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WatchTalk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ozetto Mar 01. 2024

단절을 넘어 연대를 향해(2)

용산 & 명동. CGV. 나의 올드 오크.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본 글은 2편으로 나눠 연재합니다. 이전 편을 이전 편을 읽고 오시길 바랍니다.


2. 친구라는 이름으로

물론 켄 로치 감독은 노동자-난민으로 제시한 국제적 연대 공동체를 하나의 대안 가능성이 아니라 단 하나의 가능성, 그러니까 반드시 나아가야 하는 단일한 지침으로 제시한다. 어찌보면 굉장히 노골적일 이 지침 제시는 거부감이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가능해도 서사에서 불가능한 이야기보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듯해도 서사에서 가능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깨달음을 준다고 하지 않은가. <나의 올드 오크>는 단절과 연결의 모순된 알레고리를 지닌 사진과 연계된 서사적 가능성으로 이러한 거부감을 최대한 억제하는 듯하다. 그리고 <나의 올드 오크>는 이 서사적 가능성을 연대해 용기를 가지고 함께 저항하며 삶을 나누는 동지로서 친구로 제시한다. 이러한 서사적 가능성으로서 친구를 크게 세 번의 도약 지점을 통해 제시하면서 <나의 올드 오크>는 폐광촌에 새롭게 등장하는 국제적 연대 공동체가 우리의 현실에서도 가능할 수 있다고 제시한다. 그리고 그 첫 번째 도약 지점을 친구를 의미하는 노동자들의 은어가 이름이자 실제로도 T.J.의 친구인 반려견 '마라'(로라 분)의 등장으로 제시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 이전에 폐광촌 노동자들의 상황을 먼저 살펴보자. 세대와 성별의 층위에서 살펴보면 폐광촌 노동자들은 개별화되어 있다. 신자유주의를 표방한 영국 대처 정부에게 연대해 저항했던 과거의 노동자 공동체, 그러니까 노년 세대는 세계의 흐름과 정부의 정책에 저항했으나 결국 거스르지 못했으며 공동체는 붕괴했다. 연대의 경험이나마 남은 노년 세대와 달리 그들의 아들과 손자 세대는 패배가 체화된 삶에서 표면적으로 한 마을 사람이라 말할 뿐이다. 본 적도 없는 마을의 집을 인터넷으로 구매하는 외국 자본에 의해 헐값이 된 집 때문에 슬퍼하는 이웃을 위해 함께 안타까워는 한다. 하지만 마을을 위해 행동에 나서기 보다 낡은 펍 올드 오크에 모여 맥주를 축내며 노년 세대에게 무례하게 행동하고 고국을 떠날 수밖에 없던 이민자들을 욕하며 그런 이민자들에게 혐오를 쏟아내는 아이 세대들이 잘했다고 환호성을 올릴 뿐이다. 손자 세대는 또 어떤가. 하루 한 끼를 먹지 못해 빈혈기를 일으키는 아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은 채 방에서 나오지 않는 청년, 대형 맹견을 데리고 다니며 센 척만 할 뿐 맹견의 행동에 책임감은 없는 청년들 등. 폐광촌은 마을 공동체가 아닌 개별화되어 삶에 짓눌린 이들의 집합일 뿐이다.


성별의 관점에서 폐광촌 노동자들의 생활 반경은 다른 성별일 경우 서로 겹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남자들은 올드 오크에서 모여 시덥잖은 농담과 이민자들에 대한 혐오를 안주로 맥주를 마시다 다시 집에 가 술을 퍼 마신다. 그들에게 가족이 있는지 없는지, 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다. 그저 자신들 덕분에 유지된다는 생각으로 (물론 어디에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거들먹거리며  펍에 와 시간을 축낼 뿐이다. 여자들이라고 다르지 않다. 이들에게서는 가족이 있다는 것은 부분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가족의 생활을 책임지느라 정신이 없는지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한다. 유일한 휴식은 미용실에서 머리 하고 잠시 모여 티타임을 갖는 순간인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도 중년 여성들의 모임일 뿐 나이든 여성들은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두 집단이 섞이는 모습은 올드 오크의 공청회실에서 공동 배식과 식사를 할 때를 제외하면 아예 없다고 할 수 있다. 공청회실의 배수관이 망가져 공동 배식과 식사를 하지 못할 때 남녀를 불문하고 올드 오크에 모인 것처럼 보이나 스크린에는 패배감이 가득한 마초적 남자들이 주되게 보일 뿐이다. 폐광촌에는 모두 한데 모여 얼굴을 마주할 공동체의 공간이 없다.

