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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Jan 25. 2024

시선의 전복과 낙관자의 일침(2)

신도림 & 연희. 씨네Q & 라이카시네마. 괴물.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본 글은 3편으로 나눠 연재합니다. 이전 편을 읽고 오시길 바랍니다.


2. 빈 서사를 채우는 시선의 교차 : 시선의 전복

<괴물>의 서사 구성을 잠시 살펴보자. <괴물>은 엄마 사오리(안도 사쿠라 분), 선생 호리(나가야마 에이타 분), 미나토(무기노 미나토)의 시선을 차례로 제시해 마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처럼 관점의 상대성을 제시하는 듯하다. 하지만 동일 사건에 대해서 세 인물의 시선이 나온다 하여 그것이 관점의 상대성을 드러낸다고 보는 것은 안일한 분석일 것이다. 눈여겨 봐야 할 것은 한 사건에 대해서 다양한 인물이 각자가 본 사건을 이야기하는 <라쇼몽>과 다르게 마치 세 인물의 관점에서 본 듯한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 <괴물>은 각 인물의 이야기 중 빈 곳을 채우는 방식을 취한다는 것이다. <라쇼몽>과 <괴물>은 모두 한 사건의 진실에 다다르려는 목적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라쇼몽>은 한 사건에 대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인물들을 통해 진실이라는 것은 한 사람이 믿고 싶어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제시한다. 즉, <라쇼몽>의 서사는 서사의 빈 이야기를 채우는 방식이 아니라 다른 시선의 이야기들을 나열하는 것에 가깝다. 하지만 <괴물>의 서사를 보자. <괴물>에서 세 시선의 이야기는 모두 걸스바의 화재로 시작한다. 자신의 집 베란다에서 걸스바 화재를 보는 오리, 연인과 함께 길을 걷다 화재 현장 근처에서 화재를 목격하는 호리, 다리에서 점화기를 들고 가는 요리를 보고 멀리서 걸스바의 화재를 보는 교장 마키코(타나카 유코 분). 각 이야기가 걸스바 화재를 목격하는 것으로 시작해 <괴물>은 어떤 한 사건에 대한 인물들의 다른 관점을 보여주는 듯하다. 즉, 그 시선의 인물이 살고 있는 그 시점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이렇게 보면 <괴물>은 <라쇼몽>과 비슷한 서사인 것처럼 보인다.

출처. 왓챠피디아

하지만 <괴물>은 같은 시간대에 발생한 한 사건에 대한 다양한 인물의 시점을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괴물>에서 걸스바 화재는 인물들이 하나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건이면서 동시에 그들 각각이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어떤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일 뿐이다. <괴물>에서 중요한 것은 그렇게 동일 시간대를 기점으로 살아가는 세 인물의 이야기에서 어느 시간대가 비어있느냐를 파악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항의하러 학교를 찾아온 순간 시오리는 호리가 한 여학생의 손에 이끌려 학교 뒷편으로 가고 있는 것을 본다. 학생의 손에 이끌려 간 호리는 학생에게서 미나토와 요리가 고양이 시체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는 증언을 듣는다. 그리고 시오리가 학교를 찾아오기 전 미나토와 요리는 고양이의 시체를 보며 죽은 순간 고양이는 더 이상 고양이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인물들은 같은 세계를 살고 있으면서 동시에 다른 세계를 살고 있다. 같은 세계에서 그들은 각자가 있는 그 순간의 지점에 묶여 살아갈 뿐이다.


이렇게 분리되어 있는 인물들의 순간이 다른 인물의 순간에서 비어있는 순간을 채우는 방식으로 서사를 진행하는 <괴물>은 관객에게 두 가지 의미로 다가온다. 첫째, 관객인 우리는 같은 세계를 살고 있으되 전혀 다른 세계를 살고 있다. 죽은 남편에게 다짐했듯 미나토가 평범하지만 행복하게 살길 바라는 사오리는 평범한 엄마일 뿐이다. 그런 사오리의 시선 즉, 사오리의 이야기는 갑자기 자신의 머리를 자르거나 스스로를 돼지라 말하거나 차에서 뛰어내리는 등 이상행동을 보이는 미나토에게 폭력과 폭언을 했다고 여겨지는 호리 선생과 유야무야 넘어가려는 학교 선생들에 대한 걱정, 불안, 분노 등으로 가득하다. 흔히 알고 있거나 들어봤거나 그러려니 했던 '모성' 혹은 '엄마'의 순간이 사오리의 시선이자 삶이다. 그가 살고 있는 순간은 오탈자를 찾는 취미를 갖고 있고 웃는 것이 어색하며 사람 대하는 것이 부족하고 선생이 처음이라 어리숙하나 열정이 있는 호리의 '순간'이나 왕따를 당하고 있는 요리와 친구라는 사실을 숨기고 싶지만 동시에 숨기고 싶다는 마음을 괴로워하고 요리에게 우정을 넘어 애정을 느끼는 마음을 혼란스러워 하나 결국 받아들이는 미나토의 '순간'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출처. 왓챠피디아

<괴물>의 인물들이나 인물들이 살아가는 세계는 카메라와 스크린에 의해 물리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그리고 이따금 서로의 시간대가 교차하는 순간에도 서로가 시선을 영화적으로 마주치지 못한다. 요리가 만져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른 미나토가 샤워하는 순간에 사오리는 미나토와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죽은 아빠의 불전 앞에서 하루 일과를 보고하는 미나토와도 함께 있지 못한다. 호리가 학생의 손에 이끌려 고양이를 보러 가는 순간 사오리는 요리에 대한 의심과 분노만 더욱 확신하게 될 뿐 호리와 시선을 마주하지 못한다. 교실에서 난동을 부리는 미나토를 진정시킨 호리는 미나토가 고개를 숙이고 있어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화장실에 갇힌 요리를 구한 호리는 "괴물은 누굴까?"라는 호리의 노래에 화장실을 확인하러 왔다가 도망치듯 올라가는 미나토의 뒷모습을 볼 뿐이다. 관객인 우리는 <괴물>의 인물들만큼 완전히 분리되어 세계를 살아가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물리적 혹은 영화적 분리는 하나의 세계를 살고 있으나 서로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현실의 삶을 일깨운다. 분명 물리적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음에도 감정적, 인지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듯한 현실의 삶은 갈등과 오해로 점철되어 있다. 우리는 같은 세계를 살고 있으되 전혀 다른 세계를 살고 있다.


