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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Jun 06. 2022

'있어 보임'을 위한 무의미

용산. CGV. 더 노비스. 플레이그라운드.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글쓰기 튜터를 하면서 학생들의 글을 읽고 '더 좋은 글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언이 필요할까?'를 고민하는 일이 많다. 물론 항상 구체적이지 않은 주제가 문제라는 결론에 도달하면서 "주제부터 다시 생각해보자."는 즉, 처음부터 글 다시 쓰자는 것으로 튜터링이 귀결되어서 고민이 많기는 하다. 하지만 글이라는 것이 애초에 주제로 시작해 주제로 끝이 나는 것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거칠게 말하면 글을 읽는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은 바 정도로 정의할 수 있는 주제는 구체적으로는 "어떤 소재를 어떤 관점에서 왜 분석하고자 하며 분석을 통해 무엇을 주장하고자 하는가?"라는, 소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정의할 수 있다. 애초부터 글을 쓸 때 주제가 무엇인지도 배우지 않은 채 글쓰기에 던져지는 학생들은 주제를 연출하기 위한 형식들만 겉으로 배운 상태에서 간신히 글을 쓴다. 그러한 글들의 모습은 어디서 본 건 있다는 인식을 주거나 있어 보이는 느낌만 줄 뿐 실질적으로 학생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다.


이는 글에서만 문제가 아니다. 사진, 이미지, 영상 등 인간이 만들어내는 모든 문화 텍스트는 만들어지는 단계에서부터 각 텍스트를 보는 이들이 느꼈으면 하는 바 혹은 전달받았으면 하는 바가 정해지고 만들어진다. 물론 느끼는 이, 전달받는 이의 다양한 배경과 상황에 따라 실제로 느껴지는 바나 전달받는 바는 각양각색이지만 제작자는 자신의 생각 즉, 주제가 최대한 느껴지고 전달될 수 있도록 연출해야 한다. 텍스트를 사이에 두고 제작자와 독자 혹은 관객의 의사소통은 제작자 스스로가 주제를 얼마나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이를 명확히 보이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 연출할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완벽에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연출에 대한 고민은 형식일 뿐이지 실질적인 내용 즉, 주제를 담고 있지는 않다. 주제를 독자 혹은 관객에게 전달하는 방식인 연출은 제작자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각각의 연출 사이에는 그 자체로 무엇이 더 좋고 나쁜지를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각각의 연출을 평가는 할 수 있다. 영향력 혹은 효과라는 측면에서 주제를 전달하는 것에 있어서 연출 방식이 적절했는지 즉, 의미가 있었는지로 말이다.


한 여자 대학생의 완벽주의를 향한 고투를 그린 영화 <더 노비스>와 초등학교 입학 이후 학교에서 처음으로 타인과 맺는 관계의 잔인함을 마주하는 아이의 세계를 그린 영화 <플레이그라운드>는 소재에 대한 연출이 탁월한 영화이다. <더 노비스>는 영화에서 소재로 거의 사용하지 않은 조정 그것도 여성 조정을 통해 누구보다 항상 완벽하고자 자신을 몰아붙이는 알렉스의 모습을 휘몰아치듯 보여준다. 남들보다 항상 한 발자국은 더 앞서 나가 완벽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알렉스의 모습은 <위플래쉬>의 앤드류를 떠올리게 한다. 손이 찢어지고 피가 흐르고 있음에도 스틱을 놓지 않는 앤드류와 마찬가지로 멍으로 가득한 몸과 곪은 상처로 노를 잡기도 어려운 손으로 계속해서 노를 잡고 물 위로 나서는 알렉스는 알게 모르게 계속 오버랩 된다. 탑 조명 하나만 켜진 무대 위에 등장한 배우처럼 어둠 속에서 홀로 로잉 머신을 밀고 당기는 알렉스의 모습은 엄청난 집중력만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완벽에 집착하는 알렉스의 광기를 느끼게 한다.

