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부대껴 사는 세상에서 갈등은 기본이고 단순한 사과와 화해로는 해결할 수 없는 골 깊은 갈등도 있기 마련이다. 골 깊은 갈등과 관련해서 나오는 논쟁은 갈등이 해결되었다고 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복수의 기준이다. 어린 아이 싸움이 어른들 싸움이 되듯 갈등의 골이 깊어질수록 복수의 끝도 애매하다. 칡 덩굴과 등나무 덩굴이 뒤엉키면 어디가 시작이고 어떻게 엮였는지 알 수 없듯 갈등을 끝내기 위한 조건은 너무나 복잡하다. 원수까지, 원수의 친구까지, 원수의 가족까지 등. 감정을 서로 나누는 인간사에 갈등의 손은 어느새 당사자와 관련된 사람들까지도 휘어잡아 복수의 사슬을 단단히 엮는다. 끝없이 이어갈 것 같은 갈등과 복수에 대해서 인간은 법으로 규제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가.
"자기 가족이 당해도 그렇게 말할 수 있나 보자."
"본인이 직접 당해도 그렇게 말할 수 있겠어?"
어느 감정이든 타인이 감정의 주체를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나 억울하다는 감정만큼 어려울까. 법으로 위로하기에는 너무나 깊고 넓은 억울하다는 감정. 너무 깊고 넓어 복수를 끝내야 한다는 생각만 있을 뿐 어떻게 해야 만족할 수 있을지는 알지 못한다. 갈등과 복수의 사슬에 단단하게 얽히는 순간 누구나 가장 억울할 따름이다.
그렇기에 복수극은 비극이다. 심연을 바라보면 심연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니체의 말처럼 복수의 순간에서 복수의 주체와 대상은 모호하다. 부대끼는 와중에 자기를 밟았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네, 소중한 것을 가져가려고 했네, 그게 아니라 밀린 거네 등. 수많은 사연 속에서 모두가 억울함의 주체이다. 단지 누군가는 히어로기, 누군가는 빌런이 될 뿐이다. 그래서 복수의 성공은 복수의 실패와 같다. 치열하게 부딪히던 모든 것들이 사라져 아무것도 없는 비극. 복수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자신의 행동은 깊숙이 담아놓은 억울함 위로 끝간 데를 모르고 쌓인다. 하지만 복수가 마무리 되는 순간 후련하다는 감정이 없다. 복수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자신의 행동과 결국 피를 뒤집어 쓴 모습은 드높았던 억울함을 저 깊은 나락으로 곤두박질 치게 해 허무함이 되게 하고 나아가 휘발되게 한다. 그저 처음부터 서로가 얽혀들지 않게. 얽혀든 그 순간에 느낀 억울함에 붙잡히지 않게. 어떤 순간에라도 서로가 조심했더라면 어땠을까. 바로 앞의 상대를 생각해 다른 선택을 했으면 어땠을까. 미친 듯이 내달린 복수의 순간은 무상하게 되돌아보게 되는 꿈일 뿐이다.
1. 기억하라, 단장의 비극적 순간을 : 묵자의 부채
올해로 무대에 오른지 8년 차인 고선웅 연출의 <조씨 고아, 복수의 씨앗>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복수극이다. 중국 고전 중 하나이자 중국 4대 비극 중 하나인 원(元) 시대 잡극 작가 기군상의 <조씨 고아>를 각색한 이 공연의 기원은 <좌전>, <국어>, <사기> 등 중국의 사서 혹은 고전에 기록된 조씨 고아의 복수 이야기이다. <사기 세가> 중 [조(趙) 세가]의 기록을 보면 조씨 고아의 복수는 진(晉) 영공(公), 성공, 경공 즉 3대에 걸쳐 이어진 조씨 가문의 쇠락과 부활기이다. 춘추전국시대의 이야기가 원나라에 이르러 하나의 공연이 되었고 현대에 새롭게 각색된 것이다. 이 흐름에서 유심히 볼 것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조씨 고아>의 이야기는 모두 복수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사에서 갈등과 복수란 것을 피할 수는 없는 일이니 복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억울하다는 감정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모두가 억울할 수밖에 없는, 어찌보면 불합리하다고 느껴지는 세계에서 복수는 불합리에 대한 인간의 마지막 수단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다만 각색되어 공연된지 8년 차에 이른 한국의 <조씨 고아, 복수의 씨앗>은 복수의 정도에 대해 의문점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현대 이전의 <조씨 고아>와 차이점을 보인다. 그리고 과거의 <조씨 고아>와 달리 복수의 정도에 대해 의문점을 제기하기 위해 <조씨 고아, 복수의 씨앗>은 독특한 무대 장치를 준비해놓는다. 바로 묵자라는 존재이다.
