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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Jan 05. 2024

흐릿하게, 선명하게 : 사랑을 확언하는 안개(3)

연희. 라이카시네마. 만추 & 헤어질 결심.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본 글은 길어 3편으로 나눠 연재합니다. 이전 편을 읽고 오시면 더 좋습니다.


3. 균열을 극복하는 의지의 서사 : 안개 속 연인

이렇듯 애나와 서래는 이방인이라는 안개에 있으면서 고독하고 싶다는 착각과 타인과 관계 맺고 싶다는 소망 사이 균열을 겪고 있다. 이들에게 있어 호스트인 훈과 형사인 해준은 안개 속에서 갑작스럽게 만나게 되는 외부인이다. 그것도 자신을 파헤치는 외부인이다. 호스트인 훈은 상대방이 원하는 연인의 모습을 알기 위해서 상대방과 대화한다. 누구와 무엇을 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디에 가기를 원하는지 등. 비슷하게 형사인 해준도 상대방이 범인인지 알기 위해 상대방과 대화한다. 누구와 무엇을 했는지, 평소 무엇을 좋아했는지, 어디에 갔는지 등. 상대방을 알아야 하는 훈과 해준은 애나와 서래에게 타인과 관계 맺고 싶다는 소망을 달성할 수 있는 기회이면서도 고독하고 싶다는 착각을 걷어 상처와 아픔이 있는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위협이다. 기회이자 위협이라는 균열. <만추>와 <헤어질 결심>은 이방인으로서 안개의 시공간을 살아가는 애나와 서래에게 모르는 존재라는 타인으로서 안개의 존재인 훈과 해준이 만나 고독과 관계의 균열을 극복하는 영화인 것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이러한 고독과 관계의 균열을 극복하는 서사를 <만추>와 <헤어질 결심>은 애나-훈, 서래-해준 두 연인의 시선 교차가 변화하는 양상으로 드러낸다. 시선의 교차와 관련해서 <만추>의 애나와 훈은 안개 속에서 시선이 엇갈리며 만난다. 안개가 자욱한 버스 정류장에서 누군가로부터 도망치듯 시애틀행 버스에 올라탄 훈은 애나에게 버스비를 빌리는 순간에 애나가 자신에게 웃었다고 말하는 반면 애나는 자신이 웃었을 리 없다고 말한다. 사실 애나가 웃었는지 안 웃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그 순간 훈은 애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애나는 훈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교도소로 돌아갈 때까지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다 조용히 돌아가려는 애나는 잠깐 같이 있으면 괜찮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접근하는 훈을 자신이 있는 안개의 시공간 밖으로 밀어낸다. 애초에 사람과 사랑을 잊으려 하는 애나에게 뻔히 보이는 목적을 가지고 접근하는 훈은 시선을 줄 이유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귀찮기까지 한 남성이다. 그렇기에 애나와 훈이 서로를 지나치는 순간에는 항상 훈이 애나를 먼저 바라보고 있고 애나는 훈을 바라보지 않는다.


이렇게 서로를 바라보지 않고 엇갈리는 애나와 훈의 시선 교차는 영화에서 크게 3번 변화하는 양상을 보인다. 첫 번째는 뮤지컬의 한 장면처럼 범프카 관중석에서 애나와 훈이 한 남녀의 대화를 더빙할 때이다. 애나와 훈이 범프카 관중석에서 남녀의 대화를 더빙할 때 둘은 입장이 반대가 된 것 같다. 상황은 자신을 찾아온 여자를 매몰차게 거절하는 남자. 애나를 바라보며 다가오는 것은 훈이고 훈을 바라보지 않고 계속해서 밀어내는 애나 입장에서 서로 반대의 성을 더빙해야 할 것 같지만 애나는 사랑하는 남자를 찾아온 여자를 더빙한다. 이 과정에서 여자-애나는 남자-훈이 자신에게 말이 아닌 손과 눈으로 사랑한다고 말했다고 더빙한다. 여자-애나의 말에 남자-훈은 행복은 여자의 본인의 손에 달려있다 답하고 남자와 여자가 헤어지면서 상황은 종료되는 듯 했다. 애나와 훈은 어색한 분위기로 더빙을 마무리한다. 하지만 갑자기 훈의 목소리가 아닌 자신의 목소리로 남자가 여자를 붙잡으면서 상황의 반전이 시작된다. 되감기와 빨리 감기가 뒤섞인 듯 움직이는 놀이공원의 풍경 속에서 남자와 여자는 마치 무대 위에서 사랑을 나누듯 손을 맞잡고 춤을 춘다. 둘의 춤은 남자가 여자와 포옹한 채 별이 빛나는 밤하늘로 날아오르며 끝이 난다.


