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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Nov 27. 2021

관계가 체질이라는 우리

영등포 CGV. 장르만 로맨스.

현대 사회는 관계에 목마른 사회이다. SNS나 유튜브 등 먼 세상 일까지 눈과 귀로 전달받으면서 좋은 일보다 나쁜 일을 더 많이 보는 사회다. 그 과정에서 인류애는 하루가 다르게 나락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그럴수록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찾으며 사회에서 자신의 영역을 지키려고 한다. 심지어 인류애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일들을 가득 보여주는 SNS나 유튜브 등에서도 비슷한 사람을 찾는다. 나락으로 떨어진 인류애는 오직 인류를 통해서만 회복할 수 있나 보다. 물론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라 해도 결국 다른 사람이기에 겉만 로맨스지 만남과 헤어짐 사이에는 갖가지 사건 사고가 서스펜스, 스릴러, 공포, 멜로 등 다양한 장르로 펼쳐진다. 그럼에도 힘든 상황에서 타인과 관계를 맺지 않고는 현대인은 살 수 없다. 현대인에게 관계는 체질이기에 사람마다 다르지만 절대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이다.


영화 <장르만 로맨스>는 겉만 로맨스지 속은 온갖 장르로 점철된 관계에서 체질이기에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삶을 조명하며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혼해놓고도 이상야릇한 감정이 남아있는 부부, 첫 연애에 실패한 뒤 이혼한 부모님의 바람 직전 장면을 목격한 자식, 이성애자 중년 남성을 사랑하는 젊은 게이 등 어쩌면 어딘가에 있을 지 모르는 일상의 관계는 겉만 보면 가족이자 사랑이 넘칠 듯하다. 하지만 실제로는 온갖 책임, 중압감, 부담스러움으로 벗어나고 싶다. 그럼에도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다. 관계는 일상이기 때문에 벗어난다는 것은 완전히 사회에서 혼자가 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혼자가 될 지라도 관계에서 도망치고 싶은 순간이 있다. 누군가는 집안이 거지 같아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을 것이고, 누군가는 따가운 햇살과 바람에도 불구하고 인생이 더 따가울 것이다. 관계에서 오는 책임과 중압감은 언제나 인생을 피로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완전히 고립되는 것이 아닌 이상에야 언제 어디서나 관계를 맺으러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장르만 로맨스>의 모든 인물은 먼저 관계에서 도망친다. 관계가 주는 상처를 마주할 가능성은 관계가 주는 행복을 마주할 가능성보다 항상 더 많다. 관계를 맺는 상대방은 '나'와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르다는 점은 처음에야 매력적이지만 사실 이해할 수 없고 부담스러우며 언제 상처를 줄 지 알 수 없어 두려운 요소다. 그렇기에 출판사와 계약으로 작품을 써야 하는 김현은 작품이 써지지가 않아 친구이자 출판사 사장인 순모의 연락까지도 피한다. 작품이 써지지 않는 상황은 자기 혐오로 이어지고 이혼한 아내와 야릇한 분위기를 갖고 싶을 정도로 관계에 파괴적이고 회피적으로 다가서게 한다. 사춘기를 맞이한 김현의 아들 성경은 첫 연애 실패로 라면 먹는 것을 표현한 시에도 눈물이 날 정도로 감수성은 폭발하고 학교 생활은 하고 싶지 않다. 결정타로 이혼해놓고는 바람피기 직전 모습을 걸린 아빠 김현과 엄마 미애를 보고 모든 관계를 완전히 포기하고 싶어진다. 관계는 예측할 수 없는 가능성으로 부터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점에서 파괴이다.


하지만 영화의 인물들은 모두 다시 관계를 맺고 관계를 통해 상처를 치유하고 성장한다. 김현은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한 게이 유진이 그동안 쓸 수 없었던 작품을 쓰게 해주면서 유진과 공동 작업이라는 단순한 계약 관계부터 시작해 애틋함이나 그리움과 같은 인간적인 감정을 느끼는 관계로 나아간다. 모든 인간 관계를 포기한 성경은 자유분방하고 이상하지만 매력적인 이웃 정원을 만나 잊었던 연애 세포가 깨어나면서 자신의 선덕선덕한 마음을 표현한다. 김현과 성경만이 아니라 미애, 순모, 정원, 유진 모두 관계에서 도망치지만 결국 다시 관계를 맺게 된다. '나'와 다르기에 예측 불가능하고 그로 인해 부담스럽고 두려운 타인은 '나'와 다르기 때문에 감정을 표현하며 '나'를 이해하고 동일해지려고 한다. "내가 어둠을 보고 있다면 어둠도 나를 보고 있다."는 말처럼 상대방과 맺는 관계는 곧 알게 모르게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드는 과정인 것이다. 관계는 새로운 자신을 만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창조이다.