<조씨 고아, 복수의 씨앗>의 서사는 갈등의 시작과 복수의 다짐을 보여주는 전반부와 복수의 과정과 끝을 보여주는 후반부로 나뉜다. 이중 춘추전국시대 진(晉)나라의 재상 조순이 장군 도안고의 계략으로 9족이 멸족되는 비극을 맞이하는 전반부는 처절하다. 문신 조순과 무신 도안고의 갈등은 흔히 보는 궁중 암투와 다름 없다. 하지만 조순을 죽이기 위해 암살자 서예를 고용하고 양의 심장을 숨긴 조순의 인형으로 서융의 상서로운 개 신오를 길들이는 모습은 조순을 향한 도안고의 분노가 비정상적으로 느껴져 섬뜩하기만 하다. 전쟁터를 누비며 장군의 자리에 오른 자신과 다르게 조정에서 입이나 놀려 편하게 재상이 된 조순에게 도안고가 일종의 열패감을 느끼는 것으로 도안고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순을 향한 도안고의 분노는 열패감만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모른다는, 압축된 무대 위 시간 속에서 열패감을 넘어 권력을 향한 맹목적인 집착까지 더해진 도안고의 분노는 이해할 수 없어 섬뜩하기만 하다. 심지어 진 영공을 속여(?) 조순을 시작으로 조씨 가문의 9족을 모두 죽이고 심지어 영공의 명이라 속여 조순의 아들이자 부마인 조삭에게는 3가지 다른 방법으로 스스로를 자결하게 만들 때 도안고의 분노는 극적이면서 현실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유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은 채 맹목적으로 타인을 혐오하는 것. 맹목적으로 자신의 삶만을 지향해 타인의 안위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 슬픈 일이나 현재 우리 주변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인간 군상 아닌가.
이러한 도안고의 분노가 단순한 말과 행동을 넘어설 때 <조씨 고아, 복수의 씨앗>의 독특한 무대 장치인 묵자가 나타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점은 무대 장치 묵자가 무대 위 현실과 현실의 관객 사이에 위치한 중간자라는 점이다. 공연이 시작하면 부채를 든 검은 옷의 인간인 묵자가 무대 위를 날아다닌다. 무대 위 상황에 따라 다양한 역할을 대신하는 듯한 묵자의 모습은 무대 위 현실을 채우는 역할만 하는 듯하다. 하지만 조순을 죽이기 위해 갖가지 계략을 준비하는 도안고의 행적, 명망만 높을 뿐만 아니라 덕까지 지녀 뽕나무 밑에 쓰러진 장사 영첩에게 음식을 베풀고 감사 인사를 듣지 못했어도 허허 웃는 조순의 행적, 조순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감사하고 늘그막에 자식을 얻어 기뻐하며 조순의 손자 소식에도 기뻐하는 정영 부부의 행적 등 묵자는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목격하고 있다. 그렇다면 단순히 보이지 않는 어떤 소도구나 대도구를 대신하는 역할이라 할 수 없다. 오히려 무대 위 현실에 속한 것도, 현실의 관객에 속한 것도 아닌 중간자, 즉 무대와 현실을 구분하면서도 구분하지 않으면서 묵자는 처절한 갈등과 복수의 시작이 꿈의 시작임을 암시하는 것이라 봐야 한다. 나비와 자신을 구분하지 못해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 장자의 호접지몽. 묵자는 <조씨 고아, 복수의 씨앗>에서 관객에게 선사하는 나비인 것이다.
