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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Nov 19. 2021

기계의 세계에 저항하는 목적의 영웅들(1)

평촌 CGV. <이터널스>.

신에 대해서 논쟁할 때 자유의지는 항상 주요한 논쟁 소재로 등장한다. "신이 전지전능하게 존재한다면 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줘 완벽한 세계를 창조하지 않았느냐?"는 것으로 대표되는 이 논쟁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그만큼 전지전능한 신의 존재마저 흔들리게 할 정도로 위험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사실 생각해보면 정말 그렇다. 전지전능한 신의 입장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너무나 많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자유의지의 모든 가능성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애초에 신은 전지전능하지 않고 나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전지전능함에도 자유의지의 가능성에 따른 악을 해결하지 않는다면 대체 무엇때문에 세계와 생명을 창조했는지가 문제다. 전자라면 신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기원은 다른 곳에서 찾으면 그만이지만 후자라면 문제다. 신이 존재한다는 것인데 어떤 목적에서 세계를 자유의지의 가능성 속에서 이토록 혼란하게 만들었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신의 존재를 개념의 차원에서라도 이해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기계론적 세계관과 목적론적 세계관이다.


기계론적 세계관은 이 혼란해 보이는 세계가 이미 완벽한 시스템에 의해 완벽하게 돌아가고 있는 세계라고 보는 관점이다.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인간은 그저 시스템의 톱니바퀴다. 뭘 하든 이미 시스템의 프로세스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자유의지조차도 그저 시스템의 일부로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가 아니라 허상일 뿐이다. 반면 목적론적 세계관은 혼란해 보이는 세계가 사실 어떤 목적을 향해 끊임없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신이라는 존재에 의해 한계가 정해져 있으나 세계는 한계 내에서 끊임없이 다양한 변화를 스스로 시작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자신의 자유의지를 통해 다양한 변화를 스스로 시작할 수 있으며 목적을 향해 끝없이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다. 이러한 설명에서 볼 때 두 세계관의 충돌은 필연이며 영화 <이터널스>는 두 세계관의 충돌을 제대로 그리고 있다. 


최근 개봉한 <이터널스>가 공개된 이후 한 마음 한 뜻으로 "마블 유니버스의 페이즈4가 과연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냐?"는 걱정이 팬들 사이에서 제기되고 있다. 타노스의 손가락 튕김 사태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를 중심으로 마블 유니버스를 지탱한 기존 히어로들이 하나 둘 퇴장한 상태다. 그런 가운데 샹치와 이번에 등장한 이터널스가 이전 마블 유니버스의 서사에 제대로 녹아들었는지에 대한 회의와 대체 마블이 앞으로 무엇을 보여주려고 하는지 알기 어렵기 때문인 듯하다. 특히나 타노스라는 거대한 적이 사라진 가운데 마블 히어로들과 대립하면서 마블 유니버스 전체 주제를 관통하는 악의 세력이 부재해 히어로들이 붕뜬 것처럼 느껴진다. 멀티 유니버스에 대한 기대감도 사그라드는 것이 다른 유니버스의 영웅들이 나타나는 건 또다른 볼거리로 즐겁지만 그 모든 영웅들이 함께 맞서야 하는 악의 세력은 아직도 불분명하다. 분명 히 같은 세계관을 유지하고 있는 듯하지만 맞서야 하는 악의 세력이 부재해 흐름상 통합되고 있지 못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일명 인피니티 사가라는 페이즈1~3의 마블 유니버스와 샹치와 이터널스를 시작으로 하는 페이즈4 이후 마블 유니버스는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에서 세계관을 형성하고 있다. 페이즈1~3은 타노스에게 대항하고 승리하는 전체 과정을 통해서 주제를 드러내고 완성했다면 페이즈4와 그 이후 페이즈는 페이즈1~3에서 드러난 주제를 바로 이어가면서도 한 차원 더 높은 차원에서 주제를 완성해야 해 어쩌면 페이즈1~3보다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 그렇다면 마블 유니버스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무엇인가? "I'm inevitable."이라는 타노스의 대사와 그에 맞서는 "And I am Iron Man."이라는 아이언맨의 대사에서도 바로 알 수 있듯 마블 유니버스는 기계의 세계에 저항하는 목적의 영웅들을 통해 인간에게 무한한 가능성이 내재해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타노스처럼 시작과 끝이 당연한 기계의 세계에 속한 필연적인 존재와 아이언맨처럼 필연에 저항해 미래에 있을 변화의 가능성을 지키려한 목적의 세계에 속한 히어로들의 갈등은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깨닫게 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이터널스>도 기계의 세계에 저항하는 목적의 영웅들을 통해 인간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터널스에서 기계의 세계는 창조주인 셀레스티얼 '아리솀'으로 대표된다. 우주에서 최초로 태양을 만들어 생명이 전 우주에서 번성할 수 있게 한 아리솀에게 가장 중요한 목표는 생명의 순환이다. 그에게 있어서 70억 인구와 그 밖의 여러 생명체가 살고 있는 지구의 파괴는 다음 대 생명을 탄생시킬 셀레스티얼 티아무트가 태어나는 일 즉, 이머전스의 과정일 뿐이다. 아리솀이 이터널스에게 계속해서 지구의 생명체와 인류에 감정을 갖지 말라고 하는 것도 너무나 당연하다. 기계의 세계에서 감정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시스템은 아무런 이상 없이 돌아가야 하며 시스템에 방해될 수 있는 존재는 배제할 뿐이다. 입력이 있으면 출력하는 컴퓨터처럼 아리솀은 생명의 순환을 유지하는 시스템 관리자인 것이다. 어쩌면 그에게 감정은 시스템을 망가뜨리는 바이러스일 지도 모르겠다.

