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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Dec 30. 2023

흐릿하게, 선명하게 : 사랑을 확언하는 안개(2)

연희. 라이카시네마. 만추 & 헤어질 결심.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본 글은 3편으로 나눠 연재합니다. 이전 편을 읽고 오시면 더 좋습니다.


2. 이방인으로서 시공간 : 안개의 시공간

의미 차원에서 서로 연관된 사랑과 안개의 의미는 <만추>와 <헤어질 결심>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나는지 보자. 가장 먼저 살펴볼 것은 탕웨이 배우가 두 영화에서 맡은 인물이 모두 한 사회 혹은 공동체에 속할 수 없는 이방인 여성이라는 점이다. <만추>의 애나는 남편을 죽인 살인자일 뿐만 아니라 결혼과 7년 간 수감 생활로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 타지에 있던 여성이다. <헤어질 결심>의 서래 역시 남편을 죽인 살인자이며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생활한 여성이다. 이 중 살인이라는 공통점을 먼저 살펴보자. 두 여성 모두 살인 즉, 정상 사회에서 가장 금기시하는 죄를, 살인 중에서도 가장 금기시하는 가족 살인을 범한 인물이다. 서래는 엄마를 살해하기도 했으나 죽기를 바란 엄마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했다는 점에서 남편 살인과는 차이가 있기에 제외하도록 하자.

출처. 왓챠피디아

그렇다면 애나와 서래의 남편 살해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표면적으로 애나와 서래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남편을 죽인다. 애나는 옛 연인과 함께 도피하려 했으나 옛 연인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버려지고 이를 알게 된 남편에게 폭력을 당하다 의도치 않게 죽이게 된다. 서래는 밀입국 사실을 빌미로 자신을 협박하고 매일 같이 폭력을 가하는 남편에게서 살기 위해 죽인다. 두 사람 모두 그 순간 살기 위해서 살인을 저지른다. 하지만 더 깊이 살펴보면 애초에 애나와 서래 모두 남편과의 관계가 사랑이 없는 관계임을 알 수 있다. 평생을 사랑하겠다고 맹세하며 시작하는 결혼임에도 두 사람은 사랑 없이 결혼했으며 종국에는 살인으로 마무리하는 것이다. 즉, 두 사람의 남편 살해는 냉혹한 세상의 일면을 강조해 사랑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냉소로 볼 수 있다.


나아가 남편 살해는 애나와 서래를 이방인으로 낙인찍는다. 애초부터 애나는 남편이 아닌 옛 연인을 사랑했기에 연인의 배신은 애나가 타인과 사랑을 의심하게 만든다. 이런 가운데 남편을 살해하면서 사회 역시도 애나를 구성원에서 배제한다. 밀입국 여성으로 사회적 약자인 서래는 밀입국한 자신을 보호해준다고 생각한 남성에게 밀입국 상황으로 협박, 착취, 폭력을 당한다.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타인을 믿었으나 오히려 이용, 착취, 폭력을 당했기에 서래는 타인과 사랑에 대해 의심하고 나아가 남편을 살해하면서 사회로부터 자신을 격리당하게 된다. 살인의 의도성에 따른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 애나와 서래는 스스로를 사회로부터 격리하고 있으며 사회 역시도 그들의 살인으로 애나와 서래를 격리하고 있는 것이다. 배제되고 격리되어 있기에 애나와 서래는 괜찮은 남자를 만나기 더욱 어렵게 한다. 서래의 말로 하면 괜찮은 남자를 만나기 위해서는 살인이라도 해야 형사와 피의자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이방인이니까.


