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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Feb 14. 2022

지배 당하지 말고 함께 오래 즐기는 인생

영등포 CGV. 어나더라운드.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한 잔. 두 잔. 세 잔. 술을 처음 마셨을 때 자기 주량을 대충 알아야 한다는 말에 마시기 시작한 순간 부터 잔 수를 세본 적이 있다. 어림도 없지. 취기가 올라오면서 사라지는 제정신과 함께 잔 수 세기도 어느새 의미가 없어졌다. 들려졌다 내려지는 술잔의 반복 속에서 사라진 제정신의 자리는 흔히 개소리라고 하는 의미없는 말, 취기에 따른 만용과 고성, 밀려오는 졸음 등이 채웠다. 마냥 취기와 의미 없는 시간만 계속된 것만도 아니다. 취기 속에서 예상하지 못한 총기, 감정, 시선 등이 오고 가며 평소에는 생각도 못한 행위와 그에 따른 사건이 이어진다. 술기운으로 채워진 용기로 하는 고백, 취기 속에서 떠오르는 영감으로 만들어지는 불후의 명작, 쌓이는 술병 사이에서 오고가는 대화와 새로운 관계. 좋든 나쁘든 술은 일상에 비일상의 순간을 들여오면서 일상을 전혀 다른 순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렇듯 인생의 크고 작은 변곡점을 마련하는 술과 관련해서 <어나더 라운드>는 함께 오래도록 인생을 즐기며 살아가는 방법을 논하는, 인생 예찬 영화라 할 수 있다.

출처. 다음 영화

알코올을 연료로 사용하는 <어나더 라운드>의 서사는 술자리와 같다. 막 술자리를 시작할 때는 예열이 필요하듯 마르틴, 톰뮈, 니콜라이, 페테르도 인생에서 예열이 필요하다. 고등학교 선생이지만 학생들에게 선생으로서 인정도 존중도 받지 못하고 가족 내부에서 혹은 자신의 인생에서 자신의 위치를 잃어버린 무기력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위의 네 사람이다.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열정이 사라지는 것인지 열정이 사라지는 것이 나이 듦의 과정인 것인지. 니콜라이의 40번째 생일에서 알게 된 노르웨이 심리학자의 "인간은 혈중 알코올 농도 0.05%일 때 가장 창의적이고 활발한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가설은 라운드의 시작을 알리는 첫 잔이자 네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킬 지도 모를 동아줄이자 예열 과정인 것이다. 가설을 간단하게 시음하는 첫 번째 라운드 뒤 정해진 시간에만 술을 마셔 최소 0.05%의 알코올 농도를 유지할 것과 밤 8시 이후에는 절대 술을 마시지 말 것이라는 2가지 규칙을 정하며 기뻐하고 들떠있는 네 사람의 모습은 서서히 텐션을 올리는 술자리의 모습이자 사라진 열정을 되찾아가는 인간의 모습이다.

출처. 다음 영화

예열되기 시작한 술자리는 빠르게 흥분되고 즐거워지는 것처럼 규칙을 정한 뒤 시작한 두 번째 라운드에서 네 사람은 빠르게 고무된다. 수업에서 농담으로 학생들을 끌어들일 뿐만 아니라 학생들 스스로가 학업에 적극적으로 임하게 만들었다. 마음의 거리가 멀어진 가족과는 함께 여행을 갔을 뿐만 아니라 아내와 오래도록 하지 못한 사랑을 나누기도 했다. 어쩌면 열정은 사라졌던 것이 아니라 타오르게 하는 방법을 잊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술자리에는 언제나 예기치 못한 사고의 가능성이 있으며 성공이 계속되면 자만을 부르는 법이다. 0.05%를 넘어 더 많은 술을 마셨을 때 인간의 능력은 어떻게 될 수 있을까라는 호기심에서 시작한 3번째 라운드는 완전히 실패다. 겨우 좁혀놓은 가족과 마음의 거리는 다시 멀어지다 못해 완전히 복구할 수 없는 수준까지 나아간다. 2가지 규칙만 잘 지키면 된다는 생각과 성공으로 안일해진 마음 사이로 술이 스며든다. 스며든 술은 계속 술을 부르며 열정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다. 결국 술에 취한 톰뮈가 사고로 죽기까지 한다. 예열을 거쳐 열정과 흥분의 도가니로 접어든 술자리가 대체로 그러하듯 이들의 술자리는 완전히 파국으로 치닫는다.

출처. 다음 영화

하지만 <어나더 라운드>의 술자리는 끝나지 않는다. 네 사람이 술자리를 시작한 순간 술자리는 서서히 외부로 커져간다. 떠나간 가족과 친구 톰뮈는 돌아오지 않더라도 남은 이들의 삶은 계속 이어지고 있기에 외부로 커진 술자리로 마르틴, 니콜라이, 페테르가 참여하는 것이다. 술을 마시며 변화한 그들의 영향을 받은 학생들이 모두 무사히 졸업하게 되면서 다시 술자리가 시작한다. 학생들의 졸업을 축하하는 가운데 함께 춤을 추며 환호하고 술을 마신다. 한 번 산을 오른 이가 올라가는 길을 알고 있는 것처럼 술로 성공과 실패를 모두 겪어본 마르틴, 니콜라이, 페테르에게 자신들의 제자와 함께 즐기는 술자리는 모자르지도 과하지도 않다. 졸업하는 학생들을 축하하고 함께 어울리되 학생들의 텐션에 맞춰 함께 즐긴다. 특히 젊은 시절의 모습을 되찾은 것 마냥 학생들 사이를 종횡무진하며 춤을 추는 마르틴은 술자리의 흥을 돋우며 학생들의 졸업을 축하한다. 나아가 가족과 친우를 상실한 과거를 추모하면서도 기쁨으로 넘치는 현재를 온전히 즐기는 인생 그 자체이다. 수없이 겹쳐지는 인생살이를 한데 엮어 온전히 받아들이면서도 함께 즐기는 승화의 춤인 것이다.

출처. 다음 영화

인생은 그 자체로 놓고 보면 하나의 선과 같지만 사실 수많은 것들이 겹쳐진 하나의 도형이다. 개인마다 다양한 도형의 모습을 취할 테지만 중요한 것은 인생이 단 하나의 선이 아니라는 것이다. 수많은 타인이 '나'의 삶에 겹쳐들고 '나'는 다른 타인의 삶에 엮어진다. 서로의 삶이 겹치고 엮이는 가운데 고통이 찾아오기도 하고 기쁨을 맞이하기도 한다. 이미 인생 자체가 한 판의 술자리인 것이다. 그런 술자리를 오래도록 즐겁게 즐기기 위해서는 술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한다. 홀로 텐션을 올리며 과음해서는 안 된다. 술에 지배 당한 음주처럼 무언가에 지배 당한 인생은 자신의 감정과 상황을 타인에게 강요하거나 너무 멀리 나아가 홀로 인생을 살아갈 뿐이다. 때로는 가볍게 술을 제안하기도 하고 때로는 상대가 용기를 낼 수 있도록 함께 마시기도 하며 때로는 가만히 앉아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도 해야 한다. 술이든 춤이든 타인과 함께 할 때 오래도록 즐길 수 있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지배 당하지 않고 함께 즐기는 것. 어떤 도형의 모습이든 인생을 오래도록 즐길 수 있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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