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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Feb 23. 2024

단절을 넘어 연대를 향해(1)

용산 & 명동. CGV. 나의 올드 오크.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본 글은 2편으로 나눠 연재합니다.


이번 글은 개인적인 경험에서부터 시작해볼까 한다. 그러니 서론의 내용을 너무 깊이 천착하기 보다는 일종의 혼자의 사고를 두서 없이 풀어내는 것으로 봐주시길 바란다. 때는 바야흐로 대학원 석사생 때. 학교 글쓰기센터에서 학생들의 글을 읽고 첨삭과 함께 어떻게 쓰면 더 좋은 글이 될 수 있을지를 상담하는 튜터로 근무한 적이 있다. 당시 학교에는 1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필수 글쓰기 강의들이 있었고 그 강의에서는 크게 책, 영화, 그림 등에 대한 감상문과 사회 쟁점에 대한 주장문을 작성하는 과제가 있었다. 학교에서는 글쓰기센터와 연계해 학생들에게 본인의 과제를 필수로 튜터링 받도록 했고 덕분에 튜터로서 필자는 학생들의 과제를 튜터링 해야 했다. 센터 담당 교수님으로부터 학생들에게 열정적인 것은 좋지만 너무 싸움꾼처럼 임하는 것은 아니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이제 막 12년의 대입 경쟁을 거쳐 학부생이 된 학생들을 위해 글에 대한 튜터링을 열심히 준비해 임했다. 주입식 학습에 익숙한 학생들에게 글을 어떻게 시작하는 것이 좋은지를 최소한의 기초라도 아는 바 내에서 알려주고 싶었던 마음이 컸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학생들의 글을 읽으면서 느낀 섬뜩함과 공포로 스스로 임전태세를 갖춰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도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었던 것 같다.


학생들의 글에서 느낀 섬뜩함과 공포는 주장문 과제에서 많이 느꼈다. 당시 주장문 과제는 연예인 군 면제, 능력주의, 세대 갈등, 사형제도라는 쟁점 4가지 중 하나를 혹은 4가지 쟁점 외에 다른 사회적 쟁점을 택해 본인의 찬반과 그에 대한 이유를 서술하라는 과제였다. 이러한 주장문을 읽다보면 10 중 8, 9 정도로 자신의 능력을 공정하게 평가할 능력주의가 옳다는 논리와 자신의 능력을 통해 이른바 국격을 상승 혹은 국위에 선양한 이들에 대한 군 면제가 옳다는 논리를 읽었다. 그리고 그 논리를 읽다보면 학생들의 피해의식을 느꼈다. 학생들이 어떤 의식을 가지고 위와 같은 논리로 글을 작성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위의 논리에서 타인은 자신의 성공에 대한 방해물이자 반드시 이겨야 하는 존재라는 전제와 강자 혹은 권력자라 여겨지는 이들에 대해서는 무조건에 가깝게 그들의 위치를 인정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고 느껴져셔인지 학생들의 글이 단순한 주장이라기보다는 절망과 분노처럼 읽혔다. 자신들의 능력만큼 보상받지 못하게 하는 타인-약자에 대한 분노와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이길 수 없는 타인-강자에 대한 선망 등이 느껴져 섬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등과 공정을 구분하고 평등보다 공정을 부르짖는 세태에서 학생들이 타인에 대한 단절감을 내재한 채 살아간다는 느낌은 그냥 넘어가기에 너무나 섬뜩해 본인도 모르게 임전태세를 갖추게 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출처. 왓챠피디아