러한 이방인성은 <만추>와 <헤어질 결심>에서 시공간적으로 드러난다. 우선, <만추>에서 애나의 이방인성은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3일의 외휴 기간으로 드러난다. 애도는 슬픔을 잠시 현시하는 특별한 시간 즉, 흐르고 있는 시간 중 잠시 다르게 흐르는 시간이다. 잠시 다르게 흐른다는 점에서 애도는 결국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혹은 실제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 가능하다. 하지만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3일 간의 외휴는 교도소에서 시애틀을 간신히 오고갈 수 있는 시간으로 물리적으로 충분한 애도가 불가능하다. 나아가 결국 다시 교도소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정신적으로도 충분한 애도를 불가능하게 하는 시간이다. 그 3일이란 기간 중 애나를 만난 가족들은 애나와 함께 어머니의 죽음을 함께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남은 어머니의 식당을 처분해 어떻게 나눌 것인지로 서로 싸운다. 그들에게 애나는 가족이라기 보다 곧 돌아가야 하는 수감자로 빨리 동의 사인을 받아야 하는 이방인일 뿐이다. 일정 시간마다 교도소로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전화까지 해야 한다. 3일은 애나에게 계속해서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헤어질 결심>에서도 서래의 이방인성은 서래가 살아가는 시공간에서 두드러진다. 서래의 시공간은 다른 누군가와 만나며 발산하는 형태가 전무하며 서래 자신에게만 수렴하고 있다. 서래는 집과 직장 외에 따로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 사실 직장에서도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 매일 다른 노인들을 찾아가 간병하러 가지만 거동이 불편하고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노인들은 서래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지 서래와 인간적인 관계를 맺기는 어려운 이들이다. 간병인으로 출근하지 못할 때는 가축처럼 거의 집에 갇힌 채 살아야 한다. 그렇기에 죽은 남편이 산 노인보다 중하지 않다는 서래의 말은 그만큼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서래가 간병인이라는 일 외에 다른 누구와 어떤 인간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이다. 심지어 간병인 센터에서 에이스라고 하지만 아무도 그의 사생활을 알지 못하고 부러진 뼈의 CT를 보여주며 죽을 뻔 했다고 걱정하는 의사 외에 서래가 피식 웃는 것을 본 사람이 없다. 서래의 시공간은 서래외에 아무도 없다. 아무도 모르는 이방인이기에 서래는 젊고 예쁘지만 늙은 한국 남성과 결혼했을 뿐만 아니라 남편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는, 수상한 외국인 여성이 된다.

출처. 왓챠피디아

즉, 애나와 서래의 시공간은 안개가 낀 시공간과 같다. 이방인으로서 시공간에 존재하는 애나와 서래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들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어떠한 경위에서 살인을 했는지 등은 궁금하지 않다. 그저 남은 재산을 처분하기 위한 동의만 표하고 빨리 수감자로 돌아가거나 노인들로부터 간병인인지 손녀딸인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뛰어난 간병 기술을 발휘하면 된다. 이미 이방인인 그들에 대해서 굳이 궁금하지도,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는 애나와 서래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누군가와 인간적인 관계를 맺지 않아도 된다. 애초에 그런 인간적인 관계는 존재하지도 않거니와 있다고 믿으면 도리어 언제고 자신에게 상처만 남길 뿐이다. 애나와 서래는 다른 누군가로부터 자신들을 감추고 고독하게 있고 싶다. 그래야 생존할 수 있다.


하지만 애나와 서래는 고독함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이들이다. 자신들의 시공간에서 다른 누군가로부터 자신들을 감추고 관계 맺는 것을 거부하지만 애나와 서래는 계속해서 다른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3일이라는 외휴는 애나에게 교도소에서 잊고 지낸 감정을 느끼게 한다. 어린 시절의 첫 사랑이자 자신을 배신한 옛 연인에 대한 그리움과 배신감. 새로운 드레스에 빛나는 장신구를 끼고 도시의 거리를 걷고 싶다는 충만한 자유의 기쁨. 일상에서 느끼는 자연스럽게 느끼는 감정을 애나는 느끼고 싶다. 특히 다른 누군가와 진심 어린 관계를 맺고 싶다. 아이스크림으로 저녁을 때우는 고독한 미망인 서래는 더욱 직접적으로 타인과 관계를 소망한다. 미망인 서래가 저녁마다 보는 한국 드라마는 전형적인 멜로 로맨스이다. 드라마로 한국말을 배워 일상적이기보다는 고풍스럽게까지 느껴지는 서래의 말은 상황만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까지 적확하게 표현한다. 형사인 해준이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 집 근처에 매일 잠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차에서 자고 있는 해준을 사진 찍은 뒤 "Good morning"이라고 인사할 뿐이다. 심지어 드라마를 보고 있는 자신을 바깥에서 해준이 바라보고 있을 것이라 상상하며 웃는다. 애나와 서래는 고독하고 싶다는 착각을 하며 안개 속에 숨어 있지만 누구보다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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