<조씨 고아, 복수의 씨앗>에서 묵자가 독특한 이유는 단순히 나비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 아니다. 무대와 관객 사이 중간자인 묵자는 사진기라는 장치로도 작동한다. 부채를 들고 있는 묵자가 부채를 펼치는 순간을 보자. 무대 위 현실과 무관하다는 듯 날아다니는 묵자는 조씨 고아와 관련된 이들이 죽을 때 그 순간 부채를 펼쳐 관객들로부터 그 순간을 가린다. 조순의 목이 잘리는 순간. 조삭이 단검으로 자살하는 순간. 조삭의 아내이자 조씨 고아의 어미인 공주가 목을 매 자살하는 순간. 조씨 고아를 살리기 위해 자신들의 아들을 죽인 남편 정영을 원망하면서도 반드시 복수에 성공하라는 말과 함께 정영의 아내가 칼로 목을 그어 자살하는 순간. 도안고를 향해 결코 편치 않으리라는 저주, 반드시 꼭 아이를 살려 복수하도록 하라는 저주, 우리 아이의 목숨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복수에 성공하라는 저주 등을 남기고 죽어가는 인물들의 마지막 순간을 묵자는 부채로 가린다.
모함에 대한 억울함, 복수를 위해서 아이를 살려야 한다는 억울함, 남의 아이를 위해 자신의 아이를 죽여야 한다는 억울함 등이 저주와 피로 흩뿌려지는 마지막 순간을 가리는 묵자의 부채는 관객에 대한 배려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부채를 펼침으로써 묵자는 관객에게 그 순간을 각인시킨다. 뎅겅 하는 소리와 함께 공중으로 떠오르며 삶의 마지막 한숨을 내뱉었을 조순의 몸. 아들의 이름을 고아라 짓고 반드시 가문의 복수를 해줄 것을 바라는 마음으로 기꺼이 심장에 단검을 박아 피흘렸을 조삭의 몸.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은혜를 입은 정영에게 아들 고아를 맡기며 목을 매어 길게 혀를 내밀었을 공주의 몸. 도안고의 명으로 막 태어난 조씨 고아가 궁을 빠져나가게 둬서는 안 되나 자신이 입은 은혜와 의를 위해서 조씨 고아를 숨긴 정영을 못 본 채 하고 보내준 후 스스로 목을 베어 두동강이 났을 한궐의 몸. 조순과의 우정을 생각하며 정영을 대신해 조씨 고아를 숨겼다는 누명을 기꺼이 감수해 모진 고문을 받고 아이를 땅에 패대기쳐 죽이는 도안고를 저주하며 땅에 3번 찧어 머리가 터졌을 공손저구의 몸. 자신에게 제발 살아달라며 구걸하는 정영을 안타까워 하면서도 용서할 수 없다는 비릿한 웃음을 남기며 피를 흘렸을 정영의 아내의 몸. 이 모든 죽음의 순간은 착 하며 펼쳐지는 소리 이후 순간 시야를 가리는 부채라는 카메라로 관객들에게 각인된다. 관객을 배려하는 것인지 배려하지 않는 것인지. 이 애매모호한 묵자의 부채로 <조씨 고아, 복수의 씨앗>은 과거의 <조씨 고아>처럼 단순히 복수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애매모호함을 남긴다.