출처. 왓챠피디아

애초에 완벽주의를 향한 광기는 조정에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다. 물리 시험을 볼 때도 다른 학생들보다 빠르게 문제를 푼 상태에서 알렉스는 시험 시간이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확인한다. 영화에서는 이러한 알렉스의 모습을 먼저 문제를 하나하나 다시 읽는 모습을 줌인, 글씨가 빠르게 적히는 소리, 알렉스의 고민하는 숨소리 등으로 연출한 다음 줌아웃해 어둑어둑한 넓은 교실 안에 유일하게 시험지를 확인하고 있는 알렉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듯 학문과 운동에서 극한으로 완벽주의를 추구하면서도 사교성은 높지 않아 알렉스의 인간관계는 좋게 봐야 좁은 인간관계로 볼 수 있을 뿐 실상은 누구와도 마음을 편하게 놓고 관계를 맺지 못한다. 하고 싶은 말과 감정을 삼키는 와중에 드러나지 않는 자신의 야망을 미친듯이 추구하는 어두운 인간으로 그려지는 알렉스의 완벽주의 성향을 더욱 강조한다. 그렇기에 번개가 치는 날에는 조정을 멈추고 반드시 강에서 나오라는 금기까지 어겨가며 자신이 목표로 한 기록을 달성해 만족스러워 하는 알렉스를 보여주는 영화의 마지막은 마치 타인의 우려와 시기를 모두 이겨내고 완벽주의에 집착하는 인간을 찬미하는 듯하다.

출처. 왓챠피디아

<플레이그라운드>의 경우는 <더 노비스>와 조금 다르다. 아이의 시선을 통해 본 잔혹한 세계는 이미 이전 영화에서 다양한 연출 방식으로 재현된 소재이다. 이미 너무나 익숙한 소재이기에 사실상 <플레이그라운드>는 자신의 새롭지 않은 소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관객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다양한 방법이 있지만 그 중 <플레이그라운드>가 선택한 방법은 지금까지 제대로 다루지 않은 지점을 집요하고 구체적으로 다루는 방법이다. 바로 초등학교에 들어간 1학년 여자 아이의 시선을 학교 내부로만 국한시키는 것이다. <플레이그라운드>의 남매로 등장하는 노라와 아벨은 각각 1학년과 2학년으로 영화는 이제 막 학교에 입학한 노라의 시선만을 집중적으로 다루되 공간을 초등학교로만 한정한다. 초등학교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 영화의 시선이 모두 노라를 중심으로 포진하면서 관객은 오직 초등학교 내부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을 노라를 중심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를 통해 관객은 새로운 공간에 대한 새로운 시선으로 익숙한 소재를 새롭게 보게 된다.

출처. 왓챠피디아

어떤 공동체에 들어갔을 때 공동체에서 겉돌게 되는 어색한 경험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으며 그러한 경험은 학교라는 공간에서도 가능하다는 것 역시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런 가운데 영화 내 모든 정보가 노라를 중심으로 전달되기 때문에 노라는 관객이 감정이입하는 인물이 된다. 즉, 노라가 학교에서 겉돌면서 교우 관계가 거의 없고 누구보다 기대고 있던 오빠 아벨이 학교 폭력을 당하지만 아직 어리기에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정보가 노라를 중심으로 관객에게 전달된다. 선생님들에게 말을 해도 선생님들은 제대로 전후 상황을 확인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그저 간단한 경고만 준 채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 가족이라는 안전한 공동체와 달리 가족 외부의 세계는 무차별적인 폭력에 안전망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위험한 곳이라는 점이 어린 노라의 시선을 통해 계속해서 관객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관객은 노라가 느끼는 공포, 외로움, 무기력함 등을 자신의 경험과 연결지으며 노라에게 감정이입하게 된다.  

