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헤어질 결심>이 개봉한 후 지금까지도 여전히 <헤어질 결심>에 빠져있다. 개봉 이후 올해 1월 1일이 되는 순간까지 총 10번 같은 11번을 봤으며 개봉 1주년 즈음에 기념으로 1번 더 봤으니 총 12번을 봤다. 그 중 11번은 극장에서 봤는데 아마 극장에서 <헤어질 결심>을 가장 많이 본 사람이 필자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하곤 한다. 각설하고 <헤어질 결심>이 개봉한 이후 이수에 있는 아트나인에서 탕웨이 특별전을 했었다. 탕웨이 배우가 나왔던 영화들을 몇 편 상영했는데 그 때 <만추>를 보고는 아주 강한 기시감을 느꼈다. <헤어질 결심>과 <만추> 사이의 기시감. 탕웨이 배우가 맡은 인물의 유사성만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두 영화의 관점, 두 영화를 관통하는, 유사한 안개의 의미, 두 영화에 등장하는 연인의 서사가 지닌 유사성 등 두 영화가 지닌 유사성은 여러가지 상상을 하게 한다. 어쩌면 김태용 감독과 박찬욱 감독이 탕웨이 배우에게서 비슷한 것을 본 것은 아닐까 하는 혼자만의 상상. 특히 <만추>가 없었다면 <헤어질 결심>도 없었을 것 같다는 발칙한 상상. 이 글은 그러한 상상을 풀어낸 것이다. 그리고 흐릿한 안개에서 이토록 선명하게 낭만적인 사랑을 그린 두 영화에 대한 동경을 풀어낸 것이다.
1. 모순된 안개 : 흐릿하지만 선명한 사랑
<만추>와 <헤어질 결심>이 어떤 점에서 유사한지를 알기 위해서 두 영화의 공통 소재인 안개가 지닌 의미와 그러한 안개가 사랑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먼저의 안개의 의미. 안개는 모호하기에 모순적이다. 희뿌옇게 눈앞을 가리는 안개는 아무것도 없는 듯 손에 잡히지 않고 허공을 떠돈다.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감각으로 손끝과 발끝에 아무것도 없다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자신을 제외하면 아무도,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감각. 그렇기에 안개 속에 있다면 무엇이든 숨길 수 있다는 착각과 홀로 존재한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안개는 분명 존재한다. 시각을 제외하면 실체를 느낄 수 없어 존재하지 않는다고 느껴지지만 안개는 자기 안의 다른 모든 것 주변을 떠다닌다. 다르게 말하면 안개는 자기 안의 모두와 일체인 것과 같다. 손끝과 발끝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이미 혼연되어 있어 일체가 된 상태. 성인은 물이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했지만 사실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는 안개일지도 모르겠다.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존재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러한 안개의 모호한 모순성은 <만추>와 <헤어질 결심>을 보고 느끼게 되는 감정의 폭포를 이해하는 것에 중요한 단초가 된다.
