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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Dec 28. 2021

음모론과 신사의 품격 사이 줄타기

홍대 롯데씨네마. 킹스맨 : 퍼스트 에이전트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Manners Maketh Man."이라는 콜린 퍼스의 대사는 킹스맨 시리즈를 관통하는 주제라 할 수 있다. 혈통이 아니라 누구나 매너만 있으면 킹스맨이 되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행할 수 있다는 콜린 퍼스의 대사는 가슴 한 켠에 자리잡고 있던 신사와 스파이에 대한 호기심과 상상력을 충족시킨다. 킹스맨 자체가 권력자들의 옷을 만들어주던 재단사들에 의해 설립되었다는 설정만으로도 세상을 지키는 것이 상류층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하지만 어찌 된 것이 혈통에 의해서가 아니라 누구나 세상을 지키는 킹스맨이 될 수 있다는 주제는 2편에서 크게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심지어 킹스맨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보여주는 3편 <킹스맨 : 퍼스트 에이전트>에서는 아예 인류 역사에 거대한 음모론을 제시하고 그 음모론을 상류층이 해결한다.

출처. 다음 영화

<킹스맨 : 퍼스트 에이전트>는 1차 세계대전 직전 제국주의 논리에 따라 유럽의 국가들이 식민지를 쟁탈하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아프리카 보어 전쟁에서 아내를 잃어 아들 콘라드의 안전에 집착하는 올랜도 옥스포드 공작은 자신들 상류층이 권력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속이고 죽였다는 것을 알기에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충실한 상류층이다. 그런 아버지를 아들 콘라드는 존경하지만 동시에 아버지가 자신을 성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어린애로만 여기며 감싸고 도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 영화는 올랜도 공작과 콘라드가 1차 세계대전의 직전과 직후 상황에서 두 사람의 갈등이 어떻게 풀어지는지, 세계대전을 끝내기 위해 어떤 고군분투를 거치는지, 그러한 그들의 노력이 어떻게 킹스맨 설립으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준다.


문제는 앞서 말했듯이 이 영화는 혈통에 의해서가 아니라 누구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행할 수 있는 킹스맨이 될 수 있다는 영화의 주제의식을 아예 혈통으로 다시 귀속시킨다. 올랜도 옥스포드는 분명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가장 명확히 인식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실천으로 옮길 줄도 아는 이상적인 상류층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올랜도 옥스포드를 중심으로 짜여진 <킹스맨 : 퍼스트 에이전트>는 킹스맨이 1편에서 추구했던 "Manners Maketh Man."의 정신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어쨌든 올랜도 옥스포드는 일반 평민이 아니라 영국 사회의 정통 귀족이자 최상위층 귀족이기 때문이다. 영국의 반항적인 하층민 출신임에도 누구보다 타인을 위할 줄 알기에 에그시는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이상적이면서 매력적인 킹스맨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완성형인 올랜도는 겉의 이미지는 매력적이어도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한다.

출처. 다음 영화

그렇다고 올랜도 대신 콘라드가 부각되지도 않는다. <킹스맨 : 퍼스트 에이전트>의 약점은 올랜도와 콘라드가 함께 성장하는 서사에서 자신의 성장을 완성한 콘라드가 서사 중간에 빠져버린다는 것이다. 자신을 감싸고 도는 아버지를 속이면서까지 1차 세계대전 전장의 한복판에 나아간 콘라드는 올랜도 만큼이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할 줄 알면서도 자신의 명예를 지키고 싶어하는, 패기 넘치는 젊은 상류층의 표본이다. 그런 콘라드의 성장은 잔혹한 전쟁을 몸소 체험하면서 진정한 용기란 전쟁터에서 직접 싸우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적을 깨닫고 그 적을 어떻게 이길지 알고 실천하는 것이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깨닫는 것에 맞춰져 있다. 문제는 영화에서는 이러한 콘라드의 깨달음이 콘라드의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것에 있다. 아군 스파이를 살리기 위해 총알을 뚫고 참호로 달려온 콘라드는 오해 속에서 아군에게 총알을 맞고 사망한다.

출처. 다음 영화

이렇게 사망한 콘라드는 아버지 올랜도의 좌절과 각성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아들 콘라드의 사망은 올랜도에게 아들이 전쟁을 알지 못하게 해달라는 아내의 유언을 지키지 못함과 동시에 아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로 이어진다. 나아가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1차 세계대전이라는 비극을 해결하기 위해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스스로를 희생한 콘라드의 모습은 올랜도에게 나아갈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제시한다. 문제는 이러한 서사가 결국 가장 완성형에 가까운 최상위층 상류층 신사 올랜도의 성장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올랜도가 아무리 성장해 변화한다고 해도 그의 성장은 1편 에그시의 성장만큼 감흥을 주지 못한다. 올랜도는 구시대의 유물이며 킹스맨에서 추구하는 신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화에서 제시하는 음모론은 영화의 상상력에 큰 날개를 달아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혈연으로 귀속된 주제의식을 오히려 더 강화하는 모양새다. 원인을 특정하기 어려운 사건이나 현상이 발생했을 때 권력을 갖고 있는 특정 개인이나 단체가 해당 사건이나 현상을 비밀리에 공모한 것이라는 음모론은 굉장히 흥미로운 논리다. 원인과 결과가 납득되기 어려운 사건이나 현상은 명확하지 않으나 존재할 어떤 개인 혹은 단체에 의해 발생한 일이기 때문이다. 명확하지 않으나 존재할 어떤 개인 혹은 단체는 원인과 결과를 설명해주기에 안심되기도 하지만 특유의 신비로움은 여전히 두려우면서도 매혹적이다. 즉, 음모론은 특정할 수 없는 개인 혹은 단체를 제시해 무한한 대안 세계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불안감과 회의(懷疑)를 가중하지만 상상력을 자극해 매력적인 서사를 만들어내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출처. 다음 영화

