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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Jan 19. 2022

단순한 웃음 속 직설적인 눈

대학로. 아트포레스트. 오백에삼십.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도쿄를 팔면 미국을 살 수 있다." 한창 파죽지세로 세계 경제를 주름잡던 7, 80년대 일본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반대로 땅과 집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개인이 일을 해 번 돈으로 땅과 집을 사는 것이 불가능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 때와 비슷하게 현대의 한국도 내 집 마련이 불가능하다. 내 집 마련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잠깐 사는 집조차도 전세든 월세든 매년 가격이 올라 구하는 것이 더 불가능해지고 있다. 소득 상승에 비해 물가 상승으로 소비 상승이 더 높은 현대 한국은 집까지 구하기 어려우니 인간이 살기 위해 기본적으로 갖춰져야 하는 식의주를 모두 구하기 힘든 시대임에 틀림없다. 삶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 보니 단순한 식의주만이 아니라 어려운 순간에 의지할 수 있는 이웃 혹은 친구마저도 온전히 믿기 어려운 사회가 되기까지 했다. 대학로 연극 <오백에 삼십>이 단순히 웃음을 주는, 흔한 대학로 코미디극임을 넘어 코미디극 특유의 단순하면서도 직설적인 눈으로 인해 씁쓸하기까지 한 연극인 이유이다.

<오백에 삼십>은 현대 한국 사회를 크게 2가지 측면으로 제시한다. 하나는 자본에 의해 계층을 넘어 계급 수준으로 나뉜 사회이고 다른 하나는 살아남기 위해 연대가 아닌 분열을 선택하는 하층 계급이다. 자본주의가 너무나 당연하게 된 현대 사회는 겉으로 민주주의를 표방해 누구나 평등한 기회를 가지고 기회를 잘 살려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신화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최근 개천에서 용난 경우가 있었는지 생각해보면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성공하기 위해 노력하는 행위조차도 비웃음을 살 뿐이다. 떡볶이 장사를 하며 겨우 '허덕'이고 하하호호 웃는 일보다 '흐엉'하며 우는 일이 더 많은 사회. 유일하게 인생 역전이라 여겨졌지만 깜깜한 앞날에 '배변'마냥 속에서 썩으며 쌓이는 희망. 가난하다는 이유로 수모를 당한다 해도 분노를 참으며 사람 좋게 웃으며 굽신거릴 수밖에 없다. 자기 자신을 비롯해 이웃과 가족이 정을 나누며 그나마 삶을 의탁할 수 있는 곳. 보증금 500에 월세 30인 돼지빌라는 명목상 존재하는 평등한 기회를 온 몸으로 견디며 서서히 말라가는 하층민들에게는 마지노선인 것이다.

하지만 마지노선에 잠재워져 있는 분노와 함께 사는 사람들과 나누는 정은 갑작스럽게 닥친 집주인 살해라는 위기에 무너져 내릴 뿐이다. 겉으로 보기에 집세를 가지고 협박하며 막말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집주인에게 저항하며 서로 연대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돼지빌라를 떠나면 갈 곳이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의 약점을 숨기는 척하다 몰래 경찰에게 말할 수밖에 없다. 각자의 혐의를 알려준 존재가 가짜 경찰이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 서로를 헐뜯으며 손가락질 하는 돼지빌라 입주민들의 모습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너무나 자주 보이는 모습이기도 하다. 단순히 연대와 공동체의식을 포기하는 것만이 아니라 흔히 말하는 인간다움을 버리도록 유혹하는 자본의 모습을 통해서도 분열하는 하층민의 모습도 엿보인다. 돈을 빌미로 자신과 교제를 하자는 집주인의 제안에 계속해서 흔들리는 배변의 모습은 삶에서 자본이 가지고 있는 지배력이 느껴진다. 상상해봐라. 교제만 하면 건물과 자가용을 비롯해 상상도 못했던 부(富)만이 아니라 나이 든 집주인이 죽은 뒤에는 모든 재산이 넘어오는 것을.

하지만 자신만 살기 위해 연대와 공동체의식을 포기하는 하층민들을 마냥 욕할 수는 없다. 삶을 지속할수록 지옥인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연대와 공동체의식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세상. 타의에 의해 삶이 쉽게 무너지는 하층민에게 있어 자본이 삶에 미치는 영향력은 엄청나다. 아니 현 사회에서 자본의 영향을 받지 않는 구성원은 없다. 자본의 양에 따라 상류층일수록 자의에 의해 삶을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타의에 의해 삶을 사는 사회 구성원을 지배할 수 있다. 평등한 기회라는 이름으로 그저 무한 경쟁을 강요받는 가운데 연대와 공동체의식을 유지하는 것은 삶에서 불이익의 가능성을 안고 사는 것과 같다. 경쟁인 이상 모두가 한정된 자본에 대한 경쟁자이기 때문이다. 집주인이 무거운 몸을 못 이겨 넘어졌다가 기절했던 것이 밝혀지면서 살인 사건은 해프닝으로 끝나고 서로를 헐뜯고 의심하던 상황은 일단락되지만 돼지빌라 입주민들에게는 여전히 온갖 타의로 위협받는 삶이 펼쳐져 있을 뿐이다. 연대와 공동체의식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하는, <오백의 삼십>의 사회는 너무나도 현실과 비슷해 보여 코미디극임에도 웃음이 터져나오지 못하고 씁쓸하다.

<오백의 삼십>은 코미디극이기 때문에 그려지는 인물들이 일차원적이다. '허덕', '흐엉', '배변'과 같은 인물들의 이름부터 시작해 포장마차 떡볶이 장사꾼, 국제 결혼한 베트남 여자, 사법고시 장수생, 몸을 파는 술집에 나가는 여자 등 사회 하층민이라고 하면 떠올려지는 인물들이 닥쳐오는 사건에 상상할 수 있는 반응을 보인다. 막말, 욕설, 배신, 의심 등이 상황에 따라 격하게 터져나오는 돼지빌라 입주민의 모습은 어디선가 본 것 같기에 익숙하고 우스꽝스럽게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일차원적인 인물들의 갈등에 의해 사회의 현실이 극대화되면서 관객은 단순히 우스꽝스럽게만 연극을 볼 수 없다. 가볍게 통통 튀는 일차원적인 인물들의 반응을 통해 거칠지만 묵직하게, 관객들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을 직면하면서 관객은 웃음이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씁쓸함에 끊어지게 된다. 겉으로 보기에 현실을 그려내는 양상과 깊이가 얕아보이는 코미디극이라 무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코미디극이기에 오히려 관객이 자본의 영향력이 강한 불편한 현실을 웃으며 바라볼 수 있게 하면서도 현실의 불합리를 직설적이고 묵직하게 담아낸다. 대학로 코미디극이 아직까지 사랑받는 이유이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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