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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Jan 26. 2022

전하고자 하는 말의 아름다움과 전하는 방식의 아쉬움

신촌 & 평촌 CGV. 드라이브마이카.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다른 사람에게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 돌아오는 말의 정도가 달라진다는 의미의 속담이다. 하지만 이 속담은 단순히 겉으로 상대방에게 좋은 말을 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어떤 말을 하느냐의 의미는 어떤 말을 어떻게 전달하느냐 즉, 방법까지 포함하고 있는 말이다. 좋은 말이라고 해도 전달하는 방식이 아쉬우면 좋은 의미가 퇴색할 수밖에 없다. 전달하고자 하는 말이 아름답더라도 그 말을 어떻게 전달할 지 고민하는 것은 발화자에게 있어 중요하게 고민해봐야 하는 지점이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처럼 타인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친한 친구, 사랑하는 연인, 함께 사는 가족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럼에도 타인과 살아가야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타인에게서 이해 받고자 하는 것만이 아니라 타인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맺는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 할 수 있기에 인간은 타인과 맺는 관계에서 말의 내용만이 아니라 말을 전달하는 방법까지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로 시작해 안톤 체홉의 <바냐 아저씨>로 끝나는 <드라이브 마이 카>는 인간관계의 불합리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스스로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누군지 알지도 못하며 언제 올지도 모를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모습은 언젠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작은 희망을 부여잡은 채 타인과 끝없는 관계를 맺는 인간의 모습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과 관계를 맺는 것은 곧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 할 수 있는 즉, 인간이 세계에서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이기에 포기할 수 없다. 하지만 생존을 위해서만 타인과 관계를 맺는 것은 언젠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허망할지도 모를 희망에 기대어 타인과 관계를 맺는 것과 다름아니다. 단순히 살아가기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아가는 것이 타인과 관계를 맺는 이유이다. 단순히 살기 위해서 타인과 관계를 맺는다면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을 이해해야 하는 불합리에 지칠 뿐이다. 이해를 위해서는 타인과 맺은 관계에서 받는 감각, 감정 등 다양한 요소에 자신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솔직하게 직시하고 이해해야 한다. 세계에서 타인에 의해 자신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함께 자신이 살아가기 때문이다.

출처. 다음 영화

그렇기에 <드라이브 마이 카>의 가후쿠 유스케는 서로 다른 언어를 주고받는 배우들로 완성도 높은 연극을 만들 수 있지만 아내 오토를 이해하지는 못한다. 드라마 작가인 오토가 작품 활동을 할 때마다 다른 남자와 외도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사실에 분노, 절망, 원망 등 자신이 느낀 감정과 외도를 할 때 오토는 어떤 기분인지, 외도 후 자신을 볼 때는 어떤 기분인지 등 자신이 궁금하게 여긴 것은 아내와 서로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로 억누른다. 즉, 유스케는 오토와의 관계에 의해 살아갈 뿐 오토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언어를 주고 받는 연극에서까지 온전히 소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아내와도 제대로 대화를 하지 못하는 상황. 유스케와 오토의 관계는 인간관계의 불합리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아내가 갑작스럽게 병으로 사망하면서 자신의 감정과 궁금증을 해결하지 못한 채 아내에게 애증의 감정을 갖은 채 삶을 살아가는 유스케의 모습은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기약 없는 희망에 인생을 걸어 언제 올 지 알 수 없는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모습과도 같아 보인다. 아내의 외도를 직면한 후로 자신이 겹쳐 보이는 체홉의 연극 인물인 바냐를 연기하지 못하게 된다는 점에서 유스케는 자신이 외면한 모습을 겉으로 표현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출처. 다음 영화

