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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Mar 09. 2022

경유가 아닌 직시를 통한 소통

정동극장. 가족이라는 이름의 부족.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다."라는 말은 인간 존재와 관련해서 두 가지 전제를 상기시킨다. 하나는 "모든 존재는 가치 있으며 동등하다."는 전제이다. 다른 하나는 "모든 존재는 각자의 언어를 갖고 있다."는 전제이다. 인간은 개인은 모두 가치 있고 동등하지만 동시에 각자의 존재를 표현하는 언어는 다른 것이다. 두 전제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음을 받아들여야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의 우리는 전제 중 전자는 너무나 당연히 여긴 나머지 잊고 있으며 후자는 각자의 언어 중 자신의 언어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전자를 잊어버린 가운데 자신의 언어만 강조하다 보니 개인은 자기 자신을 타 존재보다 강조하게 되고 자신을 경유해 타 존재를 해석하게 된다. 수많은 맥락이 교차하면서 형성되는 타 존재를 자신의 맥락에서 해석하면서 '나'를 중심으로 타 존재를 재구성하고 왜곡하는 것이다. 자신을 경유해 타 존재를 재구성하고 왜곡하는 것을 인간은 너무나 익숙해져 소통의 방식이라 착각하면서 '나'와 '너' 사이는 혐오와 차별, 육체적 폭력으로 채워지고 소통은 불가능하게 된다.


하지만 자신을 경유해 타 존재를 재구성하고 왜곡하는 방식의 태도는 단순히 소통만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존재는 가치가 있으며 동등하다."는 전제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나'만이 아니라 '너'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잘못된 소통 방식은 '너'의 존재를 '나'로 환원하면서 '너'를 파괴한다. 자기 자신을 경유해 타 존재를 재구성하고 왜곡하는 방식은 자기 자신의 존재 역시 파괴하는 역설에 도달하는 것이다. 즉, 인간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 타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진정한 소통 방식을 깨달아야 한다. 자기 자신을 경유하지 않고 타 존재를 직면하는 방식 말이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경유한다는 것은 인식‧판단과 관련해서 필연적인 과정이다. 타 존재와 소통하는 것만큼이나 인식‧판단 역시 세계에서 살기 위해서는 필요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기 자신을 경유하지 않으면서도 타 존재를 직면하며 소통할 수 있는가? 모든 인간에게 최초의 공동체인 가족을 배경으로 타 존재와 소통하는 방식을 실험하는 <가족이라는 이름의 부족>이 제시하는 물음이라 할 수 있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부족>은 불협화음으로 울리는 음악을 통해 가족 공동체에 부여된 환상을 부수면서 시작한다. 가족은 인간이 세계에 나올 때 처음 소속되는 공동체이다. 모든 공동체는 각자 다른 언어를 갖고 있는 인간 개인이 서로 소통할 수 있도록 신념, 믿음, 규칙 등을 전제한다. 하지만 가족은 신념, 믿음, 규칙 이외에 혈연이라는 요소까지 더해 여타 공동체보다 더욱 강력한 결속력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혈연은 단순히 피의 연결이 아니다. 피로 연결되어 있음은 물리적‧심리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가족 구성원의 공동체 결속력은 끊기지 않는다는 신화를 의미한다. 이에 따라 그 어떤 공동체보다 가족 공동체는 구성원이 온전한 소통 속에서 서로를 이해할 뿐만 아니라 사랑하고 있으며 나아가 가족 공동체의 관계는 영원하다고 인식된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경유해 타 존재를 재구성하고 왜곡하는 것은 가족이라 해도 마찬가지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부족>의 시작을 알리는 불협화음은 단순히 크리스토퍼, 베스, 다니엘, 루스, 빌리 가족의 불협화음일 뿐만 아니라 가족 공동체가 온전한 소통 속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한다는 환상을 부수는 음악인 것이다.


불협화음을 거쳐 무대에 등장하는 가족의 모습은 불협화음 그 자체이다. 모두와 논쟁을 즐길 줄 안다고 착각하는 가부장 크리스토퍼, 중재자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아무런 중재도 안 하는 베스, 자신의 능력에 대한 열등감으로 가득차고 사랑을 받지 못해 언제나 사랑을 갈구하는 다니엘과 루스. 이 가족은 서로의 약점, 단점, 열등감 등을 논쟁이라는 이름으로 아무렇지 않게 공격한다. 이 가족의 논쟁은 모두가 평등하기에 논리에 기반한 비판 논쟁은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행해지기에 겉으로 보기에는 거칠지만 실상은 사랑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런 사랑의 행위는 거칠게 진행되고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상대방의 진심을 명확히 알려고도 혹은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사랑의 행위가 행해지기에 서로 계속해서 상처만 쌓여갈 뿐이다. 즉, 모두가 평등하기에 누구나 서로를 향해 진심을 다해 비판하고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계속 서로 논쟁을 하는 이 가족은 사랑이라는 진심보다 불협화음 속에서 상처만 늘어가는 것이다.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과정이 아니라 자신을 경유해 상대를 바라보면서 공감하지 못하는 이 가족의 불협화음은 어딘가 애처롭게만 느껴진다.


