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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Feb 12. 2024

시선의 전복과 낙관자의 일침(3)

신도림 & 연희. 씨네Q & 라이카시네마. 괴물.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본 글은 3편으로 나눠 연재합니다. 이전 편을 읽고 오시길 바랍니다.


3. 의례로서 종말과 관객을 향한 일침

관객이 판단되는 대상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러한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영화와 관객 사이 종말적 순간과 <괴물>에서 미나토와 요리가 빅 크런치(Big Crunch)라는 어떤 종말적 사건을 기다리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종말을 파괴적인 재해로 이미지화 한다. 하지만 요리는 미나토와의 아지트인 버려진 열차 칸에서 빅 크런치가 오면 모든 시공간이 거꾸로 흐르면서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나타날 것이라 말한다.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가길 바라는 절망의 태도와 새로운 세계가 도래하길 바라는 희망의 태도가 뒤섞인 모습. 즉, 종말은 단순히 파괴적 재해가 아니다. 절망과 희망이라는 정반대의 두 감정에 기초한 비약의 신파성과 이전과 이후 사이 돌이킬 수 없을 듯한 상태 변화가 있는 리미널(liminal)한 의례성을 지닌, 변화를 위한 사건이자 변화 그 자체이다.


종말이 변화를 위한 사건이자 변화 그 자체라는 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한국 불교의 역사에는 교관겸수와 돈오점수라는 개념이 있다. 고등학생 수준의 국사 지식에서만 말하면 교관겸수는 점진적인 수행과 발전 양상, 돈오점수는 급진적인 수행과 발전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완만한 일차 그래프과 계단식 그래프를 상상하면 된다. 이 둘 개념에 종말을 대입하면 종말은 사건 자체로는 돈오점수와 같으나 진행 양상은 교관겸수와 같다. 성인식에 비유해보자. 현대 사회에서 성인식은 20세가 되는 시점에 법적으로 발생한다. 바로 엊그제 미성년자인 사람이 법적으로 20세가 되면 바로 성인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어른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20세가 된 뒤에 계속해서 성인이 되어 가는 변화 과정을 끊임없이 겪을 뿐이다. 실제로 그 사람이 성인이 되는지는 알 수 없다. 성인식이라는 사건 자체는 급진적으로 찾아오나 사건의 과정은 점진적이다.