출처. 왓챠피디아

물론 모든 정보가 노라의 시선을 통해서만 들어오지 않는다. 하지만 제 3의 시선들도 모두 노라를 중심으로 포진되어 있다. 즉, 영화의 모든 사건은 노라를 중심으로 전개되며 그렇기에 항상 모든 사건에서 노라의 반응은 반드시 관객에게 전달된다. 학교 폭력을 당하며 따돌림 당하는 오빠 아벨을 다른 친구들이 비웃는 순간에도, 오빠 아벨이 친구들에 의해 쓰레기통에 들어가지는 순간에도, 학교 폭력을 당한 오빠 아벨이 오히려 가해자들과 함께 다른 학생을 따돌리며 학교 폭력을 가하는 순간에도 노라는 항상 영화의 모든 사건 바로 그 순간에 존재한다. 즉, 노라의 시선과 반응이 관객에게 지속적으로 중첩되는 구조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플레이그라운드>에서 그리는 안전망이 존재하지 않아 무차별적인 폭력에 노출되는 위험한 세계는 노라를 통해 그려진다. 관객은 어떻게 보면 온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는 어린 노라의 관점으로 이 위험한 세계를 더욱 깊이 내재화하면서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두 영화 모두 있어 보이는 연출을 할 뿐 실질적으로는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더 노비스>를 보자. 완벽주의를 향한 알렉스의 광기는 현실에서도 있을 수 있다. 이미 <더 노비스>와 비슷하게 <위플래쉬>라는 영화가 있었듯이 누군가는 알렉스만큼이나 완벽주의를 추구하고 있으며 완벽주의를 향한 광기는 어떤 측면에서 아름다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위플래쉬>와 달리 <더 노비스>는 완벽주의를 향한 광기를 아름답게 그리지 못했다. <위플래쉬>의 앤드류는 최고의 재즈 드러머가 되고 싶다는 목표가 있었으며 그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플레처 교수를 만나면서 완벽주의로 드러선다. 반면 <더 노비스>의 알렉스는 목표가 불분명하다. 알렉스가 학점을 잘 받으려고 미친듯이 공부하고 조정에서 예비 선수인 노비스가 아닌 프로가 되기 위해서 미친듯이 조정 연습을 하는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말 그대로 어제보다 오늘 더 낫고 오늘보다 내일 더 나아지는 것으로서 완벽 그 자체가 목표로 제시될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완벽이 무엇인지는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다르다는 점에서 명확하지 않다.


심지어 알렉스는 완벽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다른 타인은 생각하지 않는다. 불명확한 완벽을 추구하는 자신이 그저 안쓰럽고 대단하게 느껴질 뿐 완벽을 추구하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거나 함께 하는 것이 명확한 타인은 항상 불명확한 완벽보다 우선 순위에서 밀린다. 알렉스가 추구하는 완벽이 불명확한 이유는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과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평가하는 것이 알렉스 본인을 제외하면 없기 때문이다. 즉, 애초부터 알렉스는 유아적(唯我的)이고 자기만족적인 인간인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에서는 물리학도인 알렉스가 조정을 하는 것에 아무런 설명이 없다. 그저 알렉스가 선택한 것일 뿐이다. 알렉스가 왜 그렇게 미친듯이 완벽하고 싶어 하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다. 그저 알렉스가 완벽을 원할 뿐이다.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럴 수 있다는 이유가 그것을 관객이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한다는 이유는 아니다. 영화의 모든 사건은 알렉스의 추구와 선택이라는, 알렉스 중심의 유아적인 순환 논증의 이유만이 제시될 뿐 관객의 이해를 위한 어떤 근거도 없다. 텍스트 내부에서 타인의 존재가 지워진 것과 마찬가지로 텍스트 외부에서 제작자와 관객의 의사소통 과정에서 관객이 배제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플레이그라운드>도 마찬가지다. <플레이그라운드>는 의도적으로 영화 내 모든 시선을 노라를 중심으로 하면서 공간을 초등학교로만 한정지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공간을 초등학교로만 한정지은 지점이다. 관객은 오직 노라를 중심으로 포진한 시선을 통해서만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시선을 포진하는 것은 서사 텍스트에서 어찌 보면 당연하기에 사실 이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시선을 배치한 공간이 한정될 경우 이미 특정 인물을 경유하면서 정보를 받아들이는 관객에게 한 번 더 정보가 한정된다. <플레이그라운드>에서 학교는 한 인간이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가족이라는 안전한 공동체를 벗어나 최초로 외부의 타인을 맞이하면서 더욱 복잡한 관계를 인지하고 자신의 존재를 다듬게 되는 공간이다. 즉, 학교라는 공간을 가게 되면서 인간은 크게 가족과 학교라는 두 공간 간 상호작용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다듬게 된다. 그렇다면 최초로 학교라는 공간에서 무차별적인 폭력의 세계를 마주한 노라의 행위, 시선, 반응 등은 학교만이 아니라 가족 내부에서의 사건에서도 영향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플레이그라운드>는 공간을 초등학교로만 한정짓는 과정에서 학교 외부에서의 일이 영향을 주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간 남매가 학교에서의 일로 가족 내부에서 어떤 고민을 했는지, 어떤 이야기를 주고 받았는지, 어떤 놀이를 했는지 등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다음날 학교에서 밤 사이 가족 내부에서 있었던 일이 영향을 주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전날 학교의 서사와 그 다음날 학교의 서사 사이에 있어야 하는 가정의 서사는 완전히 제거된 상태에서 학교의 서사만이 연결될 뿐이다. 원래는 서로를 의지하며 사이가 좋았던 노라와 아벨 남매가 학교 폭력이라는 사건을 거치면서 완전히 망가지는 과정에서 무차별적 폭력만이 전시되는 학교 서사만이 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타나니 노라는 서사의 중심에서 모든 시선이 경유하는 인물임에도 수동적으로 그려질 뿐이다. 수동적으로 무기력하게 모든 현실의 폭력을 받아야 하는 노라의 모습은 현실의 폭력을 더 명확하게 인지하게도 하지만 과연 이러한 폭력의 전시가 왜 중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도 낳는다.