출처. 키노라이츠 & 왓챠피디아

이제 잠시 시간을 과거로 돌리자. T.J.는 삶에 지쳐 해저 갱도에서 사고로 죽은 자기 아버지와 같이 바다에서 죽으려 한 순간 우연과 같은 운명(혹은 그 반대)처럼 해변에서 친구인 마라를 만난다. 이러한 둘의 관계는 영화에서 제시하는 가장 최초의 공동체라 할 수 있다. 아내와 아들 모두가 외면하고 펍을 유지하는 것은 무의미하게 느껴질 정도로 삶의 부침이 어깨를 짓누를 때 T.J.는 자신의 발을 해변에서 바다로 옮긴다. 그런 순간 저멀리 짖으면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정말 작은 개. 노동자들의 은어로 친구를 뜻하는 마라가 적힌 목걸이를 걸고 있는 작은 개. 운명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우연한 순간에 우연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운명적인 만남이다. <나의 올드 오크>에서 T.J.가 죽음을 택했던 때의 폐광촌은 현재보다 나을 뿐 여전히 간신히 살고 있었을 시기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 시기에도 폐광촌은 공동체라기 보다는 개별화된 마을 사람들의 집합일 뿐이다. 서로 하루에 한 번 정도 만나 아픈 구석을 핥아주며 위안을 해주지만 실상은 갈 곳이 없고 갈 능력이 없어 떠나지 못한 이들의 집합일 뿐이다. 그렇기에 T.J.에게 마라는 파업으로 힘겹던 어린 시절 펍의 공청회장에서 모두를 위한 식사를 함께 지어 함께 밥을 먹었던 부모님을 비롯한 노동자 공동체를 떠올리게 한다. 삶에서 가장 힘겨운 순간 작지만(적지만) 자신의 몸에 기댈 수 있도록 한(함께 밥을 지어 함께 밥을 먹은), 이름 그대로 친구이다. 삶에서 저항할 수 있는 에너지를 나누는 기초적이면서도 최초의 가능한 공동체이다.


T.J.와 마라의 공동체가 마을 사람들이 아닌 야라를 통해 계승되는 지점은 <나의 올드 오크>의 서사적 가능성을 더욱 실체화한다. 사실 T.J.와 마라의 공동체는 개별화된 개인들의 집합으로 존재하는 폐광촌에서 유일한 공동체이되 공동체로서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펍을 유지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과 이민자 사이에서 줄타기도 해야 하지만 근본적으로 T.J. 본인이 개별화된 개인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패배감에 짓눌린 자신의 자존감을 위해 마초성을 두른 채 통제하기도 어려운 대형 맹견을 아무런 안전 장치없이 끌고 다니는 마을 청년들에게 T.J.는 마라를 향해 달려들 듯하며 짖어대는 대형 맹견에 놀라 소용 없는 호통만 칠 뿐이다. 어쩌면 청년들이 통제하지 못한 맹견에 마라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개별화된 개인의 집합에서 공동체로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 T.J.와 마라 공동체의 예견된 종말일 것이다. 하지만 야라와 그의 엄마가 시리아의 음식을 가져와 T.J.와 나누며 그러한 한계를 극복한다는 점은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서사적 가능성이다. 모든 삶의 터전을 포기한 채 간신히 목숨만 부지한 채 언어도 통하지 않는 낯선 타지로 밀려온, 어떻게 보면 더 약자라 할 수 있는 야라와 그의 엄마가 친구의 죽음에 대해 누구에게도 위로를 받지 못하고 있는 T.J.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친구 즉, 공동체가 되는 것은 현실에서 거의 기대하기 어려우나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도 아닌, 심지어 아주 가끔은 우리의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삶의 실체와 유사하다.