글에서 얼핏 본 학생들의 모습처럼 요즘 우리에게 약자 혐오의 양상은 굉장히 자연스러운 인식일지도 모르겠다. 강자를 향한 선망으로 강자에게 감히 분노하지 못하되 약자를 향해서는 당연하다는 듯 쌓여온 분노를 표출하는 약자 혐오. 이러한 혐오가 절대적으로 작동하지는 않지만 세계적으로 만연한 현상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혐오 현상이 만연한 것에는 분명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역시 그 영향력을 회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구나 물질적 성공을 할 수 있다는 지나칠 정도의 자유주의 이상과 자본주의 시스템이 고도화된 세계에서 경쟁은 필연이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당연하다. 초연결을 통해 한 사회 내부만이 아니라 세계에서 서로가 서로의 생존에 대한 경쟁 대상이 되었기에 타인은 무의식적으로 경쟁 대상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게 인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나마 남아 있는 인간 이성의 도덕적 잔재가 타인에 대한 최소한의 규범을 유지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물론 도덕적 잔재마저 작동하지 않는 타인-약자는 너무나 쉽게 혐오의 대상이 되어 고정관념, 편견, 책임 회피 등의 다양한 폭력이 가해지고 배척된다. 그렇기에 약자들의 국제적 연대를 그리는 켄 로치 감독의 <나의 올드 오크>는 너무 이상적이라 허무맹랑하다고 느껴진다.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강력한 지침을 제시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도리어 약자들 그러니까, 우리들 대다수가 자유주의 이상과 자본주의 시스템을 내재화하고 있어 이처럼 강력한 지침과 같이 제시해야 연대를 간신히 상상해 타인을 다르게 볼 수 있겠다는 경험적 추론 때문인지 노(老)감독의 마지막일지도 모를 영화가 깊은 울림을 전해준다. 


1. 사진기 : 단절과 연결

<나의 올드 오크>에서 가장 중요한 오브제를 제시해보라면 사진과 사진기를 꼽을 것 같다. 연대와 관련해 영화에서 사진과 사진기는 단절과 연결이라는 모순된 알레고리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영국 북부 한 폐광촌 사람들의 흑백 사진들을 나열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내전으로 도망치듯 고국 시리아를 떠난 난민들이 버스를 타고 자신들의 마을로 오자 난민들을 데려온 'T.J. 밸런타인'(데이브 터너 분)에게 당장 먹고 살기 힘든 판국에 난민들을 왜 데려오냐고 욕설을 퍼붓는 같은 마을 사람들을 버스에 타고 있는 '야라'(에블라 마리 분)가 아버지에게 생일 선물로 받은 자신의 사진기로 찍은 것이다. 야라의 시선에서 마을 사람들의 모습은 생존에 대한 두려움에서 기인한 분노의 순간으로 담긴다. 못마땅하다는 듯 자신들을 바라보는 마을 사람, 버스를 향해 다가와 창문을 두들기는 마을 사람, 자신들을 사진으로 찍은 것에 고함을 지르는 마을 사람 등. 시리아 난민들을 향한 마을 사람들의 혐오는 현재의 과거화라 할 수 있는 사진기로 기록된다. 하지만 영화는 이렇게 기록된 사진들이 온전히 현상되어 기록으로 남았는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혐오의 순간은 야라에 의해 사진기로 기록되어 사진으로 스크린 위에 제시되지만 영화 내적 실재에서 야라의 사진기는 무례한 마을 사람에 의해 망가지고 혐오의 순간을 담은 필름도 어떻게 되었는지 제시되지 않는다. 즉, 관객은 혐오의 순간을 스크린을 통해 사진으로 보지만 실제 영화 내부의 인물들에게는 현상된 사진의 형태로 제시되지 않는 것이다. 혐오의 순간은 야라의 시선을 담은 편린으로 남아 '단절'된다.