<만추>와 <헤어질 결심>은 사랑에 대한 영화이다. 안개를 배경으로 하는 남녀의 사랑 영화이다. <만추>에서 '애나'(탕웨이 분)와 '훈'(현빈 분)은 안개가 자욱한 도로 위 시애틀행 버스에서 우연히 만나 안개 낀 시애틀에서 사랑을 나누다 휴게소의 안개 속에서 사랑의 끝을 맞게 된다. <헤어질 결심>의 '서래'(탕웨이 분)와 '해준'(박해일 분)은 살인 사건에서 형사와 피의자로 우연히 만나 어떻게 흐르는지 모를 서로의 감정을 나누다 파도치는 해변의 안개 속에서 사랑의 종지부를 찍는다. 의도적으로 두 영화를 비슷하게 요약해서 그렇지 두 영화는 겉으로 보기에 전혀 닮은 구석이 없다. 당장 안개만 하더라도 두 영화 중 안개는 상대적으로 <만추>에서 물리적으로 전경화되어 있고 <헤어질 결심>에서는 은유적 혹은 정신적으로 후경화되어 있는 듯하다. 실제로 <만추>는 안개가 낀 듯한 색감부터 안개 낀 시애틀이라는 물리적 배경이 영화 전반에 등장한다. 반면 <헤어질 결심>은 살인 사건에 따른 서래와 해준의 관계로 인해 발생하는 추리 요소가 안개가 낀 듯 불명확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가상의 도시 이포처럼 안개가 물리적으로 낀 배경이 영화 전반에 등장하지 않는다. 심지어 각 영화 속 연인의 서사는 휴가 중인 죄수와 호스트, 형사와 피의자의 관계부터 시작해 겉으로 보이는 서사는 닮은 구석을 찾기 어렵다. 두 영화가 유사하는 느낌이 무색할 지경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그럼에도 두 영화가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을 넘어 더 나아가 <만추>가 없었다면 <헤어질 결심>도 없었을 것 같다는 지나친 억측까지도 하게 된다. 후술한 억측은 두 영화의 개봉 시기에 따른 결과론으로 우스갯소리로 넘어가도 된다. 명작은 결국 언제고 만들어지는 것 아니겠는가. 다만 박찬욱 감독이 <헤어질 결심>의 구체적인 서사를 구상하는 것에 김태용 감독의 <만추>가 영향을 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은 떨쳐내기 어렵다. 앞서 서술한 안개의 모호한 모순성이 사랑에서도 발견된다는 점, 그러니까 안개와 사랑의 유사성을 살펴보면 필자의 생각에 어느 정도 동조해줄지도 모르겠다. 안개는 흐릿하지만 선명하게 존재한다. 이처럼 모호한 안개에 대한 모순된 감각을 우리는 사랑에서도 유사하게 느끼고 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분명 존재하지만 그 감정이 실제로 어떤 모습인지 알기 어렵다. 사랑은 물과 같아 그 형태가 변화무쌍해 그 무엇과도 어떤 사랑이든 할 수 있다고 한 어느 감독의 영화처럼 우리는 어떤 사랑이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무엇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지 더 나아가 사랑이 존재하는지 의심하게 된다. 존재함에도 존재를 의심하는 착각에 빠지게 되는 안개와 사랑.
존재의 차원에서 모호한 모순성을 유사하게 가지고 있는 안개와 사랑은 주체의 인식 차원에서도 비슷한 면이 있다. 안개는 다른 존재들과 완전히 일체되어 존재한다. 그러다 보니 그 안의 다른 존재들은 안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착각과 함께 다른 존재들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고독의 착각도 경험한다. 마치 자기 혼자만 존재한다는 고독이자 다른 존재들과 완전히 단절되었다는 고독. 이 단절되었다는 고독의 착각은 다르게 말하면 자신을 완전히 숨길 수 있다는 착각과 같다. 분명 안개 속에 함께 존재하지만 단절되어 있다는 착각으로 다른 누군가로부터 완전히 자신을 숨길 수 있고 그러한 상태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고독은 결국 다른 무언가 존재한다는 인식이 있기에 느낄 수 있다. 다른 무언가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고독하다는 착각도 불가능하다. 즉, 다르게 말하면 이러한 착각을 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봐주길 바란다는 욕망과도 연결할 수 있다. 안개 속에 자신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 존재해 자신이 혼자가 아니길 바라는 욕망이자 나아가 그 다른 무언가와 조우해 서로를 알아보길 바라는 욕망인 것이다. 단지 다른 무언가와 조우했을 때 발생할 일들이 두려울 뿐이다. 무시, 갈등, 죽음과 같은 어떤 부정적인 사건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계속해서 고독의 착각을 유지할 뿐이다.
안개 속 존재가 느끼는 착각을 사랑과 연결해보자. 다른 누군가를 향해 어떤 감정이 있다는 것을 숨길 수 있다고 우리는 쉽게 착각한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그 감정을 숨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관찰자의 눈치 유무 혹은 그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감정은 어떤 형태로든 겉으로 드러난다. 그럼에도 그 감정을 숨기고 있다고 착각한다. 특히 사랑을 느끼는 경우에 이렇게 많이들 착각한다. 자신이 사랑을 느끼는 것인지 알 수 없어 그럴 수도 있고, 상대가 자신의 감정에 부담을 느낄까 두려워 그럴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결국 자신의 감정을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상대를 향해 느끼는 감정은 상대가 있기에 가능하다. 상대가 사라지거나 혹은 애초에 상대가 없다면 어떤 감정도 일어날 수 없다. 즉, 숨긴다는 것은 결국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는 의미이기도 하며 이를 상대가 알아주길 바라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그 감정이 드러난 뒤에 발생할 일들이 두려울 뿐이다. 관계의 종말이 두려워 드러나는 것을 직시하지 않은 채 숨길 수 있다는 착각에 있을 뿐이다.
