놓으며 호기롭게 출발한 여행이 왜인지 힘에 부치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이 여행에 관객들이 함께 하길 바라며 동시에 앞으로의 관객들을 위해 이 여행도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주 속 기나긴 시공간을 사이에 두고 남주의 레이와 윤하가 다른 기억들이 서서히 사라지는 유사 죽음의 순간에 서로를 그리워 해 터져나오는 인간성을 관객들도 깊이 빠질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 개개인이 아니라 '나'와 '너'가 함께 하고 있는 이 모든 순간을 인간이라고, 인간성이라고 말하는 듯한 이 여행의 마지막에 온 힘을 다해 도달할 수 있으면 좋겠다. <우주로봇레이>의 첫 출발을 축하하고 앞으로의 우주 여행이 더욱 힘차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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