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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Jan 23. 2022

고마움으로 둘러싸인, 한 집에서 함께 사는 사람(家族)

도라마코리아. #가족모집합니다.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돌봄과 가족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혈연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것이 당연한 가족에서 돌봄이 최초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고도화 되는 가운데 혈연을 중심으로 하는 가족이 붕괴하고 있다. 임신과 출산을 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단순히 여성이 사회에 진출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회에서 돌봄이 지속적으로 항시 가능하느냐가 가장 핵심 문제다. 아이를 양육하는 시간은 법적으로만 따져도 최소 20년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 사회는 혈연에 기초한 가족을 강조하면서도 자본주의에 의해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맞벌이가 필수인 사회이다. 혈연에 의한 가족을 중심으로 부모에 의한 돌봄을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가족 내 돌봄이 거의 불가능한 사회인 것이다. 거기에 아이를 돌볼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할 수 있는 제도와 인프라도 부족하다. 이처럼 한국 사회는 임신과 출산, 혈연 중심 가족, 돌봄, 자본주의 등이 한데 얽히면서 돌봄을 항시 지속할 수 있는 환경을 위한 새로운 공동체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예를 들면 <#가족모집합니다>에시 제시한 것처럼 혈연이 아닌 고마움으로 둘러싸인 가족처럼 말이다.


<#가족모집합니다>는 제목 그대로 묵고 있는 야키소바 식당 사장님에게 신세를 갚고으면서도 함께 사는 가족을 만들고 싶은 소스케가 가족을 모집하면서 시작한다. 가족을 모집한다니... 애초에 혈연으로 형성되는 가족을 모집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소리다. 하지만 이 말도 안 되는 일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기존의 혈연 중심 가족으로는 돌봄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슌페이-하루 부자는 미도리의 사고사로 엄마가 부재하며 레이-시즈쿠 모녀는 별거를 한 상태라 아빠가 부재한 상황이다. 메이쿠-다이치 모자는 미혼녀 모자이고 쿠로사키-이츠키 부녀는 서로의 일에 집중하느라 이혼한 상태이다. 4가구 모두 어느 한 쪽이 부재한 상황에서 돌봄은 항상 위태롭다. 갑작스러운 상황이 발생했을 때 아이가 혼자 남아 있는 경우가 다반사다. 부부가 둘 다 있어도 각자가 하는 일에 집중할 경우 마찬가지로 아이는 혼자 남게 된다. 소스케의 제안은 현대 사회에서 한 가족 내의 돌봄이 불가능하다는 점과 돌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족 외 공동체로 가족을 확대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출처. TBS 홈페이지

누군가는 <#가족모집합니다>의 서사가 지나치게 이상적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쿠로사키의 말처럼 "생판 모르는 남들끼리 가족"이 된다는 것이 "천하태평한 학생이 생각할 법한 단순한 이상"과 같이 보인다. <#가족모집합니다>는 이러한 비판에 대해서 사건과 그에 따른 인물의 감정 변화를 최대한 세심하게 짜면서 다섯 가구가 하나의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을 관객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미도리의 사고사를 아들 하루가 충격을 받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게 슌페이가 말할 수 있도록. 메이쿠가 노래만이 아니라 아들 다이치와 좀더 서로의 진심을 나눌 수 있도록. 레이가 자신의 남편과 다름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이혼할 수 있도록. 쿠로사키가 일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딸 이츠키를 바라보고 다정한 아빠가 될 수 있도록. 가족이 되고자 모인 인물들의 문제를 서로 도우며 함께 해결하면서 천하태평한 학생이 생각한 단순한 이상이 현실이 되면서 생판 모르는 남들이 모여 하나의 가족이 된다. 아이들의 돌봄만이 아니라 각자가 더 발전할 수 있는 계기까지 생기는 것이다.