그에 반해 이터널스는 고도로 발달하고 엄청난 능력을 갖고 있는 인공지능(?)이지만 동시에 자유의지를 갖고 있는 인간적 존재이다. 이터널스 이전에 행성에 있는 생명체들을 관리하고 셀레스티얼의 탄생을 도운 데비안츠는 감성만 있는 상위 포식자였던 것과 달리 이터널스는 감성과 이성이 있어 타 생명체를 인지하고 이해할 수 있다. 이들에게 데비안츠를 제외하고 다른 어떤 위협에서 인간을 돕지 말라는 아리솀의 명령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아리솀의 명령에 의심을 갖지 않으려고 한 이카리스조차도 세르시를 사랑해 인간을 이해하려고 했다. 그럼에도 이카리스가 인간을 이해하고 사랑하지 않게 된 것은 스스로가 인식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다잡았기 때문이다. 즉, 자신들이 더 뛰어난 존재이기에 이터널스는 인간과 신-인간이라는 관계를 맺어도 결국 비슷한 위치의 타 존재자로서 소통하게 된다.


실제로 이터널스는 기원전부터 계속 인간들을 수호하되 인간들과 비슷한 위치에서 인간의 곁에 있는다. 스프라이트는 환상을 통해 인간에게 꿈을 심어주며 더 높은 가능성이 있는 존재라 말하고 킨고는 인간들 곁에서 함께 술을 마신다. 마카리는 인간들과 물물교환을 하려고 세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수집하고 드루이그는 인간의 모습을 한심하게 생각하면서도 누구보다 그들을 깊이 사랑해 수백명을 이끌고 정글 깊은 곳에서 외부와 단절된 채 살아간다. 하지만 아리솀의 모습은 조금 다르다. 티아무트의 이머전스를 방해한 이터널스를 벌하는 그의 모습은 절차에 따라 움직이는 듯하다. 자신을 배신한 이터널스들에게 바로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확인한 후 다시 심판하러 돌아올 것이라 말한다. 여기에는 자신의 이머전스를 포기하고 인간을 위해 세르시에게 스스로의 몸을 암석으로 바꾸도록 내버려 둔 티아무트의 영향도 있는 듯하다. 즉, 아리솀은 감정적으로 이터널스를 벌하려 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태어날 티아무트의 결정을 존중하면서도 배신한 이터널스들을 벌하는 것이 당연한 절차이기에 벌하는 기계 세계의 존재인 것이다. 이렇게만 보면 <이터널스>는 주제의식을 끝까지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잘 표현한 영화이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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