이처럼 종말은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에 기초해 있기에 실현 여부가 불분명하다. 다르게 말하면 종말은 지속적으로 실현이 유예되는 사건이다. 언제고 닥쳐올 죽음과 마찬가지로 종말도 언젠가 발생할 것이라 여겨지지만 어떤 명확한 근거나 실재는 없다. 언제 어떻게 어떤 형태로 도래한다와 같은 구체성이 없기에 종말에 대한 믿음은 그 자체로 모든 것이 파괴되길 바라는 절망과 새로운 세계와 같은 변화가 발생하길 바라는 희망의 깨질 듯 말 듯한 힘의 균형과 폭을 유지한다. 이러한 절망과 희망 사이 척력과 인력의 대칭이 깨어질 때 도저히 뛰어넘을 없을 것만 같던 감정 사이의 낙차를 단숨에 비약하는 감정적 신파성이 발생한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폭발하는 감정적 신파성에 기초해 종말은 거시적으로는 세계의, 미시적으로는 개인의 변화를 촉진할 것이다. 물론 그러한 변화의 순간이 어떤 형태로 올지 알 수 없기에 종말은 두려움과 기대감이라는 양면의 동전과 같은 모습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미나토와 요리가 말한, 어감상 빅뱅을 연상시키는 빅 크런치는 어떤 변화를 촉진하는 종말이라 할 수 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요리의 존재와 방화 사이 연관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영화상 요리는 자신의 성적 소수자성을 깨달은 혹은 갖고 있는 아이이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존재 일부를 알고 있는 것이기에 축복이라 할 수 있으나 아이인 요리에게는 견딜 수 없는 폭력이 가해진다. 요리의 존재 탄생의 일익인 아빠는 아들의 소수자성을 인정할 수 없어 매일 술에 취해 있는 인물이다. 단순히 술에만 취해 있는 것이 아니라 돼지의 뇌를 가진 괴물이라는 정신적 폭력과 몸 보이지 않는 곳에 멍을 남기고 욕조에 물을 받아 고문하듯 씻기는 등 육체적 폭력을 가하는 인물이다. 여기에 그는 걸스바를 다니는 인물인데 정작 영화에서 요리의 엄마는 크게 언급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요리가 아빠에게 커다란 분노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소수자성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 빅 크런치 이후의 새로운 세계를 기대하는 요리가 단순히 분노해 아빠가 있었을지도 모를 걸스바에 방화를 저질렀다고 보는 것은 어색하다. 걸스바, 요리의 부모, 요리, 소수자성이라는 키워드를 조합해보면 영화상 요리는 자신의 소수자성이 잘못된 것이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자신의 소수자성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요리는 굳이 그것을 숨기지 않으며 다른 아이들이 자신을 따돌리며 외계인이라 부르는 것에 크게 반응하지 않는다. 외려 다른 또래들과 관계를 신경써 자신과의 우정을 숨기거나 자신과 관계를 이어가는 도중 자신과 비슷한 소수자성을 깨닫고 당황해 자신을 멀리하는 미나토를 이해하는 모습에서 요리가 또래의 아이들보다 더 성숙했다는 인상을 주기까지 한다. 그런 요리에게 아빠는 폭력적이고 비도덕적인,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창조주와 다름없다. 그렇다면 요리의 방화는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스스로의 인식에 균열을 일으키는 폭력적이고 비도덕적인 창조주 아빠에 대한 저항과 그런 폭력적이고 비도덕적인 창조주이기에 자신과 같은 이질적인 존재가 탄생했다는 끔찍한 자기 혐오 등이 뒤섞인 행동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미나토에게서도 빅 크런치의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다. 미나토에게 있어 요리는 자신의 존재를 뒤흔드는 존재이다. 처음 미나토에게 있어 요리와의 우정은 미나토 개인의 도덕성과 연관된 것처럼 제시된다. 다른 아이들 앞에서 미나토는 요리와 친구라는 사실을 숨기고 요리가 주는 과자를 받을지, 먹을지 머뭇거리며 요리가 만진 머리카락은 잘라버린다. 그러나 방과후에는 요리와 함께 하수구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버려진 기차칸을 아지트로 꾸며 그곳에서 카드 놀이를 한다. 모순된 자신의 행동과 감정에 대해 미나토는 일종의 도덕적 불편감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요리를 향해 서서히 느끼다 부지불식간에 어떤 감정을 미나토가 깨닫는 장면과 자신의 감정에 놀라 미나토가 요리를 밀치고 도망치는 장면에서 미나토에게 요리의 우정은 단순한 도덕적 불편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요리에게 아빠가 존재적 모순을 느끼게 한다면 미나토에게는 요리가 존재적 모순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두 아이가 언제 어떻게 우정을 나누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요리와 우정을 나눌수록 미나토는 엄마 사오리가 사별한 아빠에게 약속한 삶, 그러니까 평범하게 가정을 이루고 평범한 행복을 누리며 사는 삶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낀다. 화장실 칸에 갇힌 요리가 "괴물은 누구게?"라 할 때 미나토가 못 본 척 도망가는 것은 인간의 육체에 돼지 뇌를 갖고 있다는 이질적인 존재 요리 때문에 평범한 아들이자 남자 아이라는 정체성이 흔들렸기 때문일게다. 바로 그 괴물이 자신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는 자기 혐오가 뒤섞인 모순을 느끼면서 말이다.


즉, 빅 크런치라는 종말은 정화를 통한 순수의 회복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정화의 대상은 앞서부터 존재한 사오리, 호리, 미나토, 요리, 교장 등이 살고 있는 단일하지만 단일하지 않은 세계이고 순수는 그러한 세계의 최초를 의미한다. 크게는 사오리, 호리, 미나토 & 요리의 시선으로 분열된 영화의 세계는 온갖 미신, 거짓말, 의심, 고정관념 등으로 서로의 시선이 교차점을 만들지 못한 채 헛교차하며 다면다층적으로 분열된 단일한 세계이다. 이러한 단일한 세계의 시간이 거꾸로 흘러 뭉개지고 뒤섞이는 정화를 통해 가장 최초의 순간으로 회귀해 다시 시간이 흐르도록 하는 순수의 회복. 빅 크런치는 자신의 소수자성을 이질적인 것으로 여기는 현재의 세계, 그러한 세계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자기 사랑과 혐오에 의한 고통, 사랑받고 싶으나 살부(殺父)의 감정을 느끼는 아이라는 모순 등이 모두 사라져 세계에서 완전히 받아들여지길 바라는 요리의 절망과 희망이 경합하여 도달하는 변화의 사건이자 순간인 것이다.


