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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Feb 20. 2022

의심하되 존재하기에 분노할 수밖에 없는 사랑

강변 CGV. 나일강의 죽음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성에 의한 세계 이해를 대전제로 하는 추리 장르는 감정과 거리가 있는 장르 같다. 피 튀기는 살인 사건은 서사에서 감정의 스파크를 일으키지만 그 때 뿐이다. 사건이 발생한 직후에는 "누가 범인인가?"를 놓고 의심과 긴장이 사건의 관계자들 사이 공기를 차갑고 무겁게 만든다. 서로 범인이 아니라며 상대를 범인으로 의심하는 아비규환은 감정과 그에 기반한 인간관계를 부질없어 보이게 한다. 그런 의심과 긴장을 탐정은 어떠한 감정의 영향없이 날카로운 이성의 눈으로 관찰하고 판단해 범인‧범행 방식‧범행 동기를 분석하고 이해한다. 감정과 그에 따른 인간관계에 대해서 추리 장르는 냉소적인 것이다. 하지만 탐정도 인간으로서 감정을 가지고 타인과 사랑을 하고 우정을 맺는다. 감정에 냉소적일 것 같은 추리 장르도 이성의 화신일 것 같은 탐정이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 감정과 그에 따른 인간관계에 오히려 더 큰 희망을 암시하는 듯하다. 자신의 지적 능력을 타인 앞에서 자랑하며 추리 실력 뽐내기를 좋아하는 오만한 탐정 에르큘 포와르가 사랑이라는 인간의 감정을 의심하면서도 바라고 분노하는 <나일강의 죽음>이 색다른 추리 영화로 보이는 이유이다.

출처. 다음 영화.

전작 <오리엔트 특급 살인>(2017)과 마찬가지로 애거서 크리스티의 <나일강의 죽음>을 바탕으로 제작된 케네스 브래너의 <나일강의 죽음>에서 에르큘 포와르는 사랑에 대해 이중적인 인물이다. 멋들어지게 기른 포와르의 수염에서 사랑에 대한 포와르의 이중성을 확인할 수 있다. 참전 군인으로 전투 중 얼굴에 끔찍한 부상을 당한 포와르는 약혼녀 캐서린에게 끔찍한 상처가 남은 얼굴을 보이며 이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런 포와르의 물음에 캐서린은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다는 말과 함께 콧수염을 길러 상처를 가리라고 제안한다. 포와르의 상처를 보고 굳은 얼굴을 간신히 풀면서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굳어지는 얼굴을 숨기지 못한 채 콧수염을 길러 상처를 가리라는 캐서린의 모습은 포와르에게 절망이면서도 희망이었으리라.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은 시기에 자신을 보러 전쟁터로 오는 도중 박격포에 의해 캐서린이 죽은 뒤에도 콧수염을 기른 채 캐서린을 그리워하는 포와르의 모습은 캐서린 이외에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공포에 이어 타인의 사람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로 드러난다. 가슴 속에 여전히 캐서린을 향한 사랑을 간직하며 자신을 사랑해줄 누군가를 그리워 하면서 말이다.

출처. 다음 영화.

이렇듯 사랑에 대해 이중적인 포와르는 <나일강의 죽음>에서 살인 사건의 범인을 밝혀내는 추리보다 더 주목하고 있는 요소이다. 이 영화는 추리를 통해 인간의 어두운 면을 포착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감정에 격동하고 변화하는 인간 존재를 포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사랑에 냉소적이면서도 자신을 사랑할 누군가를 기대하는 포와르만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자클린-사이먼과 로잘리와 결혼하기 위해 절도를 하는 부크에게서 <나일강의 죽음>이 사랑에 의해 격동하고 변화하는 인간 존재를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나일강의 죽음>은 시작부터 범인과 범인의 동기를 어느 정도 암시하며 시작해 뻔하디 뻔한 결말로 이어지는 영화의 서사를 최대한 차갑게 진행한다. 영화는 추리 장르임에도 포와르가 리넷의 살인범을 밝히기 위해 용의자들을 심문하고 추리하는 과정을 포와르가 한 명씩 왜 범인이 아닌지를 이른바 스피드웨건 혹은 설명충 방식으로 추리하는 것으로 재현한다. 어떻게 보면 떡밥 즉, 사건 전반의 증거들을 보여주며 관객도 함께 추리하는 가운데 탐정이 기가막히게 추리하는 것으로 관객의 카타르시스를 이끌어내는 추리 장르 영화치고는 상당히 이상한 연출이자 서사 전개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출처. 다음 영화