이 장면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애나가 고독에서 벗어나 사람과 사랑에 대한 감정에 들끓는 상처를 잠재워줄 관계를 열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자-애나가 남자-훈에게 자신을 차갑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손과 눈으로 사랑한다고 말했던 때처럼 따뜻한 눈으로 바라봐달라 말한 것을 생각해보자. 애나가 옛 연인에게 했던 것이자 바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것은 말이 아닌 온 몸으로 나누는 사랑이라는 것을 애나 스스로가 발화한 것이다. 또한 아마 남자와 여자는 애나와 훈의 더빙과 다른 상황이었을 것이고 둘의 춤은 서로의 사랑을 다시 확인하는 과정의 비유일 것이다. 뭐가 됐든 이 장면을 목격한 애나에게는 하나의 큰 변화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자신을 붙잡고 함께 떠나지 않았던 옛 연인에 대한 그리움과 배신감으로 상처를 받고 싶지 않아 고독의 착각에 빠졌던 것에서 벗어나 다른 누군가와 온 몸으로 느꼈던 사랑을 시작하고자 하는 불씨가 스파크 튄 순간인 것이다. 떠나는 줄 알았던 남자가 여자를 먼저 붙잡고 함께 별이 빛나는 밤으로 퇴장하는 것을 바라본 애나는 훈에게서 도망치듯 시장을 가로지른다. 훈은 그런 애나를 쫓아간다. 남자가 여자를 붙잡았듯 훈도 애나를 붙잡는다. 아무도 없는 시장에서 둘의 시선 교차가 변화하는 두 번째 순간을 맞이한다.


시선 교차가 변화하는 두 번째 순간은 아무도 없는 시장에서 훈이 애나의 말에 중국어로 좋네와 안 좋네로 답할 때이다. 서로 쫓고 쫓기듯 시장을 달리다 아무도 없는 시장의 정육점에 멈춰서 숨을 고를 때 애나는 처음으로 훈에게 자신이 수감자라는 사실과 내일 교도소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애나에 대해 누구인지 묻던 훈에게 처음으로 애나에 대한 진실이 이에 대해 훈은 자신이 유일하게 알고 있는 중국어 好(하오, 좋네)로 답하고 애나는 좋지 않다는 의미의 坏(화이, 안 좋네)를 가르쳐준다. 이후 애나는 자신의 첫사랑, 첫사랑과 도망치려던 것, 남편 살해 등 과거의 사연을 중국어로 이야기한다. 애나의 이야기에 훈은 애나의 이야기에 훈은 애나의 표정, 톤 등만으로 판단해 자신이 알고 있는 2개의 중국어로만 답할 수밖에 없었고 맥락상 반대의 답변을 한다. 이 장면은 언뜻 보기에 서로 대화가 되고 있지 않는 장면이고 가벼운 웃음을 유발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애나의 말과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듣고 중국어 2개만으로 어떻게든 답변을 하려는 훈의 모습은 애나를 올곧게 바라보는 시선만큼이나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듯하다. 그런 훈의 시선은 자신의 이야기를 이해하는지 여부와 관계 없이 애나의 시선을 끌어 애나가 훈을 바라보며 처음 미소 짓게 만든다.