이처럼 존재에 대한 인식과 주체의 인식에서 발생하는 균열은 어떤 에너지 운동을 작동시킨다. 어떤 식으로든 인식의 균열을 메우고 싶은 욕망과 그 욕망을 이룰 수 없다는 좌절 즉, 억압과 극복의 운동이다. 억압과 극복의 운동은 끝나지 않는다. 어느 한 쪽으로 기울거나, 둘 사이 평형을 이루거나, 끝없이 반복되다 버티지 못하고 터지거나. 하지만 어느 한 쪽으로 기우는 상황은 다른 한 쪽을 충족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억압을 충족하면 극복을, 극복을 충족하면 억압을 충족하지 못한 것이다. 어느 한 쪽에 기운 상황은 상황이 끝났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억압과 극복의 대결이 지속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평형을 이루는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즉, 억압과 극복의 운동은 팽팽한 평형 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폭발하는 결말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억압과 극복이라는 상황이 종결된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종결의 상태에서도 억압과 극복의 운동은 끝난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남아있다. 그저 에너지의 빅뱅으로 기진맥진한 상태가 됐을 뿐이다. 한 번 경험한 억압과 극복의 운동은 상흔으로 남아 기저에 남아 새로운 운동을 위한 에너지를 준비할 뿐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 결국 빅뱅 끝의 기진맥진이 아주 잠시 동안의 평온이라고 해도 말이다. 이러한 억압과 극복의 운동을 사랑에 적용해보면 결국 사랑은 존재한다는 결론으로 나아간다. 온 정신을 집중해 짙은 안개를 빠져나오려 해 결국 안개를 빠져나왔듯, 온 마음을 다해 상대와 씹고 뜯는 과정을 거쳐 결국 서로를 온전히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결과적으로 <만추>와 <헤어질 결심>은 모호하고 모순적인 안개와 사랑 사이 유사성으로 사랑의 존재를 확언하는 영화이다. 현실과 이상의 거대한 간극에 대한 절망과 그 간극을 극복하고자 하는 도약의 의지가 영화 내적으로는 인물들 사이에서, 영화 외적으로는 영화와 관객 사이에서 치열하게 부딪히는 영화이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착각은 존재할 것이라는 바람 혹은 존재한다는 실재에 닿으려 한다. 사랑을 의심한다 함은 사랑의 이데아를 꿈꾸는 것 혹은 실재하는 사랑의 이데아에 닿으려 한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으로 느껴질 뿐더러 존재하는지도 의심되는 사랑. 아주 잠시만이라도 현존하길 바라는 사랑에 대한 바람 혹은 현존할 수 있다는 의지. 물리적, 은유적 장애물인 안개는 두 영화에서 내외적으로 계속 반복되어 팽팽하게 당겨진 절망과 극복의 고무줄을 더욱 팽팽하게 만든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을 엇갈리게 하면서. 눈을 가려 상대를 향한 감정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면서. 그러한 상황에 안타까워 하는 관객의 감정은 더욱 짙어진다. 하지만 연인은 그 모든 균열과 간극을 극복한다. 균열과 간극에 의한 억압을 극복하려는 의지의 빅뱅을 통해. 비록 그 끝이 아주 잠시동안 유지되는 기진맥진의 평온처럼 갑작스러운 이별 혹은 영원한 헤어짐처럼 찰나동안 현존하는 사랑일지라도 그 끝을 향해 나아간다. 그 끝은 외로움, 안타까움, 씁쓸함 등으로 귀결될지라도 사랑이 실존하는 것을 넘어 찰나의 순간 타오르는 불에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숭고를 전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