출처. TBS 홈페이지

이처럼 혈연으로 맺어지는 가족보다 더 가까운 가족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당연하다고 여겨진 혈연을 넘어 상대에게서 고마움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으면서 정해진 규칙을 중시한다면 누군가는 자유분방하고 기분파이다. 누군가는 속얘기를 하지 않고 누군가는 일을 벌리기만 할 뿐 처리하지 못하며 누군가는 행동과 말 모두 과묵하면서도 권위적이다. 하지만 다르다는 점은 곧 서로를 보고 배울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가족모집합니다>의 인물들은 상대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서로 다른 현실 속에서 더 좋은 상황으로 나아가기 위해 고민한다. 그 결과 타인에 의존하면서 기분파로 행동을 하게 되고 정해진 규칙에 맞게 생활하게 된다. 속얘기를 꺼내며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고 일을 벌리되 다함께 어떻게 일을 해나갈 지 의논하고 가벼우면서도 상대를 배려하는 말과 행동을 하게 된다. 서로를 보고 변화하는 과정은 서로가 상대를 인정해준다는 전제가 있기에 가능하다. 즉, <#가족모집합니다>의 인물들은 서로를 인정하는 것에서 서로 고마움을 느끼기 때문에 오히려 흔히 말하는 가족보다 더 끈끈한 가족이 될 수 있다.


다만 아쉽게도 <#가족모집합니다>는 서사의 끝까지 돌봄과 가족의 문제를 이어가지는 못한다. 드라마의 마지막에서 한 가족이었던 인물들은 함께 살았던 집을 떠나 뿔뿔이 각자 갈 길을 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인물들은 몸이 멀어졌다고 해서 마음까지 멀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언제 어디서든 항상 다시 모일 수 있는 가족으로 남아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가족모집합니다>의 인물들은 서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각자가 부족했던 부분을 상대를 통해 배우며 변화하게 되고 각자의 서사를 완성한다. 하지만 그 과정의 끝은 현실의 가족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삶을 더 충실하게 살아가는 가운데 서로를 마음 속에서 진정한 가족으로 기억한다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즉,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가족 내 돌봄 문제는 여전히 다시 문제로 남게 되고 돌봄을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형태의 가족인 고마움에 의한 가족은 반쪽짜리 실험으로 끝나는 것이다. 단순히 아이들과 어른들 모두가 서로를 가족으로 기억하는 것에 감동을 받으며 끝나기에는 여전히 문제가 남아있는 듯해 끝맛이 씁쓸하다.

출처. TBS 홈페이지

그럼에도 <#가족모집합니다>에서 제시하는 가족의 형태는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진 혈연에 의한 가족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혈연은 직관적으로 가족을 구성할 수 있지만 동시에 하나의 족쇄가 되어 가족을 유지할 수도 있다. 서로를 인정할 수 없거나 못하면서 고마움을 느낄 수 없음에도 혈연이라는 이유로 가족으로 산다면 그러한 관계를 가족이라 하기는 어렵지 않은가. 적어도 가족이라면 서로를 인정하고 돌볼 수 있어야 하고 그 가운데 고마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한 집에서 혈연이기 때문에 가족인 것이 아니라 한 집에서 고마움을 느낄 때 가족인 것이다. 그렇기에 <#가족모집합니다>의 가족은 돌봄의 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 혈연이기 때문에 가족인 것이 아니라 고마움 때문에 가족이라면 고마움을 느낄 수 있는 공동체를 함께 만들어보는 것이 현재 돌봄이 부재한 현실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되는 것이다. 특히 혈연에 의한 가족을 강조하는 한국에서 오히려 더 중요한 담론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현재만이 아니라 앞으로 더욱 가족 내 돌봄의 부재는 더욱 심화될 것이다. 당장 양극화만이 아니라 중산층도 불안정한 상태가 계속된다고 했을 때 일부 상류층을 제외하면 돌봄의 부재는 하층민만이 아니라 중산층까지 즉, 사회 전반에서 계속해서 더 심화될 것이다. 이러한 돌봄의 부재는 이미 사회의 제도와 인프라만으로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돌봄의 부재가 심화되는 속도가 제도와 인프라로 해결하는 속도보다 더 빠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돌봄이 시작하는 가족에 대해서 관점을 변화할 필요가 있다. 혈연을 넘어 서로를 배려하고 인정하면서 돌봐줄 수 있는, 그에 따라 고마움을 느낄 수 있는 가족. 이러한 가족의 모습은 봉준호 감독의 <괴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 등을 통해 이미 대안 가족에 대한 담론으로 지속적으로 제시된 바 있기도 하다. 앞으로도 돌봄을 부재하게 하고 임신과 출산을 어렵게 하는 사회적 요인들이 얼마나 빠르게 심화될 지는 알 수 없다. 너무 빠르게 심화되어 더 겉잡을 수 없기 전에 우리 주변의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혈연이 아닌 고마움을 느끼는 가족이 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한 집에서 혈연이기에 가족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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