이 가족의 불협화음이 가장 애처롭게 느껴지는 이유는 막내이자 가족 중 유일한 청각장애인인 빌리가 가족 내에서 마주하는 불합리 때문이다. 청각장애인이지만 청각장애라는 소수성에 고뇌하고 고통받지 말기를 바랐기에 빌리의 가족들은 빌리를 청각장애인으로 기르지 않았다. 수화처럼 청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할 수 있는 요소들은 접하지 못하게 하면서 들리지 않음에도 언어를 가르쳤고 독순술을 가르쳐 상대와 어색하더라도 대화를 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가족의 이러한 노력과 달리 오히려 빌리는 가족에 의해서 자신이 청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인식한다. 서로 논쟁을 하면서 여러 대화가 오고 가는 사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대화에 참여하려는 빌리에게 누구도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 명확히 설명해주지 않는다. 상대방이 어떤 감정인지,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물어보며 대화를 청하는 빌리에게 누구도 자신의 감정과 하루의 일을 상세하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빌리가 청각장애인이라는 사실에 고통받지 않고 정상인으로 자라길 바란 가족이 실상은 빌리 스스로는 절대 떼어놓을 수 없는 청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빌리에게 계속해서 못질을 한 것이다.


나아가 같은 청각장애인인 실비아를 대하는 빌리의 태도는 어딘가 빌리를 대하는 가족의 모습과 비슷하다. 빌리가 정상인 가족 내에서 비장애인으로 살도록 강요받는 삶을 살았다면 실비아는 청력을 서서히 잃으면서 비장애인에서 청각장애인이 되고 있는 경계 위의 인물이다. 어쩌면 청각장애인 부모 밑에서 정상인이었다가 청각장애인이 되고 있는 실비아에게 비장애인 가족들에게 비장애인을 강요받으며 청각장애인임에도 비장애인처럼 살아온 빌리는 유일하게 소통이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원래 자신이 누군인지를 잊어가는 과정을 똑같이 겪은 사람이니 말이다. 하지만 빌리는 자신이 청각장애인임에 매몰되어 자신과 비슷한 인생을 살아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 실비아라는 사실에 지나치게 집착한다. 이 과정에서 오히려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 두 인물은 물리적으로는 가까워졌음에도 심리적 거리는 점점 멀어진다. 독순술로 범죄자의 말을 상상으로 꾸며대면서 청각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 경계를 넘나드는 빌리가 정상인에서 청각장애인이 되어 가는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왜 자신이 청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냐고 말하는 듯한 모습을 보일 때 실비아는 가장 큰 절망을 느꼈을 것이다.

이렇듯 <가족이라는 이름의 부족>은 계속 인간 관계에서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듯하다. 자신을 경유해 타인을 인지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이상 모든 인간 관계와 그에 따른 소통은 허상일 뿐이다. 관계를 맺은 상대방이 가족 혹은 가족 같은 사람이더라도 말이다. 그렇기에 형 다니엘과 동생 빌리가 수화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어찌보면 싱겁게 느껴질 수도 있다. 동생 빌리를 사랑하기에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고통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기를 바란 가족 중에서 빌리에게 집착하는 듯한 모습을 보일 정도로 빌리의 앞날을 걱정하며 가장 빌리를 사랑하는 다니엘이 빌리가 배울 필요가 없다 생각하며 무시한 빌리에게 수화로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냐고 묻는다. 사랑한다는 말을 정상인들의 언어인 목소리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동안 애써 무시하고 지워왔던 빌리의 언어 즉, 청각장애인의 언어인 수화로 전달하려 한 것은 저런 간단한 행위가 긴 시간 동안 쌓여온 가족 내부의 오해와 고통을 순식간에 씻을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어쩌면 인간 사이 소통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라는 어두운 정도를 넘어서 희망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그런 묵시론적인 미래를 이 연극은 전망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자신의 입장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을 직시하고 내재화하면서 상대방을 이해하는 행위 즉, 어렵다고 생각했던 행위가 너무나도 간단한 행위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원래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동, 취하는 모습 등을 모두 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의 언어, 행동, 모습 등을 배우기 위해 질문하는 간단한 행위. 그런 간단한 행위 조차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건 어떻게 말해?", "그렇게 말할 때 어떤 게 느껴져?", "이건 이렇게 하면 되는거야?" 등. 스스로의 관점을 경유하며 상대방을 판단하는 것을 넘어서 상대방 자체가 어떤 존재인지를 체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오히려 더듬거리는 와중에 빌리에게 사랑을 수화로 어떻게 표현하느냐고 묻는 다니엘의 모습은 단순히 절망과 묵시론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사이 소통의 불가능성을 넘어설 수 있는 방법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귀찮아서 하지 않았던 간단한 행위를 행동으로 옮기는 것으로 가능하다고 말하는 메시지이다. 저렇게 간단하게 그동안의 오해와 고통을 모두 씻을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면 되돌아보자. 그런 간단한 행동을 얼마나 해왔는가? <가족이라는 이름의 부족>의 마지막 수화 장면은 핵심을 관통하고 있다.

현대인은 시공간을 넘어 소통할 수 있을 정도로 물리적으로 가까워진 개인 사이 거리에도 불구하고 혐오 표현, 차별 등 존재에 대한 전제 망각 및 왜곡과 타 존재에 대한 인식 왜곡의 구체적 양상에 의해 심리적으로는 상호간 거리가 멀어졌을 뿐만 아니라 왜곡되어 소통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여전히 감정을 교류하고 관계를 맺으며 공동체를 만들고 싶음에도 너무 오랫동안 자신을 경유하며 타 존재를 해석하는 방식을 유일한 소통 방식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이미 알고 있다. 자신을 경유하며 타인을 인지하고 해석하는 방식은 소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또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타인에게 타인에 대해서 물어보는 간단한 행동만으로도 타인을 이해하는 과정을 시작할 수 있음을. 가족이라는 이름의 공동체조차 타인이다. 그렇기에 끝없이 그들을 향해 노력해야 한다. 물어보고 직접 해보면서 상대방을 인지하고 내재화해야 한다. 어쩌면 가장 귀찮은 행동일지도 모를 질문과 직시라는 행동이 우리를 지옥에서 꺼내줄 것이다. 소통이 불가능한 것 같은 지옥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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