하지만 그러한 애매모호함은 전반부까지만 봐서는 관객에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관객에게 전반부는 복수의 당위성을 느끼게 한다. 묵자라는 나비가 날아다니며 꿈이라고 말한 무대의 현실은 꿈이지만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꿈이 된다. 전반부에 관객들은 열패감, 권력욕 등 어떠한 이유인지는 모르나 결국 본인을 위해서 300명의 조씨 일가가 모두 죽이는 도안고에게서 비열함을, 그 와중에 어떻게든 아이를 살려 가문을 잇고 끝내는 도안고에게 복수해주기를 바라며 아이를 살리는 조씨 일가에게서 처절함을 느낀다. 분명 죽음의 순간을 보지 못했으나 보게 된 상황에서 관객은 끓어오르는 억울함과 안타까움을 해결할 수 없어 그저 눈물을 흘릴 따름이다. 감정이 이입됐지만 온전하지 못한 카타르시스로 오히려 관객에게 공연의 전반부는 잊어도 상관 없는 꿈이 아니라 잊어서는 안 되는 꿈으로 남는다. 조씨 고아라 착각하며 정영의 아이를 3번 땅에 패대기쳐 죽인 도안고가 자신의 아들이 죽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고 넋이 나간 정영에게 말한다. "웃어, 정영. 웃으라고!" 관객은 요구한다. 우리가 웃을 수 있게 해달라고! 잊을 수 없는 꿈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달라고! 어서 저 끔찍하고 비열한 도안고의 죽음을 보여달라고! 복수의 사슬이 무대를 넘어 관객에게까지 얽힌다.
2. 잊었는가, 단장의 비극적 순간을 : 호접지몽
이제 관객은 후반부에서 자신들이 느낀 억울함과 안타까움 등의 감정을 시원하게 풀어줄 웃음의 사건, 그러니까 조씨 고아가 도안고를 죽여 복수에 성공하는 이야기를 기대할 것이다. 하지만 후반부에 대해 이야기 하기 전에 잠시 <조씨 고아, 복수의 씨앗>에서 복수의 주체가 누구인지 살펴보자. 제목만 보면 복수의 주체는 조씨 고아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기였기에 복수를 위한 어떠한 갈등도 겪지 않은 조씨 고아는 경험을 할 수 없는 객체로서 무대 위를 떠다녔을 뿐이다. 조씨 고아가 객체로 무대 위를 떠다니는 동안 그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한 것은 조삭, 공주 부부이고 이를 이어 받은 것은 정영과 공손저구였으며 마지막까지 유지를 이어가는 것은 정영이다. 전반부에서 조순과 만나 늘그막에 아들이 곧 태어난다고 정영이 말하는 순간 서사적으로 복수의 주체는 정영으로 결정난 것이나 다름없다. 비슷한 시기에 아들을 낳는 조삭, 공주 부부와 정영 부부. 두 아들이 생사의 경계에서 운명을 달리 하게 되는 것은 서사적으로 당연지사이다. 즉, 전반부에서 관객들이 느낀 억울함과 안타까움 등의 감정은 조씨 일가 혹은 홀로 남겨진 조씨 고아를 향한 것이 아니다. 도안고의 계략에 조순이 참수되는 것은 조씨 고아가 복수를 해야 하는 당위성의 시작이 아니라 정영이 복수를 해야 하는 당위성의 시작인 것이다.
공주가 목을 매다는 것을 보는 것을 시작으로 정영은 조씨 고아를 살려 복수를 해야 한다는 유지를 잇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단순히 유지를 잇는 것이 아니라 조씨 고아를 살리는 것이 자신의 복수를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정영은 도안고의 빈객으로 20년을 살아가며 조씨 고아의 친부인 척 살아간다. 도안고가 양자로 삼은 조씨 고아가 성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에게서 문을, 도안고에게서 무를 배우며 문무를 모두 겸비한 성인으로 자랄 때까지 정영은 자신의 억울함을 곱씹으며 살아간다. 와신상담.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지나도 늦지 않는다고 했지만 무려 20년이다. 마흔 다섯에서 예순 다섯이 되는 동안 머리만이 아니라 잊을 수 없는 억울함으로 얼굴까지 희어질 정도로 억울함을 쌓고 쌓아온 정영의 복수는 화려할 것만 같다. 조씨 고아에게 과거의 사실을 말하고 이를 알게 된 조씨 고아가 도안고를 죽여 후련하게 자식과 아내의 무덤으로 가 후련하게 울고 웃을 정영. 너무나 뻔하지만 그러한 후련함을 원하는 관객들은 정영의 복수가 어서 화려하게 시작되길 기다린다. 하지만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이 복수극의 주체는 조씨 고아가 아니라 정영이라는 사실이다.
