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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Mar 17. 2022

폭력과 혐오 사이 애처로운 연대

Netflix. 아케인.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폭력과 혐오가 일상이자 연대는 애처로운 시대이다. 절대적인 진리란 없고 그저 서로 다를 뿐이라는 말은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가치 있다는 전제에서 가능하다. 하지만 그러한 전제는 언제나 '나'라는 또다른 전제를 가지고 있다. 타인의 다름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협하지 않을 때에만 타인의 다름을 받아들인다. 인류애를 상실하게 하는 일들을 도처에서 보고 들을 수 있는 세상에서 모두가 다르기까지 하니 사실상 '나'를 제외하면 모든 타인은 그 자체로 이미 위협일 뿐이다. 폭력과 혐오란 위협에 대한 가장 손쉬운 자기 방어인 것이다. 하지만 폭력과 혐오는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에 문제만 가중할 뿐 실제로는 무엇도 유지하거나 보호하지 못한다. 자기 방어임에도 파괴만 하는 것이 폭력과 혐오의 모순이다. 그러한 폭력과 혐오의 모순에서 연대는 모순을 극복하고 기나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다. 자기 중심적인 폭력과 혐오와는 달리 연대는 타인과 다름을 인정한 다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폭력과 혐오에 익숙한 요즘 시대에 연대는 찾아보기도 어려우며 폭력과 혐오에 비해 범위 역시 한정적이다. 일정 공동체 내부에서 연대하더라도 공동체 사이에는 또다른 폭력과 혐오의 논리가 작동하는 것이다. 넷플릭스의 <아케인>의 필트오버와 지하도시의 폭력과 혐오 사이에서 연대가 빛을 발하기 보다 애처롭게 보이는 이유이다.

출처. 라이엇 게임즈

과학과 이성으로 모두가 평등하게 진보를 향해 나아가는 필트오버는 계급, 자본, 지역 등에 의한 혐오의 모순으로 공동체 내부가 가득찬 도시이다. 그나마 공동체 내부를 채운 혐오의 모순은 은연 중에 드러날 뿐 도시를 파괴할 정도는 아니었다. 대신 혐오의 모순은 공동체 외부로 뻗어나가 지하도시로 향한다. 지하도시 출신이라는 이유로 차별만이 아니라 의심과 폭력이 당연시 된다. 사회의 하층민은 지하도시로, 더 깊은 나락으로 밀려나고 소수의 피라미드 상층부는 삶의 풍요를 더 많이, 더 더 많이 원하는 가운데 서로를 향한 폭력과 혐오는 극단으로 치닫는다. 그 가운데 세태를 타고 이어지며 폭력과 혐오는 악순환을 거쳐 점점 더 커져왔고 악순환 속에서 약자들만이 고통받았다. 어른들은 다음 세대를 위한다는 명분 속에서 피를 흘렸으며 아이들은 부모의 죽음을 바라보며 분노 속에서 다시 다음 세대를 위해 피 흘릴 준비를 한다. 우정을 나눴음에도 필트오버를 향한 분노로 피를 흘리는 가운데 우정마저 파괴된 벤더와 실코. 부모의 죽음과 필트오버를 향한 지하도시의 분노로 당연히 필트오버를 향해 분노하는 바이의 일당. 당연하다는 듯 혐오와 차별의 시선을 날리며 지하도시 사람들을 범죄자 취급하는 마커스. 누구 하나 필트오버와 지하도시 사이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은 채 세대를 이어온 폭력과 혐오의 악순환 속에서 각자의 분노만 표출한다.