또한 빅 크런치의 의미는 미나토와 교장의 대담을 통해서도 단순히 파괴적 재해로서 종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무고한 호리를 폭력 선생으로 만든 것에 괴로워하는 미나토에게 자신의 손녀를 죽였으나 교장의 직위와 학교의 명예를 위해 무고한 남편을 손녀 살해자로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교장은 누구나 가질 수 있어야 행복이라 말한다. 이러한 교장의 발언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현재의 세계에 행복이란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어떻게든 행복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 미나토의 행동에 그럴 수 있다는 위로를 준다. 그리고 이러한 교장의 발언에서 빅 크런치가 행복을 위한 새로운 시작임을 시사한다. 다면다층적으로 분열되어 몇몇 이들만 행복할 수 있다는 혹은 몇몇 이들만 행복한 착각에 빠져 있는 단일한 세계는 빅 크런치를 통해 누구나 행복할 수 있는 세계가 될 수 있다.

출처. 왓챠피디아

하지만 <괴물>에서 그린 빅 크런치 이후의 세계가 정말 누구나 행복할 수 있는 세계라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빅 크런치 이후의 세계를 바로 그 직전 장면과 연결해 생각해보면 오히려 <괴물>의 결말은 관객에게 일종의 종말이 시작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빅 크런치 이후의 세계, 즉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이후의 세계 직전 장면은 미나토와 요리의 관계를 알게 된 사오리와 호리가 산사태에 휩쓸린 열차칸에서 사고로 중태에 빠졌을 두 아이들을 발견하는 듯한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짖는 두 사람의 목소리만 맴돌 뿐 아이들의 되받아치는 목소리는 없다. 또한 사오리와 호리는 기차칸 안을 살펴보려고 하지만 창문은 흘러내리는 진흙으로 계속해서 가려지고 간신히 연 창문 안으로는 아이들의 모습 대신 산비탈을 굴러 난장판이 아지트 내부가 조각조각 되어 보인다. 미나토와 요리 두 아이의 생사가 걱정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엎어진 열차칸에서 미나토와 요리를 발견한 듯한 사오리와 호리의 장면 다음의 장면은 아이러니 하다. 아이들의 이름을 울부짖던 사오리와 호리는 온데간데 없고 미나토와 요리만이 열차칸에서 정신을 차리고 열차칸을 빠져나온다. 태풍이 지나간 세계는 너무나 깨끗한 하늘에 밝은 햇살이 비추고 있다.  미나토와 요리라는 아이들의 상상을 통해 시작되었을 뿐 실제로는 일본 열도를 강타하는 태풍에 지나지 않던 빅 크런치는 세계를 완전히 뒤엎지도, 하다 못해 미나토와 요리의 마을을 파괴하지도 못한 것 같았다. 그저 술에 취한 채 맥주가 든 봉투를 들고 길을 걷던 요리의 아빠가 비바람으로 길에 미끄러지거나 손녀를 죽였을 뿐만 아니라 대신 범인으로 만들어 남편을 감옥에 보낸 교장이 비바람 속에서 자신의 괴로운 감정을 씻어내려는 듯 넘실대는 강물을 처량하게 보게 할 뿐인 줄 알았다. 하지만 마치 모든 것이 씻겨 내려간 듯 너무나 깨끗한 하늘과 숲, 밝게 빛나는 햇빛 등은 정말 빅 크런치가 발생해 새로운 세계가 왔나 싶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출처. 왓챠피디아

하지만 착각과 다르게 아이들의 대화와 이어지는 마지막 장면은 완전히 순수해진 듯한 세계와 전혀 다른 섬뜩함을 불러일으킨다.

요리      우린 다시 태어난 건가?
미나토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요리      아닌가?
미나토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요리      아닌가?
미나토   아니야! 그 전 그대로잖아.
요리      그런가? 다행이다!