애초에 이 복수극은 절대 화려할 수 없다. 복수의 주체가 정영에게서 조씨 고아로 넘어가는 순간 이는 정영의 억울함이 조씨 고아에게 이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조씨 고아는 정영의 억울함을 이어 받을 자격이 없다. 공연 전체에서 전반부 동안 조씨 고아는 객체로서 존재했으나 정영은 주체로서 모든 갈등의 순간을 몸으로 겪어야 했다. 객체인 조씨 고아는 정영과 달리 경험할 수 없었기에 억울하다는 감정을 쌓을 수 없으며 20년의 세월을 경험하는 동안에는 억울하다가 아니라 도안고에 대해 감사하다는 감정을 쌓아왔다. 그는 조씨의 육체를 이었으나 도씨의 정신을 담고 있다. 조씨 고아는 조씨가 아닌 도씨이기에 20년 전의 과거를 정영에게 들었을 때도 바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오히려 과거가 사실인지를 묻고 제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자신을 납득시켜달라고 정영에게 요구한다. 당연하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조씨라는 자각이지 정영의 억울함이 아니다. 심지어 그 자각조차도 조씨 고아는 정영이 없다면 스스로 할 수 없다. <조씨 고아, 복수의 씨앗>에서 복수의 씨앗은 사실 조씨 고아가 아니라 정영인 것이다. 그렇기에 조씨 고아가 보여줄 복수극은 화려할 수 없다. 복수극이 화려할수록 정영의 주체성은 조씨 고아로 넘어가고 그 과정에서 정영의 억울함은 조씨 고아의 억울함으로 변질되어 텅빈 감정이 될 것이니 말이다.
심지어 조씨 고아가 복수를 마음 먹는 과정도 복수를 달성하는 과정도 압축적이다. 20년의 시간 동안 쌓인 감사함의 감정은 천륜을 부르짖으며 깨어나라는 정영의 꾸짖음과 자신의 팔을 잘라버리는 격한 정영의 해동으로 순식간에 복수심으로 뒤바뀐다. 조씨 고아가 정영에게서 과거의 이야기를 듣기 전 보여준 모습은 도안고에게 배운 무술을 연습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모습이다. 여기서 조씨 고아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하는 모습을 찾기는 어렵다. 즉, 조씨 고아가 2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복수심을 갖기까지의 과정은 앞서 조순을 향해 도안고가 열패감을 뛰어넘는 분노를 갖기까지의 과정처럼 압축되어 있어 이해하기 어렵다. 조씨 고아가 2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각성하는 계기가 천륜을 기반으로 한 정영의 꾸짖음과 흘러내리는 정영의 피라는 사실은 단순히 놓고 보면 그저 흘러 지나가는 말과 지나치게 격정적이라 오히려 거부감이 드는 행동으로 치부해도 이상하지 않다. 정체성을 고민하고 있었구나 정도의 이해의 기반을 인위적으로 가져야 겨우 조씨 고아의 각성을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뒤이어 조씨라는 자각을 가진 조씨 고아가 도안고에게 복수하는 과정도 화려하지 않다. 그저 영공에게 자신이 조씨라는 사실을 알려 도안고에 대한 복수를 허락 받자 바로 도안고를 찾아가 제압해 체포할 뿐이다. 심지어 복수극을 화려하게 치장해줄 조명이나 음향 등은 간소하다. 마치 조씨 고아의 복수극이 이러이러했다는 단편적인 사서의 기록을 그저 있는 그대로 무색무취하게 표현한 것처럼 느껴진다. 무대 뒤 장막을 가로지르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조씨 고아와 도안고의 모습은 화려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단촐하고 허무하게 느껴진다. 오히려 복수극이라는 놀이를 하는 어린 아이들처럼 보일 정도이다. 심지어 붙잡힌 도안고는 정영에게 그깟 복수를 위해 20년이란 세월을 허비했다는 비웃음까지 듣는다. 앞서 격렬하게 하지만 탄탄하게 쌓여진 억울함의 감정은 점점 너무나 허무하게 무너지는 듯하다. 하다 못해 그 복수의 끝이라도 화려했다면 조금은 웃을 수 있었을까? 뒤이어 조씨 고아의 복수를 치하하는 진 영공은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기력이 쇠한 늙은이라 위엄이 없다. 조씨 고아와 정영을 구분하지도, 두 사람의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지도 못하는 영공의 초라한 모습은 조씨 고아의 복수를 더욱 비참하게 보이도록 한다.