이처럼 기약 없는 희망 속에서 마음 깊은 곳에 묵혀둔 감정과 궁금증을 외면하고 표현하는 것도 거부하며 살아가는 유스케에게 타카츠키 코지와 와타리 미사키라는 두 거울이 등장한다. 타카츠키 코지는 유스케와 달리 자신이 느낀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궁금한 것은 반드시 해결한다. 이에 따라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코지는 오토와 외도를 한 남자로서 유스케와 갈등하면서도 동시에 유스케가 외면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로서 서사를 진행시키는 원동력이다. 유스케는 코지가 오토와 외도를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코지를 배우로서 대하는 연출로 행동하면서도 자신의 감정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유스케가 보기에 코지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솔직한 것이 아니라 감정을 제어하지 못해 제멋대로에 폭력적일 뿐이다. 하지만 자신과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코지와 대화를 하면서 아내 오토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외도를 유스케가 알고 있음에도 표현하지 않고 마음에 묵혀두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묵혀두기만 한 자신을 걱정하고 괴로워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코지라는 거울을 통해 유스케는 자신의 감정과 궁금증을 솔직하게 직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출처. 다음 영화

반대로 미사키는 감정과 궁금증을 외면한 채 살아가는 유스케처럼 자신의 감정과 궁금증을 모두 외면한 채 조용히 다른 사람의 차를 모는 기사다. 즉, 미사키는 유스케의 현재 모습을 비추는 거울로서 유스케가 감정과 궁금증을 직시할 때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도와주는 조력자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누구인지 모르고 어머니에게는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살아온 미사키에게 부모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며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떠오르는 궁금증은 누구에게도 답을 얻지 못하면서 자신을 상처 입힐 뿐이다. 타인과 맺는 관계를 극도로 표면적으로만 맺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하지만 유스케의 자동차를 몰게 되면서 미사키 역시 자신의 감정과 궁금증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자신과 비슷한 상태에 있는 유스케가 코지와 대화를 나누면서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보고 어떤 일을 겪었는지를 듣게 되면서 자신이 느낀 감정과 궁금증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미사키는 코지와 대화를 통해 아내에 대한 사실과 자신이 느낀 감정과 궁금증을 직시하게 된 유스케가 자신이 직시하게 된 것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게 된다.


코지와 미사키라는 두 거울을 통해 발생하는 유스케의 변화는 3시간이라는 러닝 타임 동안 서서히 발생하며 자동차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드러난다. 유스케에게 있어 아내 이외에는 운전대를 맡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연극 준비를 위해 연극 대사를 들으며 운전하는 습관을 들인 자동차를 미사키에게 맡기는 행위는 자신의 영역을 침범 당하는 일이다. 아내가 죽은 이후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이 자동차이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유스케는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미사키를 받아들이지 않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와도 표면적인 관계만을 맺는 미사키이기에 유스케는 오히려 편안한 마음으로 자동차를 맡길 수 있다. 단순히 극장에서 마련한 숙소에서 <바냐 아저씨> 공연을 하게 된 히로시마 극장까지 운전만을 맡기는 것을 넘어 연극 대사 녹음본을 듣는 자신의 습관을 그만두고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며 무려 2일 이상을 맡기고 먼 곳까지 운전을 부탁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의 자동차를 다른 타인에게 맡기는 것에 불안감만이 아니라 거절 의사가 명확했던 유스케의 이러한 변화는 자신의 감정과 궁금증을 속으로 묵혀뒀던 마음을 다른 누군가에게 표현하게 되는 것과 같다.

출처. 다음 영화

하지만 <드라이브 마이 카>의 서사는 경직된 기계 같다. 서사 전반에 걸쳐 인물들의 감정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차분한 영화 분위기 때문이 아니다. 영화의 인물들 개개인의 욕망이 표현되지 않고 유스케라는 인물의 변화를 위한 기능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인물 관계는 유스케를 중심으로 그릴 수 있으며 유스케에게서 멀어질수록 영화 내에서 인간이 아닌 인물로, 인물이 아닌 배경으로 남게 된다. 코지와 미사키는 유스케를 가장 가까이서 비추는 거울일 뿐 이들이 어떤 욕망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하다못해 간접적으로 두 인물의 욕망이 드러나는 경우는 없다. 코지는 유스케와 갈등하면서 유스케를 변화시키는 가장 주된 원동력일 뿐이며 미사키는 코지와 대화한 후 자신의 감정과 궁금증을 알게 된 유스케가 갑작스럽게 직시하게 된 감정과 궁금증을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바냐 아저씨> 공연의 무대 감독인 윤수와 배우인 유나는 언어를 넘어서서 인간이 서로 소통하며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할만 한다. 재니스 창, 류종의, 일본 배우들은 필요한 순간에 자기 역할만 하면 그 뒤로 계속 배경일 뿐이다. 전체 서사에서 이들이 사건에 휘말려 어떤 변화를 겪는지는 이 영화에서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출처. 다음 영화

