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WatchTalk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ozetto Jan 20. 2024

시선의 전복과 낙관자의 일침(1)

신도림 & 연희. 씨네Q & 라이카시네마. 괴물.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본 글은 길이가 길어 3편으로 나눠 연재합니다.


인간(人間)은 흥미롭다. 지구상 어느 존재도 스스로에게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를 인간이라 지칭한다. 누군가 "왜 넌 인간이야?"라고 묻는다면 "인간이니까!"라고 답하는 것과 같다. 충분한 논증이 없는 순환논증이라 할 수 있는 이 자칭은 오만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단어를 잠시 곱씹어보면 오만하게 느껴진 자칭에 왠지 연민이 생긴다. 인간을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사람 사이가 된다. 인간이 어떤 개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특히 사이라는 말에서 단순히 많은 수의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성을 내포하고 있다. 스스로를 인간이라 자칭하는 우리는 홀로 존재하는 것을 애초에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일종의 관습적 표현이나 관계성을 내포하고 있는 '우리'라는 말로 우리를 지칭하고 있다. 홀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공포를 느끼고 있기 때문일까?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인간이라는 자칭에서 우리는 개인으로는 인간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언어적으로라도 어떻게든 남기고 있는 듯하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인간이 아닌 무엇인, 즉 괴물인 우리가 함께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우리는 원초적으로 홀로 존재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함께 존재하는 것을 바라는 외로운 존재이다. 외로움과 두려움이 새겨진 관계의 자칭은 연민을 느끼게 하는 허세와 다름없다.


동시에 그런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 적어도 우리 개개인은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 개개의 우리는 무엇이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괴이한 무엇 즉, 괴물(怪物)이다. 다른 존재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다가가고 받아들이려고 노력할 때야 겨우 인간의 경계 가까이에 설 수 있는 괴물이다. 괴물인 우리가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연민을 느끼게 하지만 허세인 자칭과 일체화된 것에서 벗어나기부터 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우리 개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우리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을지 고민하는 것에서 겨우 인간을 향한 출발선에 선 것이라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스스로가 괴물이라는 사실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우리는 관측자가 아닌 관측 대상이 되었다는 경험을 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관측될 수 없는 관측자라는 위치만이 아니라 보고 있는 순간 이미 보임 당하고 있는 대상이라는 경험. 관측자에서 끌어져 내리는 종말의 순간. 그런 순간이 온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괴물일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순간을 지나친 우리는 이전과는 조금 다른 괴물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은 그런 영화이다. 우리가 인간이 아니라는 종말의 순간을 새기는 영화이자 동시에 괴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따뜻하지만 따끔한 시선을 날리는 낙관자의 영화이다.

1. 판단자로서 관객 : 무대 공연과 영화

무대 공연과 관객의 관계와 비교해 영화와 관객의 관계는 단절되어 있다. 제 4의 벽이라는 문화적 혹은 인식적 벽이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 무대와 객석의 사이를 가리는 것은 없다. 그래서 무대와 객석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무대 공연은 사건으로 가득하다. 연극을 예시로 가장 흔한 사건을 말해보자. 관극을 방해하는 특정 관객의 핸드폰 알람 소리는 다른 관객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거나 무대 위 배우를 당황하게 한다. 알람 소리가 울린 관객은 황급히 핸드폰을 끄느라 공연에 집중하지 못하며 주변의 다른 관객들 역시 연극의 세계를 파고든 현실의 세계로 인해 온전히 연극의 세계에 반응하지 못한다. 당황했으나 이내 집중한 배우는 관객들을 다시 연극의 세계로 끌어오지만 역부족이고 결국 그 날 연극의 후기에는 관크에 대한 성토가 줄을 잇는다. 무대 위 배우들만이 객석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객석의 관객들도 무대 위로, 무대 위만이 아니라 다른 객석으로 영향력을 행사한다. 다르게 말하면 연극은 사건의 혼돈 상태라 할 수 있다. 관극 문화라는 이름으로 관객 개인의 행동에 제약을 걸어도 우리의 신체는 서로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되어 관계를 맺고 그 관계는 다양한 사건을 창발한다. 배우와 관객, 무대와 관객, 관객과 관객 등. 무대 공연은 촘촘하게 연결된 관계로 창발되는 사건의 에너지로 가득하다.


반면 영화와 관객의 관계는 스크린이라는 명확한 벽이 존재한다. 제 4의 벽과 같은 인식적 벽이 아닌 물리적으로 실존하는 스크린이라는 벽은 관객이 어떤 노력을 해도 넘어설 수 없다. 스크린의 배우들은 관객이 어떤 반응을 해도 흔들림 없이 똑같은 연기를 영구적으로 취한다. 관객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취할 수 있지만 무대 공연보다 공간적 제약을 극단적으로 줄일 수 있는 영화는 관객들 사이 영향력마저도 없는 것으로 만든다. 무대 공연에 비하면 영화는 창발되는 사건의 에너지가 작고 정적이다. 나아가 스크린은 단순한 벽이 아니라 일종의 공간적 제약을 전제로 한다. 스크린에 반사되어 비치는 화려한 불빛. 그렇기에 관객은 스크린을 향해서만 앉아 있다. 객석에서 무대가 펼쳐지기도 하는 무대 공연과 달리 영화는 스크린과 객석이 명확히 구분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스크린에 떠오르는 배우의 퍼포먼스는 관객에게 육체성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이미지 혹은 물체적 정보로 다가온다. 즉, 육체성으로 다가오는 무대 공연의 퍼포먼스에 관객은 육체 전반 기초해 감정을 발산한다. 반면 이미지 혹은 물체적 정보로 다가오는 영화의 퍼포먼스에 관객의 정동은 육체 전반에 기초해 감정을 발산하기 보다 아주 일부에 국한되어 감정을 발산한다.


이에 따라 무대 공연과 관객의 관계과 비교해 관객은 영화와 평등한 혹은 상위에 위치한다고도 볼 수 있다. 관객에게 스크린에서 넘어오는 것은 1차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이미지이자 정보로 여겨진다. 관객에게 무대 공연은 현재 바로 여기에서 발생하는 육체성 간 상호작용으로 이성보다 감정이 먼저 작용해 반응하는 체험에 가깝다면 영화는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이미지로 감정보다 이성이 먼저 작용해 차분히 정보를 판단하며 감정을 쌓아가는 경험에 가깝다. 그렇기에 관객과 함께 만들어가는 무대 공연은 가능하지만 관객과 함께 만들어가는 영화는 불가능하다. 무대 공연과 관객의 시선은 서로 교차하지만 영화와 관객의 시선은 교차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나간 영화의 시선을 관객이 받아 다시 시선을 던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대 공연과 관객의 관계는 대체로 동등한 것처럼 보이는 것에 반해 영화와 관객의 관계는 최소가 평등할 뿐 대체로 관객이 영화보다 상위에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 관객은 단순히 영화가 던진 시선에 영향을 받는 이가 아니라 판단자로서 영화가 던진 시선을 바라본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은 굉장히 전복적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흐릿하게, 선명하게 : 사랑을 확언하는 안개(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