출처. 왓챠피디아

T.J.와 야라의 공동체가 뜻깊은 것은 단순히 현재 공동 배식과 식사로 노동자와 이민자의 연대를 이끌어 새로운 공동체로 이어지기 때문이 아니다. 야라가 T.J.에게 말했듯, 과거 T.J.의 모친이 T.J.에게 말했듯, 파업 당시 광부 공동체가 사진을 통해 오늘날 노동자와 이민자 그리고 스크린 너머 관객에게 말하듯 함께 먹을 때 더욱 단단해진다는 연대의 가치를 실체화했기 때문에 영화 내적으로 의미가 있으며 영화 외적으로 가능성으로서 의미가 있다. 함께 밥을 하고 밥을 먹는 것은 음식 섭취를 같이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같은 식탁에서 같은 음식을 함께 호흡하며 먹고, 언어가 통하지 않음에도 서로의 몸짓과 표정으로 삶의 순간을 나누는 것으로 서로의 존재를 육체적으로 감각하고 보이지 않는 어떤 끈을 묶는 것이다. 그 끈은 현재의 노동자와 이민자만 엮는 것이 아니라 과거 그 자리에서 똑같이 공동체를 이룬 광부 공동체와도 엮는 시간적 비약이다. 즉, T.J.와 야라의 공동체는 영화 내적으로 현재만이 아니라 과거까지도 연결해 연대의 가치를 실체화할 뿐만 아니라 영화 외적으로 시간적 비약이 지닌 에너지를 통해 스크린 너머로 연대와 공동체라는 단일한 지침이 침투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는 서사적 가능성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나의 올드 오크>는 야라의 부친의 사망을 추모하는 장례식이라는 마지막 지점을 통해 서사적 가능성을 실체화하려는 시도까지 하는 듯하다. 실체화 시도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두 번째 지점과 마지막 지점 사이에서 크게 2개의 사건을 살펴봐야 한다. 과거 농노들이 지었을 대성당에서 거룩한 카톨릭 성가를 들으며 야라는 내전 중인 시리아를 떠올린다. 거룩한 성가와 노동의 거룩한 결과물은 너무나 평화로워 매일 같이 수만 혹은 수십만의 사람이 고통 받고 있는 아비규환의 고국을 더욱 떠오르게 한다. 동시에 그런 자신의 고국을 외면하는 국제 사회에 대한 원망도 뒤따른다. 그럼에도 그 아비규환 속에서 아직 부친이 살아있다는 희망과 그러한 고국의 참상만이 아니라 따뜻하기도 할 세계의 모습을 부친에게 받은 사진기를 시작으로 담아낼 사진사가 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야라는 내전 중인 고국을 떠올리며 차오르는 패배감과 좌절을 이겨낸다. 이러한 야라의 희망은 뒤이어 가톨릭 성가와 반대지만 똑같이 거룩한 무슬림의 노래가 퍼지는 펍의 공청회장에서 노동자들과 이민자들이 폐광촌에서 보내고 있지만 잊고 있던 따뜻한 일상을 담은 야라의 사진영상회에서 극대화된다. 야라의 흑백사진에서 노동자들과 이민자들은 영화에서 보지 못했던 미소와 함박웃음을 짓는다. 여기에 이민자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노동자들의 사진에서는 흑백으로만 남은 용기-연대-저항의 참나무(Oak) 깃발을 만들어 노동자만이 아니라 스크린 너머 관객들에게 색이 있는 모습을 보인다. 마치 국제적 연대 공동체의 미래가 밝기만 할 것처럼 말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하지만 첫 번째 사건은 두 번째 사건을 통해 완전히 뒤엎어진다. 패배감을 마초성으로 가리고 혐오를 무기로 휘두르는 일부 노동자들은 공청회장의 낡은 배수관을 망가뜨려 공동 배식과 식사를 기반으로 한 노동자와 이민자의 국제적 연대 공동체에 위기를 가져온다. 좋은 일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영화 속 아이들의 말은 좋은 일보다 나쁜 일이 더 흔하다고 느끼는 현실의 패배감 혹은 좌절을 떠올리게 한다. 그저 아이들의 패배감과 좌절만 있었다면 버틸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T.J.는 친구라 생각한 노동자들이 자신 몰래 밤 사이 펍에 침입해 배수관을 망가뜨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심지어 그런 범죄에 부끄러워 하지 않은 채 뻔뻔스럽게 펍을 찾아와 마을 사람들로 꽉찬 펍을 보며 무슬림 테러리스트들이 없는, 마을을 위한 펍이 돌아왔다고, 자신들이 없으면 T.J.도 없을 것이라고 크게 소리친다. 친구라 믿었던 이들이 비열하기 짝이 없는 패배자들이자 그러한 패배자들이 연대 공동체에 대한 혐오로 공동체를 망쳤다는 사실에 T.J.는 입에 담기에도 조심해야 할 배신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면서까지 분노한다. 분노의 에너지 만큼 더욱 짙은 좌절을 느끼며 T.J.는 더 이상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이 버겁다 말하며 펍을 나가버린다. 모든 것을 포기하듯 펍을 나간 T.J.가 삶에 지쳐 해변에서 바다로 발을 옮겨 자살하려던 때와 같은 구도로 해변에서 바다로 발을 옮긴다. 밝은 미래만 있을 것 같던 국제적 연대 공동체는 가파르게 좌절의 구렁텅이로 내던져지고 스크린 바깥의 관객도 똑같이 시궁창 같은 현실을 깨닫는다. 좋은 일은 오래가지 못한다.