그러한 비참함 속에서 복수에 성공했음에도 후련하지 않은 채 엎드려 있는 정영에게 선택의 순간이 온다. 조씨 일가 9족을 멸한 도안고처럼 도씨 일가 9족을 멸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후환을 없애라는 영공의 명. 순간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멈칫한 정영은 영공에게 도안고의 가문을 정말 그렇게 처리할 것이냐고 묻는다. 당연히 그렇게 할 것이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고 묻는 영공. 그런 영공에게 정영은 뭔가를 말하려다 그만둔다. 전반부의 조씨 일가 9족의 죽음이 순식간에 결정된 것처럼 도안고의 가문 9족의 죽음도 그렇게 확정된다. 한 가문 멸문이 확정되었음에도 영공은 아무렇지 않게 복수에 성공하고 가문을 일으킨 조씨 고아를 위한 연회를 열자고 한다.복수가 끝나며 조씨 고아에서 무라는 이름과 과거 조씨 일가의 권력과 재산을 모두 받은 조무가 연회에 함께 가자고 하며 정영에게 말한다. "웃어요, 아버지. 웃으라고!"
아! 어째서 아무도 인사를 받지 않습니까? 어째서 아무도 절을 받지 않습니까? 도안고와 똑같이 자신에게 웃으라는 조무의 말 뒤로 정영에게 20년 전 인연들이 다가온다. 조순, 조삭, 공주, 한궐, 자신의 아내, 공손저구, 서예, 영첩 등. 홀로 20년을 버티며 외로웠던 정영의 눈앞에 자신과 함께 복수의 성공을 기뻐할 과거의 인연들이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그들 중 아무도 정영을 보지 않는다. 다가간 정영에게 고생했다고 손을 내밀지 않는다. 절을 하며 엎드리는 정영을 지나치고 뻗어오는 정영의 손을 무시한다. 압축되고 화려하지 않은 복수의 과정을 겪은 관객에게 경종이 울린다. 부채의 카메라로 찍힌 순간들. 복수의 당위성을 인정하지만 동시에 복수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하는 그 순간들의 끔찍함을 잊었느냐는 경종이다. 어째서 도안고의 가문을 용서해달라고 간언하지 않았느냐는 경종이다. 어째서 화려한 복수극을 기대했느냐는 경종이다. 단장지애(斷腸之哀)의 사슬이 이어지도록 한 정영의 선택에 대한 가장 커다란 벌이다. 동시에 정영의 복수가 그리고 조씨 고아의 복수가 화려하길 바라며 웃길 바란 관객을 향한 벌이다.