출처. 왓챠피디아

반면 T.J.가 운영하는 펍인 올드 오크에서 과거 폐광촌 노동자들이 투쟁과 행사를 위해 모인 방에 걸린 흑백 사진과 야라가 폐광촌 사람들의 일상을 찍은 흑백 사진은 혐오의 순간을 담은 사진과 달리 현상된 사진으로 스크린 밖의 관객들만이 아니라 영화 내부의 인물들에게도 제시된다. 단순히 제시된다는 차이점만이 아니라 두 흑백 사진 사이 '연결'을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 폐광촌 노동자들의 공동체를 단적으로 느낄 수 있는 공간인 방은 더 이상 활용되지 못하고 온갖 잡동사니가 쌓인 창고로 남아 있지만 동시에 과거 노동자 공동체의 모습을 간직한 흑백 사진이 걸린 공간이다. 야라는 바로 그 공간에서 정부에 대항해 대규모 파업을 단행하고 "함께 먹을 때, 더 단단해진다(When you eat together, you stick together)."라는 문구와 먹을 것을 나누며 함께 먹는 노동자들의 사진을 본다. 함께 할 때 더 단단해진다는 연대의 이미지가 담긴 하나의 문장과 사진으로 본 야라는 폐광촌 노동자들과 그곳에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시리아 난민들의 일상을 자신의 사진기로 담기 시작한다. 그런 야라의 사진을 노동자들과 난민들은 영국 노동자들이 식사를 하는 펍에서 무슬림의 음악을 들으며 영상으로 함께 감상한다. 영국 노동자 공동체를 기록한 사진은 시리아 난민 야라의 사진으로 이어져 영국-시리아, 노동자-난민으로 구성되는 국제적 공동체로 연결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첫째, <나의 올드 오크>의 사진은 영국이라는 특정 국가의 노동자라는 약자로 구성된 과거의 공동체에 대한 단절의 알레고리를 지니고 있다. 사진은 현재의 과거화로 현재의 그 순간을 고정한다. 고정된 순간은 과거에 있었으나 이제는 다시 없을 죽은 순간이 되어 현재와 단절된다. 펍의 버려진 방에서 야라와 함께 노동자 공동체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는 T.J.는 과거와 같은 공동체가 이 마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며 씁쓸해한다. 이런 T.J.의 씁쓸한 모습은 앞서 시선의 편린이되 현상되지 못한, 마을 사람들이 혐오하는 순간과 맞물려 단절의 알레고리로 작동한다. 사진기는 폐광촌 노동자들의 혐오를 사진으로 고정해 특정 국가의 약자들로만 구성된 공동체가 지닌 폐쇄성의 한계와 그에 따른 편협함과 혐오를 마주하게 하고 영광스러운 과거와의 단절을 떠오르게 한다. 간단한 초코바 하나도 먹기 어렵고 망가진 가구들조차 아쉬울 정도로 생존에 위협을 느끼는 폐광촌 노동자들에게서 정부의 탄압에 모두가 단결해 먹을 것을 나누며 파업을 할 과거의 공동체는 배부른 소리일 뿐이다. 과거보다 더욱 거대한 자본과 권력을 갖고 있는 타인-강자들에게 맞서는 것보다 편협한 배척으로 무장해 자신들보다 더 약한 타인-약자 즉, 난민들을 공격하는 것은 자위가 된다. 

출처. 왓챠피디아

하지만 둘째, <나의 올드 오크>의 사진은 영국-시리아의 노동자-난민이라는 약자들의 국제적 연대로 구성된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연결의 알레고리도 지니고 있다. 현재의 과거화인 사진은 현재의 그 순간을 기록한다. 기록된 순간은 과거에도 있었기에 이제 과거와 비슷하면서 새로울 살아 있는 순간을 상상하게 해 현재와 연결된다. 폐광촌 노동자들의 공동체 모습을 본 야라와 그런 야라에게서 위로를 받은 T.J.를 중심으로 버려진 방에서 함께 식사를 한 노동자들과 난민들은 야라의 사진영상회도 함께 즐긴다. 그런 사진영상회가 끝날 때 난민들은 노동자들의 연대를 상징했던 용기-연대-저항의 깃발을 다시 만들어 전해준다. 노동자와 난민이 하나의 공동체로 변화하는 모습은 노동자 공동체의 사진, 노동자와 난민의 일상을 담은 야라의 사진과 맞물려 연결의 알레고리로 작동한다. 사진기는 지금 바로 여기, 무너져가는 한 폐광촌에서 함께 살아가는 노동자들과 난민의 일상을 사진으로 기록해 국가를 넘어 국제적 연대로 나아가는 영국 폐광촌 노동자들과 시리아 내전 난민들의  공동체가 지닌 저항 에너지의 가능성을 마주하게 하고 영광스러운 과거에서 앞으로의 미래를 향한 연결을 떠오르게 한다.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음에도 각자가 가진 것을 한 식탁에서 함께 먹고 표정과 손짓, 발짓으로 서로의 삶을 소통하는 노동자-난민 공동체의 모습은 이상적이다. 하지만 동시에 더욱 거대한 자본과 권력을 갖고 있는 타인-강자들에게 맞서기 위해 개방된 환대 기반의 타인-약자 간 연대는 현 시대의 문제에 저항하기 위한 대안 가능성으로 제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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