출처. 왓챠피디아

아이이기에 수동적일 수 있다. 하지만 비슷하게 아이들이 겪는 폭력적인 사회 현실을 그린 윤가은 감독의 텍스트를 생각해보자. 아이는 현실에서 수동적이지만 자기 나름대로 생존하기 위해 노력하는 능동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이러한 능동성은 학교라는 공간 외 다른 공간에서 더 쉽게 드러날 수 있다. 돌봄의 부재가 너무나 익숙한 현대 사회에서 자신을 돌봐줄 수 없는 상황에서 아이는 자기 나름대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한 능동성을 보인다. 수동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능동성을 통해서 오히려 현실의 폭력이 더욱 부각되는 것이다. 수동성에 의한 폭력의 부각과 능동성에 의한 폭력의 부각 모두 폭력을 부각한다는 측면에서 공통되지만 각각의 연출은 폭력에 전시되어야 하는 관객에게 다른 효과를 발휘한다. 전자는 서사의 중심에서 모든 시선을 받는 한 인물이 폭력에 노출되는 순간 인물에게 감정이입하는 관객도 아무런 안전망 없이 폭력에 노출시킨다. 반면 후자는 서사의 중심에서 모든 시선을 받는 한 인물이 폭력에 노출된다고 해서 관객이 폭력에 마냥 노출되는 것은 아니다. 인물의 능동성을 통해 폭력의 재현을 어느 정도 거를 수 있다.


글쓰기에 아직 익숙하지 않은 학생들의 글과 다르게 <더 노비스>와 <플레이그라운드>는 주제의식은 분명 명확해 보인다. 하지만 명확한 주제의식을 표현하는 방식은 있어 보이기만 할 뿐 실질적으로 주제의식을 받아들이고 반응해야 하는 관객을 배제하면서 각자의 주제의식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제대로 논증하지는 못한 모양새다. 텍스트를 사이에 둔 제작자와 독자 혹은 관객 사이 의사소통은 의사소통이기에 양측의 반응이 서로 교차해야 한다. 이러한 교차는 제작자의 주제의식이 얼마나 명확하느냐에 따라 양측 사이 오해가 덜 발생할 것이다. 이때 얼마나 명확하느냐에는 주제의식을 표현하는 연출 방식도 포함되어 있다. 제작자는 자신의 주제의식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을 수 있으나 전달받아 스스로 정리해야 하는 독자 혹은 관객의 입장에서는 텍스트의 주제의식은 타인의 생각에 불과하다. 독자 혹은 관객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방식이 있어 보이기만 할 뿐 독자 혹은 관객을 고려하지 않았다면 전달하는 주제의식의 의미는 퇴색될 수밖에 없다. 말은 'ㅏ' 다르고 'ㅓ' 다르다고 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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