아이들은 스스로의 모습을 보고 변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행이라는 말과 함께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며 모든 것이 깨끗해진 듯한 산의 숲을 뛰어다닌다. 그러다 이전에는 넘어가지 못하게 문으로 막혀 있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모든 장애물이 사라져 열려 있는 철로를 향해, 그 너머 터널을 향해 달려가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이전의 장면과 연결해 생각하면 미나토와 요리는 최악으로 죽었을 것이며 차악으로 코마 상태일 것이라는 상상이 가능하다. 인물들 가장 완성된 서사를 갖게 되었으나 아이라는 가장 연약한 존재라는 이유로 세계의 폭력에 그대로 노출된 미나토와 요리는 가장 아름다운 세계를 상상 속에서만 혹은 죽어서야 자유롭게 뛰어다닐 있게 것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이러한 영화의 결말은 따뜻한 낙관자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관객에게 전하는 날카로운 일침처럼 느껴진다. 스크린의 이미지를 판단하는 관객을 판단자에서 끌어내린 감독은 끊임없이 가장 연약한 존재인 미나토와 요리의 입을 통해 묻는다. "괴물은 누구게?" 관객은 사오리를 따라 호리를 비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폭력 교사로 판단하고 비난한다. 호리를 따라 교육의 최전방 중 하나인 공교육 교사의 교권 추락을 사오리와 같은 진상 부모와 미나토와 같은 아이의 악마성으로 판단하고 비난한다. 하지만 결국 관객의 판단 중 맞는 것은 하나도 없다. 하나의 세계를 사오리, 호리, 미나토와 요리가 각자의 시선에서 보듯 관객도 그저 각자의 시선에서 세계를 보고 있을 뿐이다. 그러한 시선들이 사이마다 채워져 보여지는 미나토와 요리의 시선은 하나의 세계에서 서로의 관계를 잊고 살고 있는 관객 자신을 떠오르게 한다.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르나 아무것도 변한 것 없이 그대로인 미나토와 요리의 모습은 시선이 경합하는 하나의 세계에서 가장 먼저 희생되는 가장 연약한 존재들을 떠오르게 한다. 인간(人間)이라는 착각 속에서 가장 연약한 존재들을 희생시키는 괴물은 결국 판단만 하려는 관객이라는 사실. 고레에다 감독은 관객에게 판단자에 대한 종말적 순간을 새기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순간을 늦게 인지할수록 가장 연약한 존재들이 가장 순수한 세계를 지금 여기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보게 된다는 것을 관객에게 꿰뚫으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관객인 우리에게 종말이 필요하다.


<괴물>을 보며 인상 깊었던 것 중 영화 음악이 있다. 평소에는 어떤 영화를 보든 영화 음악이 이야기와 함께 들려와 기억에 각인되는 경우가 없었다. 하지만 크게 [Monster 1], [Monster2], [Aqua]로 구성된 <괴물>의 OST는 [Aqua]를 일부러 불협화음으로 연주한 듯한 [Monster 1]과 [Monster 2]가 마지막 장면에서 온전한 [Aqua]로 연주된는 묘한 감상을 갖게 했다. 수많은 판단들로 뒤섞여 서로에 대한 불신과 어긋남으로 불협화음이 가득할 사오리와 호리의 시선은 빈 사이마다 채워져 완성된 서사가 된 미나토와 요리의 시선의 끝에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유려하게 흐르고 모든 것을 연결하며 감싸안을 물이 된 것이다. 그렇기에 <괴물>은 어쩌면 우리가 가장 바라는 세계의 모습에 도달한다. 그리고 그러한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 지금의 우리가 바뀌어야 한다는 사실,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우리에게 종말을 가져와야 한다고 말한다. 물리적, 영화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괴물>의 인물들이 어떻게 보면 영화상 인물들에게 절대적일 물리적, 영화적 분리를 뛰어넘게 되는 시작은 오탈자를 찾는 호리의 취미에서 시작한다. 우리 각자에게는 오탈자가 있다. 스스로를 인간이라 부르나 실제로는 인간이지 않다는 존재론적 오탈자부터 시작해 각자마다 여러 오탈자가 있다. 각자의 오탈자를 스스로가 발견하고 인지해 받아들일 때 우리는 진심으로 상대에게 다가가는 관계의 시작을 할 수 있다. 그때부터야 우리는 인간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을 뛰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같은 세계를 살고 있으나 서로 다른 시공간을 살아간다. 우리의 세계는 분리되어 있는 우리의 세계를 합하려는 노력 속에서 완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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