다음 순간 구렁텅이로 던져진 국제적 연대 공동체는 야라의 부친 사망 소식을 통해 다시 한 번 비약의 순간을 맞이한다. 살아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넘어 아직 살아있다는 소식까지 들려왔던 부친이 결국 사망했다는 소식은 야라가 앞서 느낀 희망을 송두리째 무너뜨린다. 내전을 피해 고국을 등지고 낯선 영국 폐광촌으로 밀려온 이민자들에게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혹은 고국이 다시 평화를 되찾을 것이라는 희망은 사라진다. 간신히 차를 집어 들고 울음을 삼키며 우울한 침묵을 맞이한다. 바로 그 순간 바깥에서 누군가 문을 두들긴다. 폐광촌 노동자들이 꽃을 들고와 조의를 표하며 부친의 사진에 인사를 하고 남편이자 부친이자 친구를 잃은 이민자들을 껴안으면서 마침내 울음이 터져나와 우울한 침묵이 깨진다. 터져나온 감정은 서로를 따뜻하게 위로하며 오히려 민족, 종교, 성별, 나이 등을 뛰어넘어 장난도 치고 웃기도 하는 공동체의 장이 된다. 서로를 위한 공동체의 장이 사라졌다 여기며 모든 것이 끝났다고 느낀 패배감과 좌절은 어느새 비약을 통해 여전히 바로 이곳에 과거와 같은 연대의 공동체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야라가 T.J.에게 말한다. 슈크란(شكرا). T.J.가 야라에게 말한다. 슈크란(شكرا).

출처. 왓챠피디아

<나의 올드 오크>의 이 마지막 비약은 앞서 언급했듯 국제적 연대 공동체라는 단일한 지침을 단호하게 제시하는 것으로도 느껴진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좋은 일보다 나쁜 일이 당연하며 그 나쁜 일은 생존 경쟁자인 타인에 의해 발생한다는, 흔히 '현실적이다'라고 하는 인식에서 보면 <나의 올드 오크>의 비약은 단일한 지침을 위한 단호함으로 읽힌다. 하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정말 말이다. 우리 삶의 어떤 선택의 순간에서 <나의 올드 오크>의 마지막 지점, 그러니까 한 번도 본 적 없는 누군가, 그러니까 내전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있을 것이라는 희망 그 자체인 누군가의 남편이자 부친의 죽음에 함께 슬퍼하는 일은 불가능한가? 똑같이 내전을 피해 연고도 없는 타지로 떠밀리듯 떠나온 비슷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한 공간에서 함께 먹으며 육체적으로 서로의 존재를 감각하고 보이지 않는 단단한 끈을 통해 과거와 현재까지 엮인, 바로 그 연고도 없는 타지인들이 누군가의 남편이자 부친의 죽음을 함께 슬퍼하며 위로하는 일은 불가능한가? 흑백으로만 남아 이제는 사진을 보지 않고는 기억도 나지 않던 자신들의 과거 유산을 오늘날 색깔이 입혀 현재로 실체화해준 낯선 이들의 남편이자 부친이자 친구의 죽음을 함께 슬퍼하고 위로하며 연대하는 일은 불가능한가?  


서론에서 말했듯 우리는 현실적이라는 말로 이상을 이상으로만 놔두며 이상에 대한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는 경향이 있다. 너무 오랫동안 경쟁만 한 타인은 이제 연대한다는 것이 이상적으로만 느껴진다. 그런 가운데 이길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타인-강자에게는 애초에 저항할 생각을 하지 않으며 자신이 그러한 타인-강자가 될 수 있다는 막연한 희망 속에서 절대 자신을 이길 수 없을 것이라 여겨지는 타인-약자를 인식적으로, 물리적으로 짓밟는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영화 인생 동안 사회주의에 기반해 연대라는 가치를 줄기차게 영화화한 켄 로치 감독이 대단하다고 여기면서도 이상일 뿐 현실적이지 않은 영화라고, 단일한 지침을 너무 단호하게 말하는 영화라고 말하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에서 불가능해 보여도 서사에서 가능한 일은 현실에서도 가능하며 이미 현실에서 실재한다. 장례식 이후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나의 올드 오크>의 국제적 연대 공동체는 과거 파업하며 공동체의 의지를 보이기 위해 행진한 광부 공동체처럼 용기-연대-저항의 참나무 깃발을 들고 행진한다. 이 모습이 불가능한 이상으로만 보이는가 아니면 실재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느껴지는가? 어떻게 느끼는지는 <나의 올드 오크>의 서사적 가능성에 설득됐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나의 올드 오크>를 단일한 지침이 아니라 가능성으로 봐달라고 혹은 단일한 지침을 받아들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다만 이것을 기억하자. 좋은 일은 오래가지 않는다. 하지만 좋은 일은 항상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단절을 넘어 연대를 향해(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