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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Jan 03. 2022

'나'를 향한 애정과 자기파괴 사이의 모순

용산 CGV. 티탄.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애정과 자기 파괴는 모순된 관계를 맺고 있다. 애정은 누구나 받고 싶은 것이지만 주고받는 과정에서 원하는 애정이 원하는 양만큼 정확하게 오고 가는 일은 불가능하다. 받고 싶은 애정이 항상 부족하니 더 진실되고 많은 애정에 대한 욕망이 커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욕망이 커지고 애정을 받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한다고 해도 자신이 원하는 애정을 정확하게 받는 일은 불가능하다. 자신의 노력과 자신이 원하는 애정 사이 간극이 좁아지면 다행이다. 하지만 간극이 커지기만 한다면 애정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애정을 받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가 서서히 커지기 시작한다. 애정을 받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는 스스로를 파괴하고 애정을 주는 이는 자기 파괴에 의해 더 애정을 주지 못하게 된다. 여전히 애정을 원함에도 자기 파괴로 인해 애정을 받을 수 없는 악순환이 시작되는 것이다.

출처. 다음 영화

<티탄>의 알렉시아와 뱅상도 애정과 자기 파괴의 악순환에 빠져있다. 알렉시아는 무조건적인 애정을 받고자 하는 욕망에 빠져있다. 부모에게 애정을 받고 싶었으나 부모 중 누구도 알렉시아에게 애정을 주지 않는다. 아버지는 알렉시아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무시한다. 심지어 아프다고 하는 알렉시아의 몸을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일초라도 빨리 손을 떼고 진찰을 끝내고 싶어 한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알렉시아의 관계를 알고 있음에도 둘의 관계를 중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알렉시아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진심으로 관심을 갖지도 않는다. 이들 가족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부모는 자신들의 딸 알렉시아를 무시하고 방치했으며 알렉시아는 그런 부모에게 사랑을 받고 싶었으나 사랑을 받지 못했다. 유일하게 알렉시아의 존재를 부모가 인지한 것은 교통사고로 인해 머리를 다쳐 두개골을 티타늄으로 대신하는 수술을 한 직후일 뿐이다.

출처. 다음 영화

모든 인간 관계 중 무조건에 다름없는 애정을 주는 부모에게 무시와 방치를 당한 알렉시아는 타인과 관계를 맺으면서 애정을 충족하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에서 애정을 충족한다. 인간의 심장처럼 엔진 소리를 가진 자동차는 자신을 밀어내지 않고 그저 가만히 진동할 뿐이다. 하지만 밀어내지 않는다 뿐이지 그저 진동만 하는 자동차는 알렉시아가 격정적으로 춤을 추건, 진하게 안아주건, 스틱에 자신의 온 몸을 바쳐 섹스를 하건 아무런 반응을 해주지 않는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알렉시아에게 애정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각자의 욕망에 따라 알렉시아의 몸처럼 알렉시아 자체가 아닌 알렉시아의 일부에 관심을 가지고 접근할 뿐이다. 이미 부모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알렉시아에게 진정한 애정을 나누기 위해 서로 속도를 맞춰야 하는 관계는 너무 어렵다. 욕망에 대한 답은 솟구치는 분노와 그에 따른 살인 즉, 자기 파괴이다.