하지만 <나일강의 죽음>의 목적은 결국 "사랑이라는 불완전해 보이는 감정에 인간이 얼마나 격동하고 변화하며 그 과정에서 어떤 희망을 엿볼 수 있는가?"로 연결된다. 이러한 목적은 분노라는 감정을 재현하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전작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서와 달리 포와르는 리넷이 살해당했다는 것을 아는 순간 일종의 분노를 보인다. 비록 사이먼-리넷의 결혼을 비웃으며 통속극에 비유하며 냉소적으로 반응한 포와르지만 동시에 포와르는 그들의 사랑이 진심으로 행복에 도달하기를 바라기도 하는 인물이다. 신혼여행까지 쫓아와 사이먼-리넷 부부를 괴롭히는 것처럼 보인 자클린에게 포와르가 새로운 사랑을 찾아 자신의 인생을 살라고 조언하는 것은 자클린만이 아니라 사이먼-리넷 부부의 사랑을 걱정한 것이다. 이러한 포와르의 분노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줄 누군가를 바라는 포와르의 욕망이 발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리넷의 죽음만이 아니라 부크의 죽음에 포와르가 총으로 용의자를 위협하며 자신의 분노를 격렬하게 드러내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부크를 친구로서 진심으로 좋아할 뿐만 아니라 로잘리와 사랑의 관계가 행복에 도달하기를 진심으로 바란 것이 포와르이기 때문이다.

출처. 다음 영화.

분노라는 감정만이 아니라 쑥스러움이라는 감정과 어색함이라는 행동을 통해서도 <나일강의 죽음>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한 인간의 격동과 변화에 이어 희망을 드러낸다. 영화에서는 다른 타인을 크게 믿지 않으며 언제나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대하는 포와르가 유일하게 무장해제 되는 관계를 두 개 제시한다. 하나는 친구로서 진심으로 좋아하고 행복을 바라는 부크와 맺은 우정이고 다른 하나는 유명 재즈 가수로 매력적인 살로메 오터본을 향한 쑥스러움과 어색함으로 드러나는 사랑이다. 심문할 때야 탐정으로서 거리를 두지만 살로메와 처음 대화를 하는 포와르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을 처음 대할 때와 전혀 다르다. 살로메와 대화를 할 때는 말을 떨며 발음이 틀릴 뿐만 아니라 거의 들은 바도 없고 좋아하지 않는 블루스 음악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살로메이다. 살로메에게 보이는 쑥스러움과 어색한 행동거지는 포와르 스스로가 여전히 사랑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음을 보여준다. 자신을 사랑해줄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공포를 이겨내고 사랑을 하고 싶다는 마음에 따라 자신의 정체성이자 사랑의 징표이며 사랑에 대한 이중성을 드러내는 자신의 멋들어진 콧수염을 깎아 상처를 드러낸 채 마감 시간이 한참 지난 클럽에서 살로메의 노래를 듣고 있는 포와르의 모습은 평화로우면서도 사랑을 통해 격동하고 변화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출처. 다음 영화.

흔히 사랑이라는 감정에 빠진 이들을 "미쳤다."고 표현한다.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일 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깊이 빠져 있는 이들의 모습은 광기로까지 보이기도 한다. 물론 광기어린 사랑은 한 때 타오르는 불길 정도로 치부할 수도 있다. 혹은 타오르는 불길로 인해 사랑은 파국으로 치닫을 수도 있다. 이처럼 불완전한 사랑은 영원하지 않기에 공포로 느껴질 수도 있다. 혹자는 사랑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사랑의 존재 자체를 의심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심장을 뛰게 하며 평소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며 상대방과 계속 함께 있고 싶게 하는 그런 감정은 예기치 않은 순간 찾아온다. 불완전하다는 이유로 의심하기에는 너무나 명징하게 신체로 드러나기에 사랑과 관련된 일 혹은 순간에는 분노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차가운 이성의 화신으로 사건의 범인, 동기, 범행 방식을 추리해 인간의 어두운 면을 매번 마주하는 탐정이라 해도 말이다. 어쩌면 사랑을 통해 변화할 수 있기에 인간에게는 희망이 있는 걸게다. 비록 사랑으로 인해 영웅처럼 보이던 이도 평범한 인간으로 보일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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