그나마 오토와 미사키가 유일하게 욕망을 어느 정도 드러내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들이 드러내는 욕망은 오히려 경직된 기계와 같은 <드라이브 마이 카>의 경직도를 강화할 뿐이다. 우선 오토는 이미 죽은 인물이다. 아무리 오토가 유스케를 사랑하고 있으며 그를 더 진정으로 이해하고 싶어한다고 해도 이미 죽은 인물의 욕망은 산 사람에게 변화를 위한 깨달음만을 제공할 뿐이다. 나아가 오토의 욕망은 유스케가 외면하고 있는 모습을 비추는 거울의 역할을 하는 코지를 통해 유스케에게 전달된다. 애초에 유스케는 코지를 통해 변화가 촉발되기 때문에 오토가 맡게 된 깨달음의 역할은 코지를 통해 전달되는 상황으로 인해 더욱 강화된다. 미사키의 경우는 재현의 정도 문제라 할 수 있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유스케를 중심으로 서사가 진행되다 보니 유스케가 자동차를 타는 때가 아니면 미사키가 나타날 수가 없다. 또한 유스케의 감정과 깨달음이 주를 이르기 때문에 자동차 내에서 미사키를 재현하는 것은 미사키를 드러내기 위한 것보다 미사키를 경유해 유스케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이에 따라 영화의 마지막에서 스스로가 가고 싶었던 곳을 정해 자유롭게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미사키의 모습이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느껴진다. 영화 전반에서 미사키의 재현은 유스케의 재현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서사 텍스트는 어떤 한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모든 인물이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며 변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서사 텍스트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텍스트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와 합치되는 각자만의 목적을 가지고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면서 각자의 서사를 끝맺을 때 서사 텍스트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가 더욱 강화될 수 있다. <드라이브 마이 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타인에 의해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직시‧이해하고 표현하면서 타인과 함께 관계를 맺어야 한다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영화에서 대다수의 인물은 유스케라는 인물의 변화와 깨달음을 위한 기능으로 존재할 뿐이다. 인물들이 기능으로 역할을 다하면서 영화가 진행되니 힘겨운 삶에서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면서 꿋꿋이 살아가자는 <바냐 아저씨> 장면이 작위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의 서사를 다 알 것 같다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애초에 정해진 서사를 쭈욱 따라왔을 뿐이라는 느낌이다. 살아있는 인간들이 서로가 맺는 관계 속에서 각자의 욕망을 드러내고 반응하면서 변화하는 양상을 보여줬더라면 작위적이고 정해진 서사가 아니라 생동감 있는 서사에서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는 유스케를 보고 공감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출처. 다음 영화

인간관계에서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기 스스로를 직시‧이해하고 표현해야 된다는 <드라이브 마이 카>의 주제는 아름답다. 자동차라는 자신의 마음을 미사키에게 서서히 맡기게 되는 유스케와 그런 유스케를 이해하면서 자기 스스로도 변화하는 미사키는 주제에 합치하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유스케와 미사키의 변화를 극적으로 보이는 흰 눈 밭 위에서 평화롭게 있는 자동차의 모습은 <드라이브 마이 카>의 주제가 표현된 장면 중 백미라 할 것이다. 하지만 이토록 아름다운 주제가 전달되는 방식이 유스케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기능적인 인물들이 유스케의 변화를 위해 행동하면서 영화 자체는 영화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와 반대의 모습을 보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직시하고 이해하게 될 때 힘겨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타인과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과 달리 정작 영화에서는 인간이 사라져 있는 모습이니 말이다. 아름다운 말을 전달하는 것만이 아니라 말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는 아름다운 방식으로 전달할 때 보다 더 고운 말이 오고 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보는 사람 모두에게 좋은 말을 전달하려는 텍스트라면 더더욱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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