출처. 다음 영화

알렉시아와 달리 뱅상은 애정을 주고자 하는 욕망에 빠져있다. 어린 시절 사랑하는 아들이 실종되면서 애정을 줄 수 있는 자식이 없는 뱅상은 부모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다. 아들의 실종은 뱅상 자신의 삶만이 아니라 아내의 삶마저도 망치면서 뱅상과 아내의 관계 즉, 부부의 관계까지 유지할 수 없게 한다. 아들의 실종은 뱅상에게 아버지로서 지위와 가장으로서 지위 즉, 애정을 주는 것으로 애정을 확인받는 욕망을 거세하는 것이다. 이렇게 거세된 욕망을 소방대 대장인 뱅상은 주변에 수많은 남성을 자신의 아들이라 여기며 애정을 주고자 하는 욕망을 최대한 충족하려고 한다. 하지만 소방대 대원들은 누구도 자신의 아들이 아니며 오히려 자신의 남성성의 상실을 일깨우는 젊은 남성이다. 남성성은 애정을 줄 수 있는 아버지와 가장이라는 지위를 위한 기본 사항이기에 뱅상은 스테로이드를 끊임없이 맞고 소방대 대원들 중 누구도 아들로서 대하지 못하며 스스로를 파괴한다.

출처. 다음 영화

이처럼 알렉시아와 뱅상은 애정을 나누고 싶으나 자기 자신을 파괴한다는 점에서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다. 더군다나 각각 애정을 받는 것과 애정을 주는 것으로 애정을 충족한다는 점에서 서로를 충족시켜주기도 한다. 자신을 없는 사람 취급하며 무시할 뿐만 아니라 아프다고 했음에도 일초라도 빨리 손을 떼고 진찰을 끝내고 싶어하는 의사인 아버지는 애정에 대한 알렉시아의 욕구에서 가장 채워져야 하는 부분이다. 아들을 잃어버리고 아내와는 이혼까지 하면서 가족을 지킴으로서 얻을 수 있는 아버지의 지위 즉, 애정을 주고자 하는 뱅상의 욕구에서 자식의 존재는 가장 채워져야 하는 부분이다. 비록 거짓에서 시작되었지만 종국에는 서로가 어떤 인간이든 그저 상대방이기 때문에 무조건에 가까운 애정을 주는 알렉시아와 뱅상의 관계는 애정을 주지 않는 타인에게 분노하고 그에 따라 살인을 저지르는 알렉시아와 마초적인 남성성을 추구하고 자식을 다시는 잃지 않기 위해 동료 소방대원을 죽이는 뱅상의 자기 파괴가 주는 잔혹함을 잊게 한다.

출처. 다음 영화

살인과 자신을 파괴하는 마초. 기존의 규범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행위이다. 자신의 존재만이 아니라 타인의 존재마저도 말살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행위는 기존의 규범을 파괴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규범은 욕망을 억압하지만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욕망의 과도한 발현을 억압하는 규범은 서로의 존재를 온전하게 바라보는 것과 각자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 모두 어렵게 한다. 이러한 규범에 대해서 살인과 자신을 파괴하는 마초는 규범을 파괴하면서 각자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행위이자 서로를 온전히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행위인 것이다. 애정과 자기 파괴처럼 애정은 타인이 '나'를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하지만 '나'의 존재는 타인에 의해 가려지는 모순을 겪는다. 즉, 알렉시아의 살인과 뱅상의 마초라는 자기 파괴 행위는 타인을 모두 말살하면서 마지막에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서로를 온전히 볼 수 있게 하는 행위이다.


애정을 바라는 것은 인간의 본능에 가까운 욕망이다. 그 욕망 중 무조건적 애정을 바라는 것은 가장 심층에 있는 욕망일 것이다. 불가능에 가까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버릴 수 없는 심층의 욕망. 그 심층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아무런 조건없이 온전히 그 자체로 받아들여야 가능하다. <티탄>은 온전히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살인과 마초라는 자기 파괴의 과정을 통해 규범을 해체하는 것으로 제시한다. 이러한 자기 파괴의 과정을 통해 달성되는 알렉시아와 뱅상의 관계가 적절한지는 논란에 여지가 있다. 하지만 그만큼 인간이 애정없이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반증일지도 모르겠다.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주고받는 애정에서 서로의 존재를 온전히 바라보기 위해 타인만이 아니라 자신을 파괴해야 하는 애정과 존재 사이 모순. <티탄>이 보여주는 우리 삶의 잔혹한 일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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