둘째, 관객인 우리는 판단자인 순간 판단 대상이다. 스크린 너머에서 판단자로 있는 <괴물>의 관객은 판단자에서 끌어내려져 판단 대상이 된다. 관객은 엄마의 순간을 살고 있는 사오리의 시선과 삶의 순간에서 열정은 가득하나 사람을 대하는 게 어색한 초짜 교사 호리의 시선과 삶의 순간으로 판단 기준을 교체한다. 호리의 시선에서 사오리는 자식의 말만 믿고 학교에 민원을 넣어 결국 호리를 선생에서 끌어내리는 악성 부모가 된다. 호리를 희생시켜 학교의 명예를 지키려는 교장을 위시한 학교 선생들은 사회적, 행정적 폭력의 주체가 된다. 무슨 이유에서 호리가 폭력과 폭언을 휘둘렀다고 거짓 증언하는 미나토는 섬뜩한 아이가 된다. 그러나 판단의 시선을 교체하는 경험은 관객에게 판단에 대한 의심의 시작으로 관객이 판단자로 영화보다 상위에 위치하는 것이 당연한 관계도가 전복될 수 있는 여지이다. 이러한 여지는 미나토의 시선과 삶의 순간이 더해질 때 완전히 전복된다.


미나토의 시선과 삶의 순간은 관객이 판단을 포기하는 순간이다. 요리와 미나토는 서사상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만큼 이전의 두 서사를 포함한 완전한 서사이다. 하지만 그러한 완전성에 비해 초등학생인 요리와 미나토는 상대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세계와 사회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소수자이다. 특히 미나토의 시선과 삶의 순간이라 했으나 함께 세계와 사회의 폭력에 노출된 동반자라는 점에서 마지막 시선과 삶의 순간은 미나토의 시선과 삶의 순간이자 요리의 시선과 삶의 순간이다. 사오리와 호리, 둘의 시선과 삶의 순간이 쌓여 사건이 진상을 드러냈다고 생각한 관객에게 미나토와 요리의 시선과 삶의 순간은 가장 완벽한 서사이나 반대로 가장 연약한 서사이다. 가장 완벽하지만 가장 연약한 존재들이 등장해 사건의 진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관객들은 도덕적으로 함부로 판단하기 어렵게 된다.


첫째 의미와 연결해 둘째 의미를 생각해보자. 물리적, 영화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괴물>의 인물들은 현실의 세계도 어떤 의미에서 혹은 실질적으로 우리의 시선이 교차하지 않고 그로 인해 실제로 다른 세계를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이런 가운데 호리의 시선과 삶의 순간에서 판단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한 관객에게 미나토와 요리의 시선과 삶의 순간은 사건의 진상을 가장 완벽하게 보여주는 서사이기에 오히려 관객에게 판단을 하던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괴물은 누굴까?"라는 두 아이의 노래는 단순히 두 아이가 서로의 감정을 공유하는 노래이자 함께 하는 놀이인 것이 아니라 스크린 너머로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이 된다. 사오리를 단순히 악성 부모라 판단할 수 있을까? 미나토는 섬뜩한 아이라고 할 수 있는가? 교장에게는 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학교 선생, 요리의 아빠 등의 인물들에게는 어느 정도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쉽지 않다. 애초에 각자의 시선에서 서로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우리는 이미 판단자이자 동시에 이미 판단 대상이다. 우리 개개인은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과적으로 <괴물>은 영화와 관객의 관계를 전복해 새로운 관계로 나아간다. 관객은 더이상 판단자가 아닌 판단 대상이며 인간이 아닌 괴물에 위치한다. 괴물인 우리는 스크린 바깥에서 이미 지나간, 스크린에 떠오른 <괴물>의 시선을 따라 판단하며 판단 대상으로서 괴물인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사실 이러한 판단의 순간은 우리에게 있는 공감의 기회를 엿보게도 한다. 미나토의 이상행동은 돼지 뇌를 가지고 있다는 폭언과 귀에서 피가 날 정도로 잡아당기는 폭력을 행한 폭력 교사 호리 때문이다. 그럼에도 학교는 형식적인 사과로 사건을 유야무야 넘어가려 한다. 그런 정황을 눈으로 본 엄마 사오리를 위해 관객들은 가슴을 치며 별의별 욕을 했으리라. 미나토를 부르짖는 호리의 외침에 공포와 분노로 일그러진 사오리가 집 밖으로 나가는 장면은 무엇을 하러 왔는지 알 수 없어 호리라는 인간에 대한 혐오감과 공포감에 빠지게 한다. 하지만 호리의 시선과 삶의 순간은 공감을 빌미로 너무나도 쉽게 다른 누군가를 단죄까지 하는, 괴물로서 우리를 목도하게 한다. 그러한 괴물의 순간을 목도했음에도 다시 사오리, 미나토, 교장과 학교 선생들을 단죄하려는 우리는 "괴물이 누굴까?"라는 아이들의 노래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얼굴을 붉히게 된다. 우리는 영화에 의해 판단되는 대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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