애나와 훈의 시선이 서로를 바라보게 된 세 번째 순간은 애나 어머니의 장례식이다. 앞서 서술했듯 살인자인 애나는 물리적, 정신적으로 애도하기에 충분하지 않은 3일이라는 시간을 버티고 있다. 더해서 자신을 가족이 아닌 재산 분배를 위한 동의자로 여기는 형제들, 자신을 배신하고도 변명만 할 뿐 사과를 하지 않는 첫 연인에 대한 그리움과 배신감 등으로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견디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난지 자신의 이야기를 올곧은 시선과 함께 들어주고 이틀 정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조문을 하러 온 훈의 존재는 애나에게 이방인이 아니라는 사실, 그러니까 자신이 안개 속에 홀로 존재하는 존재가 아님을 깨닫게 한다. 여기에 훈은 장례식 후 조문객들이 모인 자리에서 애나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주변을 맴돌며 애나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첫 연인과 포크를 사용했다는 거짓 이유로 몸싸움을 한다. 이 몸싸움을 막는 과정에서 애나는 첫 연인에게 간접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뒤흔들고는 책임감 없이 배신한 채 떠나버렸으면서 왜 진심어린 사과를 하지 않았는지를 처음으로 소리를 지르며 울부짖는다. 자신이 이방인이 아니라고 깨닫게 한 훈을 통해 애나가 마음 한 켠에 죽이고 있었던 사과를 요구하는 울부짖음을 표출한 것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애나와 훈의 관계는 3일이라는 한정된 시간 안에 이뤄진다. 즉, 안개로 인한 시각의 제한에 더해 시간까지 한정적이기에 시선의 교차가 변화하는 순간에 느껴지는 감정은 더욱 짙고 강렬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두 사람의 감정은 관객이 현실에서 느끼는 것보다 더욱 크며 그렇기에 억압에 따른 반작용 역시 더욱 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주체할 수 없이 빠르게 커진 강렬한 두 사람의 감정과 관계가 갑작스럽게 종언을 맞는 결말은 <만추>라는 영화 제목처럼 더욱 슬프게 아름다운 숭고로 가득하다. <만추>의 결말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아주 짙은 안개에 휘감겨 있다. 마치 우연하게 시작된 애나와 훈의 관계가 갑작스럽게 끝날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런 것도 모른 채 교도소로 돌아가는 버스에 올라탄 애나를 배웅하던 훈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애나의 옆에 앉아 처음 본 것처럼 인사를 한다. 그의 인사에 애나는 다시 한 번 웃고 둘은 처음 만난 사이인 것처럼 대화를 이어간다. 호스트인 훈은 식당을 하러 미국으로 온 한국인 이민자로. 수감자인 애나는 미국 시애틀로 휴가를 온 중국인 미용실 사장으로.


하지만 이내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이름 모를 휴게소의 버스 정류장처럼 짙은 안개가 낀 이름 모를 휴게소에서 애나와 훈의 관계는 종언을 맞이한다.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을 직감한 훈은 애나에게 영원히 남을 저주이나 가장 아름답게 기억될 작별의 키스를 한다. 애나 역시도 다시 못 만날 것처럼 호응하며 훈을 깊이 껴안고 짙게 키스를 한다. 두 사람은 애나가 나오는 날 다시 만나자고 약속한다. 하지만 훈과 마찬가지로 관객들은 직감한다. 아마 두 사람이 만날 일은 없을 거라고. 처음이자 마지막 키스를 뒤로 두 사람의 만남은 꿈처럼 느껴질 것이라고. 마치 모든 일이 꿈이었다는 듯 안개가 걷혀 햇살이 비치는 휴게소에서 애나는 불안한 경찰의 사이렌이 들리는 가운데 사라진 훈을 찾는다. 아스라이 남아 있는 훈의 입술, 훈의 몸, 훈의 향기 등을 느끼며. 마지막 순간 어딘가를 바라보는 애나의 모습은 차갑게 식어가는 커피만큼이나 외로운 감정을 더 짙게 느껴진다. 마지막이라는 직감이 스크린의 현실로 나타날 때 너무 늦게 타오른 사랑의 순간이 남긴 잔열로 외로운 감정이 더욱 짙어진다.