이 세상은 꼭두각시의 무대 / 북소리 피리소리에 맞추어 놀다보면 어느새 한바탕의 짧은 꿈 / 갑자기 고개를 돌려 보면 어느 새 늙었네 이 이야기를 거울 삼아 / 알아서 잘들 분별하시기를 이런 우환을 만들지도 / 당하지도 마시고 부디 평화롭기만을 금방이구나 인생은, 그저 좋게만 사시다 가시기를
인연의 유령들을 본 정영이 자신의 선택에 후회할 때 묵자가 나비와 함께 날아오며 노래한다. 복수라는 꼭두각시 놀음을 위해 북소리, 피리소리에 맞춰 한바탕 칼춤을 추고 나니 어느새 세월은 20년이 흘러 죽음을 앞두고 있다. 무엇을 위한 삶이었는가? 분명 복수는 해야 했지만 마지막에 한 자신의 선택은 정말 복수였는가? 똑같이 되갚아주었음에도 후련하지 않음은 왜인가? 묵자의 노래로 보면 애초에 복수까지 해야 할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잘 분별하여 수많은 갈등을 피한다는 것도, 복수를 해야 하는 순간에도 어디까지를 복수라고 할 수 있을지 잘 분별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다만 단 한 가지는 확실한 듯하다. 그저 다른 사람이 자신과 동등한 사람이라는 인(仁)과 그러한 동등한 사람을 지키겠다는 의(義)를 잊지 않는 것. 인의를 잊은 순간 갈등은 복수의 사슬로 이어지고 복수의 끝은 더욱 허망할 것이다. 애초에 복수 자체도 이미 허망한 것이겠지만 어쩌겠는가, 우리는 모두 억울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그런 억울한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묵자의 나비만 텅빈 무대에 남아있다.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도록 잊지 말아야 할 꿈을 다시 상기시킨다. 인의를 잊어 허망한 삶을 살지 말라고 말하는 듯하다.
결국 전반부에서 나비로서 날아다니는 묵자, 애매모호하게 느껴지는 묵자의 부채는 복수의 주체인 정영의 허망하기만한 복수극의 후반부와 결합되어 복수의 당위성과 인의를 잊은 복수의 춘몽을 모두 느끼게 한다. <조씨 고아, 복수의 씨앗>은 무대 위 현실과 관객의 현실을 묵자라는 중간자로 구분하는 듯하면서도 강하게 이어놓는다. 복수의 주체였으나 정작 복수의 대상에게조차도 삶을 허비했다는 비웃음을 들은 정영의 모습은 복수의 허망함만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수를 할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과 인간의 가련함을 느끼게 한다. 어쩌겠는가. 복수 자체가 허망하다고 하지만 이미 당한 이에게 남은 것은 복수이며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억울함만이 남아있는데. 그래서 도안고에게 똑같이 9족의 죽음이라는 멸문지화를 선사한 정영의 선택은 오히려 비웃음보다 더욱 짙은 허망함을 안긴다. 억울함을 풀기 위한 과정이 사실은 억울함을 안긴 이와 똑같은 이가 되어 가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영공의 질문에 머뭇거리는 정영의 모습이 중요하게 다가온다. 저 순간에 인의를 잊지 않았다면 조금은 괜찮지 않았을까? 허망한 복수를 하더라도 조금의 위로는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은혜를 입었다는 이유로 자신의 아들을 대신 죽게 해야 하는 어처구니 없음. 그럼에도 자신이 아니면 조씨 고아를 살릴 수 없다는 안타까움. 그럼에도 자신의 아들이 도안고의 손에 직접 죽는 것을 눈으로 봐야 하는 억울함. 자신의 아내마저도 눈앞에서 자신을 저주하며 자살하는 것을 봐야 하는 기가 막힘. 다 적지 못할 정도로 정영이 느꼈을 억울한 감정들은 다양하다. 정영만이 아니라 조순을 죽이려는 도안고처럼, 20년의 감사함에서 복수심을 불태운 조씨 고아처럼 어떠한 억울한 감정들이 우리 사이를 오고가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처럼 세상에서 우리가 느낄 억울한 감정들은 다양하다. 그 감정을 모르는 채 할 수는 없으니 복수도 모르는 채 할 수는 없다. 복수가 허망하게 느껴질지라도 혹은 복수가 허망할지라도 풀어지질 않을 한을 그냥 넘긴다면 한을 품은 이의 삶을 누가 어떻게 위로해줄 수 있겠는가. 적어도 복수의 끝에서 인의를 잊지 않고 멈출 수 있다면 어쩌면 복수는 허망할지라도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애초에, 아주 처음 우리가 서로를 마주한 순간 인의의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려고 하며 인의를 잊지 않으려 한다면 춘몽 자체를 꾸지 않을 테지. 그러나 우리는 가련한 억울한 이들 아닌가. 그저 마지막 순간에라도 춘몽에서 깨기 위해인의를 잊지 않으려 노력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