파괴이면서도 창조인 것이 관계라면 결국 관계는 예측 불가능성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예측 불가능성은 인간에게 가장 피해야 하는 것이다.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은 자신을 파괴할 위험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다가올 지 알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 가시밭길을 맘편히 걸을 수는 없지 않은가? 타인과 맺는 관계는 가시밭길 혹은 지뢰밭길이라 할 만큼 예측 불가능성으로 가득한 것이다. 그래서 더 자신과 비슷하고 닮은 사람을 찾게 된다. 하지만 관계를 지속하다 보면 끝에서는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100% 완전 '나'와 다른 누군가와 인생을 공유하는 것과 같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안고 사는 것과 같다. 이럼에도 예측 불가능성 그 자체인 관계에 고통 받으면서 돌고 돌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면 관계는 피할 수 없는 문제이다. 어쩌면 <장르만 로맨스>는 인생에서 피할 수 없으며 가까이서 보면 파괴적인 비극인 우리네 인간 관계를 잠시나마 다양한 관계를 멀리서 보도록 해 웃으며 관계가 지닌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물론 <장르만 로맨스>는 관계를 보여주는 영화지만 김현이나 아들 성경처럼 일부 인물을 중심으로 그려지다 보니 관계보다는 특정 인물 중심의 영화처럼 보일 수 있다. 특히 김현은 영화의 서사에서 중심 인물이기에 모든 관계의 중심에 해당한다. 그러다 보니 김현과 관계성이 적은 인물일수록 서사가 단편적으로 그려진다. 이는 인물의 단면을 부각해 과장하는 코미디 영화라는 점과 연결되면서 신비롭고 자유분방하며 매력적인 정원과 같은 일부 인물들은 이미지에 의존한다. 즉, 이미지를 중심으로 인물의 서사가 진행되어 인물의 정보가 이미지에 국한되어 서사가 부족해 보일 뿐만 아니라 마지막에는 너무 갑작스럽게 입장을 바꾸는 것처럼 보인다. 반대로 김현과 관계성이 높은 인물일수록 관계의 중심인 김현이 관계를 주도하기 때문에 김현에 의해 인물이 강조되는 것처럼 보인다. 유진이 특히 그러한데, 유진은 흔히 게이라는 존재자에게 갖는 이미지로 인해 젊고 예쁘게 생겼으면서도 나긋나긋한데 이는 중년 남성인 김현의 반응에 의해 더욱 부각된다.

하지만 오히려 인물의 단면을 부각해 묘사하기 때문에 인물마다 관계에서 바라는 목표도 명확하다.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장르만 로맨스>에서 목표가 명확한 단편적인 인물은 장점으로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인물의 단면을 부각한다는 것은 처음 나타나는 인물의 이미지로 인물의 전체 모습이 정해진다는 것과 같은데 영화에서는 배우들의 강점을 충분히 살려 단면만 부각한다고 해도 인물이 살아있는 인물로 느껴지게 한다. 이는 영화의 모든 배우들을 통해서 느낄 수 있지만 특히 정원 역의 이유영 배우와 유진 역의 무진성 배우를 통해 더 크게 느낄 수 있다. 이유영 배우 특유의 자유분방함과 신비로움은 정원이라는 인물을 보자마자 '이유영'이라는 이름이 떠올랐을 것 같다. 무진성 배우의 순수하고 어딘가 여린 외모와 나긋나긋한 목소리도 유진이라는 인물을 보자마자 '무진성'이라는 이름을 떠올리게 한다. 즉, <장르만 로맨스>는 흔히 말하는 이미지 캐스팅을 하면서도 각 배우들이 자신의 특징을 잘 살릴 수 있도록 연기하게 해 단점을 최대한 보완하면서 관계의 중요성이라는 주제를 끝까지 관철한다.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타인 덕분에 어려움을 이겨내기도 하고 타인 때문에 좌절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타인과 맺는 관계에는 사실상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 있다. 어쩌면 매순간 들쭉날쭉하고 변화무쌍하다는 예측 불가능성 때문에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피곤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다른 누군가와 얕게라도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것 보면 우리가 관계에서 어떤 희망을 찾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적어도 관계라는 예측 불가능성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가볍게 웃으며 관계에서 오는 피로와 좌절을 잊을 수 있는 영화는 우리에게 관계를 위한 새로운 힘이 될 것이다. 1년에 단 하루만 존재하는 우주피스(Uzupis) 공화국에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유진의 말에 어색한 미소가 아니라 환한 미소로 화답하는 김현처럼 관계 속에서 우리는 이전과 다른 '나'로 성장하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이야기는 관계에서 시작하고 그 중 갈등은 최고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그 관계의 끝에서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든 성장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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