<헤어질 결심>은 <만추>보다 더 지독하다. 자부심으로 살아온 형사 해준이 서래를 위해 자부심을 포기하는 1부와 서래가 해준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는 2부로 나눌 수 있을 <헤어질 결심>은 고독과 관계의 균열을 극복하는 영화로 보기에 어렵다. 특히 서래가 완전히 사라지는 결말은 해준에게 있어 영원한 고독을 남기고 관계는 완전히 파탄난 것처럼 보인다. 시선의 교차와 관련해서도 관객은 서래를 바라보는 해준의 시선이 모니터로 비춰지는 서래의 시선와 교차되는 것처럼 서래와 해준의 시선이 교차한 듯 보이나 실제로는 어긋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자. <헤어질 결심>의 1부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살아야 했던 이방인 서래가 처음으로 괜찮은 남자 해준을 만나 잠시 꿈같은 시간을 보낸 이야기로 볼 수 있다. 또한 자신의 생존이 아니라 깨어지고 부서지는 것을 감수하고 타인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랑에 대해서 알게 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2부는 해준과 마찬자기로 서래가 깨어지고 부서지는 것을 감수하고 자신의 목숨을 바쳐 삶을 지탱할 수 있게 한 자부심을 해준이 되찾을 수 있게 한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출처. 왓챠피디아

이렇게 봤을 때 <헤어질 결심>의 서래와 해준의 시선 교차도 크게 3번 변화한다. 해준이 서래의 범죄 사실을 숨기고 중요 증거를 서래에게 맡기는 지점, 서래가 해준이 맡긴 중요 증거를 돌려주고 과거의 자부심 있는 경찰로 돌아가라 말하며 키스하는 지점, 해준이 모든 비밀을 안고 바다에서 사라진 서래를 찾는 지점이다. 첫 번째 변화 지점에서 해준을 향한 마음과 자신의 생존 모두를 선택하려 한 서래는 온전히 해준을 바라보지 않는다. 해준은 괜찮은 남자이지만 동시에 경찰이다. 즉, 해준은 경찰이기에 남편 살해라는 진실을 가려주면서 괜찮은 남자로 자신을 사랑해주는 존재이지만 반대로 사건의 진실을 밝히면서 자신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그렇기에 해준에 대한 의심과 관심의 경계 사이에서 서래는 해준에게 모든 것을 바치지 못한다. 반면 서래의 손에서부터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된 해준은 서래를 온전히 바라보며 자신의 삶을 지탱해 온 자부심을 모두 바친다. 해동 할미의 핸드폰을 새로 사고 증거가 담긴 이전의 핸드폰을 서래에게 남기는 해준은 자부심을 모두 바친 자신이 완전히 붕괴되었다라 말하며 떠나간다. 이 첫 번째 지점에서 해준은 서래를 물리적으로 보지 않으나 심적으로 서래를 떠올리며 살아가는 상태 즉, 살아 있으되 살아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해파리처럼 살아가게 된다. 반대로 서래는 해준이 남긴 붕괴의 의미를 곱씹으며 물리적으로나 심적으로나 해준을 바라보고자 한다.


해준이 있는 이포로 온 서래가 자신과 해준의 과거를 파헤치려는 남편을 살해한 2부에서 나타나는 두 번째 지점은 해준이 자신의 심적 상태를 깨닫게 되면서 서래를 다시 바라볼 수 있는 주춧돌이 만들어지는 지점이다. 해준에게 서래는 보고 싶지만 보고 싶지 않은 모순된 존재이다. 그런 해준에게 서래는 자신이 한국에 온 목적인 어머니의 유골을 대신 뿌려달라고 말하고 자신의 범죄에 대한 중요 증거가 담긴 핸드폰을 돌려주며 마지막에는 부드러워진 손으로 얼굴을 만지고 키스를 한다. 애나에게 훈이 자신의 흔적을 남기듯 서래 역시 해준에게 흔적을 남기는 과정이자 이 과정으로 해준은 서래를 보고 싶었던 자신의 심적 상태를 인지할 수 있게 된다. 물론 해준이 완전히 자신의 심적 상태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남겨진 서래의 흔적은 마지막 세 번째 지점에서 해준이 서래가 자신을 온전히 바라봐줬다는 것에 순수하게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이어진다.