출처. 넷플릭스

케이틀린-바이, 제이스-빅토르, 하이머딩거-에코, 제이스-멜 등. 필트오버와 지하도시 사이 폭력과 혐오의 악순환을 해결하기 위한 수많은 연대의 모습은 상대에 대한 인정과 이해를 기반으로 한다. 특히 필트오버의 일원 간 혹은 지하도시의 일원 간에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필트오버의 일원과 지하도시의 일원이 서로를 인정하고 이해하며 연대가 진행된다는 점은 폭력과 혐오를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방안이 연대라는 것을 시사한다. 하지만 이러한 연대가 폭력과 혐오를 온전히 해결하지는 못한다. 필트오버 의회의 의원들, 지하도시의 사람들, 실코와 징크스 등. 폭력과 혐오 속에서 상대와 맞서기 위해 서로 연대한다. 외부의 적을 통해 다져지는 내부의 결속처럼 폭력과 혐오의 악순환은 공포와 대립을 통해 그 스스로의 구조를 강화하는 것이다. 공포와 대립을 통해 끊임없이 강화되는 폭력과 혐오의 세계는 강자건 약자건 서로를 계속 의심하고 폭력과 혐오가 정당화된다. 누군가는 현재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누군가는 현재를 바꾸기 위해서. 그런 가운데 서로를 괴물화하며 강자끼리 혹은 약자끼리 연대한다. 공동체를 넘어서는 연대와 공동체를 넘어서지 못하는 연대 둘 중 어느 쪽이 더 긍정적이라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출처. 넷플릭스

그렇기에 폭력과 혐오의 세계에서 연대는 애처롭다. 언니인 바이를 믿고 의지한 만큼 언니에게 배신당하고 버려졌다는 절망에 대한 어린 파우더의 믿음은 자유라는 명목하에 공동체를 위협하는 실코에게 의지하며 본인 스스로를 징크스라 부르게 된다. 동시에 폭력과 혐오는 친구였던 마일로와 클레거를 죽였다는 죄책감에서 징크스가 눈을 돌리고 마치 그들이 살아있다는 망상 속에서 죽은 마일로와 클레거의 환청을 들으며 살아가도록 한다. 자신의 실수로 죽은 두 친구의 환청은 바이를 향한 믿음과 의지 사이로 의심을 파고들게 하고 그러한 의심은 종국에 징크스가 실코를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인식하며 바이 대신 실코와 연대하게 한다. 징크스만이 아니다. 과학자와 정치가 사이에서 혼란스러워 하며 본래의 목적을 상실한 듯한 제이스에게 실망하고 다가오는 죽음으로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신지드에게 시머를 받아가 마공학 핵 연구를 단행하는 빅토르. 선임 그레이슨처럼 능력있고 청렴한 집행자가 되고 싶었으나 실코와 잘못된 계약을 맺은 뒤로 부패한 집행자로 살며 갈등하다 끝내는 단 한 번도 정의롭지 못한 채 죽는 마커스. <아케인>의 인물들은 폭력과 혐오에 의해 연대하는 가운데에서도 끊임없이 의심하는 가운데 결국 폭력과 혐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상대에 대한 인정과 이해가 기본 전제인 연대는 믿음과 의지를 한정시키고 무의미하게 만드는 폭력과 혐오의 세계에서 애처롭게 발버둥 칠 뿐이다.

출처. 넷플릭스

혐오와 폭력이 일상 도처에서 다양한 형상으로 나날이 늘어가고 있다.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더 잔인무도할 것이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스스로가 원하지 않는 일은 타인에게도 바라지 마라." 등 시간을 타고 내려오는 선현의 말씀은 '현실적'으로 왜곡될 따름이다. "(나를 먼저 사랑해줄 때) 네 이웃을 사랑하라.", "(나에게 먼저 해줄 때) 스스로가 원하지 않는 일은 타인에게도 바라지 마라." 등으로 말이다. 왜곡된 인식 속에서 매일 더 잔인해지는 세상에서 지푸라기 잡듯 희망을 부여잡고 타인과 연대하려는 행동은 때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몇 번이고 주고는 한다. "바람이 불면 촛불은 꺼진다."는 말에 촛불이 활활 타오르는 태양이 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촛불이 태양으로 바뀌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어둠은 자그마한 빛에도 그 힘을 잃는다고 하지만 반대로 빛은 어둠에 의해 가려지기 마련이다. 아니면 서로 자신이 빛이라 말하며 빛을 발하기만 할 뿐 눈이 멀어버려 서로의 빛을 보지 못해 어둠이 찾아온 것인가? 모두가 눈이 멀어버려 폭력과 혐오 속에서 연대는 애처롭게 흔들리는 촛불에 불과한 이 시대는 비극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애처롭더라도 작게 빛나고 있는 불꽃이 잔인하고 맹렬한 바람에 꺼지지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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