그렇지만 <킹스맨 : 퍼스트 에이전트>의 음모론은 너무 부실하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모턴 대위가 라스푸틴, 레닌, 마타하리 등 인류 역사에서 위대하거나 인상 깊은 족적을 남긴 위인들을 거느린 비밀 단체의 수장이라는 설정은 일단 가능하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모턴 대위라는 인물에게 자기 조국을 핍박한 영국에 대한 복수심만 채워넣어서는 안 됐다. 영국에 대한 복수심으로 움직이는 모턴 대위는 라스푸틴, 레닌, 마타하리 등의 위인들을 사로잡을 만한 리더쉽이나 사상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가 보여주는 것은 복수심과 이를 실천으로 옮기는 행동력 뿐이다. 이러한 모턴 대위에 대한 부실한 설정은 1차 세계대전을 둘러싼 음모론을 단순히 영화에서 인류 역사의 수많은 위인들을 영화에서 사용하기 위해 대충 제시하는 편의적인 설정으로 격하시킨다. 하다 못해 인류 역사에서 제국주의로 가장 거대한 제국을 세워 수많은 국가를 식민지로 삼은 영국에 대한 인류애적 분노라면 모를까 자기 조국에 국한된 복수심은 1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사건과 비교해 무게감이 없다.


심지어 이러한 음모론에 대적하는 옥스포드 가문의 역량도 너무 편의적이다. 모턴 대위의 세력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 같은 지역에는 어김없이 옥스포드 가문의 세력 역시 함께 혹은 이미 암약해 있다. 1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사건이 유럽을 중심으로 전세계 곳곳에 영향력을 행사하다 보니 문제가 발생해 두 세력이 갈등하는 지역도 다양하게 전개되는데 오히려 이 때문에 옥스포드 가문의 조직의 체계성이 부실해보일 뿐만 아니라 "대충 그렇다고 넘어가!"라고 하는 편의성으로 보인다. "영국의 공작가니까 이정도는 가능하지!"라고 하지만 거의 전세계에 걸쳐 있는 그 역량은 체계적이지 않고 오히려 어떻게 운영되고 있나 싶을 정도로 부실한 것이다. 그나마 모턴 대위의 세력은 다양한 국가에서 권력층에 속한 위인들이 소속해 있으니 어느 정도 눈감아 줄 수 있지만 그에 대적하는 옥스포드 가문은 올랜도 옥스포드를 제외하면 집사장 폴리와 메이드 폴리를 제외하면 눈에 보이는 조직원도 없다.


편의성에 기초한 음모론 설정은 결국 올랜도라는 구시대의 인물이 성장하는 과정을 강조해 킹스맨의 1편에서부터 내려온 주제의식을 혈통에 귀속하는 것을 강화한다. 이러한 전세계적인 위기 상황을 해결하는 것은 힘을 가진 최상위층 상류층이자 완성형 신사인 올랜도만 가능하다는 듯이 말이다. 킹스맨이라는 양복점의 재단사들은 배경에 지나지 않으며 심지어 킹스맨이라는 세계 최초의 독립 정보 기관이 설립되는 것과는 사실상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저 영국 상류층 사이에서 꽤나 옷을 세련되면서도 예스럽게 만드는 실력 좋은 옷가게라 올랜도라는 정통 귀족이 애용할 뿐이다. 애시당초 누구나 신사와 킹스맨이 될 수 있다는 주제의식은 이미 사라졌고 <킹스맨 : 퍼스트 에이전트>에서는 단순히 신사라는 멋들어지고 고풍스러운 이미지로 떠돌 뿐이다.

출처. 20th Century Studios(KR) 페이스북 페이지

사실상 <킹스맨 : 퍼스트 에이전트>는 새로운 관점으로 신사라는 구시대의 유물을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아이콘으로 제시한 킹스맨 시리즈의 종말과 다름 없다. 파격적이고 신나는 1편의 액션이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신사의 이미지를 강조한 것에 반해 <킹스맨 : 퍼스트 에이전트>의 액션은 단순한 오락거리 혹은 이미지에 불과하며 영화의 주제의식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 제 살을 깎아먹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자기 살을 뒤집어서 원래 이게 자신의 진짜 모습이라고 말하는 <킹스맨 : 퍼스트 에이전트>에는 더 이상 우리가 원하는 신사의 모습이 없다. 그곳에는 어떻게 하면 더 오락성 있는 이미지를 만들 수 있는지 고민하며 음모론과 신사의 품격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구시대의 신사만 있을 뿐이다. 우리는 매너를 타고난 신사가 아니라 누구나 매너를 가질 수 있다고 말하며 스스로 신사가 되는 자를 원한다. 아무리 구시대의 신사가 멋들어져 보여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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