세 번째 지점에서 서래와 해준은 같은 공간에 존재하지 않고 핸드폰으로 목소리만 듣고 있다. 그들의 시선 역시 서래를 뒤쫓고 있는 해준의 구도에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고 물리적으로 서래가 해준의 앞에 있다는 점에서 해준은 서래를 보고 있되 서래는 해준을 보고 있지 않다. 해준이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해준의 사랑이 끝났고, 해준의 사랑이 끝났을 때 자신의 사랑이 시작됐다고 말하는 서래의 말처럼 서래와 해준은 끝까지 시선이 교차되지 않는 듯하다. 하지만 서래가 해준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려 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래가 해준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해준 역시 서래가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생각으로 다시 한 번 남편을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한 명의 어머니까지 자신의 어머니와 같은 방법으로 살해했음을 알게 된다. 나아가 서래가 남긴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서래에게 자신이 사랑했다고 말했음도 알게 된다. 이 순간 안개 낀 해변에서 해준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온전히 서래와 시선을 교차하게 된다. 하지만 해준에게 남은 것은 기억의 형태로 남은 서래의 흔적일 뿐이기에 두 사람의 시선은 다시 어그러지며 감정과 관계는 순간 타오르는 것으로 끝날 뿐이다. 파도 소리에도 묻히지 않는 해준의 외침은 뒤늦게 타오른 두 사람의 사랑의 잔재처럼 안개 속으로 서서히 사라지는 듯하다.


그럼에도 <만추>와 <헤어질 결심>은 남아 있는 흔적으로 사랑이 이뤄지지 않았음에도 여전한 사랑에 숭고를 느끼게 한다. <만추>의 애나는 훈과 약속을 위해 출소한 날 이름 모를 그 휴게소를 다시 찾는다. 물론 훈은 애나를 만나러 올 수 없다. 마지막 이별 당시 훈은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애나에게는 훈의 흔적이 남아있다. <헤어질 결심>의 해준도 마지막 순간까지 파도를 헤치며 서래를 목놓아 부른다. 밀물이 밀려들어와 더 이상 찾을 수 없는 것이 분명함에도 해준은 파도를 헤치며 서래를 찾는다. 설사 서래를 찾지 못한다고 해도 해준에게도 서래의 흔적이 남아있다. 바로 이 흔적들. 안개로 교차하지 못하는 듯하다가 간신히 교차되지만 결국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되어 한 순간 타오른 사랑에 빠진 듯한 두 연인은 결코 잊을 수 없는 흔적 속에서 영원히 사랑을 기억하게 된다. 씁쓸한 외로움 혹은 애절한 외침으로 끝날지라도 애나와 해준은 훈과 서래의 흔적을 명확히 기억할 것이다.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은 사랑이 선명하게 남아 있어 뛰어넘을 수 없을 것 같은 균열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의지를 갖게 한다. 특히 그 흔적이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상대를 떠올리게 하기에 두 연인의 서사를 본 관객들은 외로운 가운데, 애절한 가운데 여전히 실존하는 사랑에 숭고를 느끼게 된다.

출처. 왓챠피디아

결과적으로 <만추>와 <헤어질 결심>은 관객에게 서로가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랑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만추>와 <헤어질 결심>은 서로 유사하게 모순된 안개와 사랑을 활용한다. 흐릿하지만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지점. 숨기고 있으나 상대가 알아주길 바라는 지점. 이러한 모순성은 상대를 향한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서, 그 감정이 드러났을 때의 상황들이 두려워서 등의 이유로 서로의 감정을 숨기며 엇갈리는 두 영화의 연인들의 서사로 드러난다. 서로에 대해 잘 모르는 가운데 감정을 숨기고 엇갈리는 두 인물 사이는 흐릿하지만 선명한 안개로 물리적으로 혹은 은유적으로 채워져 있다. 만날 듯 하면서 만나지 못하는 혹은 만나기를 원하나 만날 수 없는 억압과 극복의 운동은 안개와 사랑의 모순성으로 점점 가속하고 팽창한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진 감정을 안은 두 사람이 도달한 곳은 온전히 모든 것을 상대에게 바치는 감정으로서 사랑이다. 그리고 그러한 연인의 모습을 보는 관객은 억압과 극복의 운동을 따라가며 도달하고 싶으나 현실에서는 도달할 수 없을 듯한 사랑의 모습에 감동한다. 혹은 더 심하면 필자처럼 현실에서는 불가능할 것 같은 사랑을 한 두 연인에게 질투와 같은 동경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늦든 빠르든 어느 순간 선명하게 사랑이 다가오리라. 사랑 외에 의지할 것이 없는 우리는 삶에서 서로를 바라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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