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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Jun 10. 2022

시간의 불안과 위로를 결정하는 자기 자신

신촌극장. 끝이야 시작이야.

인간은 흐르는 시간 위에 있는 존재이면서도 정작 시간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존재이다. 볼 수는 없어도 흐르고 있음이 느껴지는 시간은 무심(無心)하기에 인간의 인식과 무관하게 흐른다. 시작-끝, 과거-현재-미래, 시-분-초는 인간의 인식일 뿐 흐르는 시간과 무관한 것이다. 그럼에도 시간에 끝과 시작을 부여한 것은 인간이 흐르는 시간을 이해하고 싶기 때문이다. 인식과 무관하게 무심히 흐르는 시간은 압도적이기에 공포스러워 멀어지고 싶으면서도 경이로워 가까워지고 싶다. 시간은 무심해 단 한 번도 다른 존재를 짓누르지 않은 채 그저 흘러가고 있을 뿐인데도 시간에 압도 당한 인간은 조금이라도 이해하고자 시간과 끝을 정한다. 하지만 아무리 시작과 끝을 정한다고 해도 시간은 모든 존재에게 동일하게 흐른다. 즉, 시작과 끝이 없는 시간은 인간이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든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줄 뿐이다. 시작과 끝이라는 인식이 필요한 인간이 인식할 수 없다는 것으로 인해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무심한 시간에게서 불안과 위로를 느끼는 이유이다.

<끝이야 시작이야>는 말 그대로 시간의 연극이다. 공연이기 때문에 정해진 시간에 시작할 뿐 실제로는 연극이 언제 시작하는지 알기 어렵다. 시작 전부터 무대 위에 한 여자가 의자에 앉아 있는 상태에서 갑자기 두 남자가 들어와 자연스럽게 벽에 페인트칠을 시작한다. 그러다 갑자기 두 사람 사이 시간이 다르게 흘러간다. 언제 시작했는지를 묻던 남자가 그게 중요하냐고 답하던 남자에게 맥주를 권하고 안부를 묻는다. 한 남자의 술집 오픈을 준비를 도와주는 마을 사람이라는 관계에서 두 사람은 오랫동안 만난 친우 사이가 된 것이다. 친우 사이가 되고 나서도 시간은 복잡하게 지나간다. 방금까지 저녁이었던 시간은 낮이 되고 새벽이 된다. 남자는 하루를 잘 보냈는지, 맥주를 마실 건지, 방금 맥주를 권하고는 다시 맥주를 마실 건지 등을 묻는 다른 남자의 물음에 따라 복잡하게 변하는 시간을 느끼며 갑작스럽게 다가온 시간에 맞게 답한다. 낮에서 새벽으로. 새벽에서 저녁으로. 다시 오픈하던 시기로. 두 남자 사이를 오고 가는 시간은 어떻게 흘러갔는지 알 수 없다.


두 남자 사이에 여자까지 들어오면서 시간의 흐름은 더욱 종잡을 수가 없다. 저녁에 술집을 방문해 남자에게 글을 잘 쓰고 있는지 물은 여자는 소설을 읽는다. 어느 때는 연인과 헤어져 두 남자에게 같이 맥주를 마시며 자신의 감정을 위로해달라고 한다. 왜인지 한 남자는 흘러간 시간은 흘러간 대로 보내고 이미 닥쳐온 시간을 맞이해 반응하고 있으며 다른 남자는 뒤늦게 흘러간 시간을 뒤로 하고 닥쳐온 시간에 맞춰 반응한다. 시작과 끝을 구분할 수 없는 연극의 흐름 속에서 당황하는 남자 덕분에 관객은 웃을 수 있다. 하지만 시작과 끝을 구분할 수 없는 시간에 당황하던 남자는 단순히 당황하는 것이 아니라 맥주를 달라고, 글 쓰고 있는데 아직은 소재만 모으고 있다고, 늦게 일어나서 아직 밥 안 먹었다고 하며 자신에게 다가온 시간을 그대로 맞이한다. 크게 갈등도 없이 하루하루 비슷한 일을 겪으며 세 사람 사이에서 유일하게 흐르는 시간이 변화하는 걸 느끼는 남자가 어느 순간 마냥 웃기게만 보이지 않는다. 종잡을 수 없는 시간을 잘도 받아들이며 차분히 자신의 삶을 이어가는 남자의 모습이 관객에게 위로가 된다.


어쩌면 우리가 시작과 끝이 의미없는 시간 속에서 불안과 위로를 정하는 것은 각자의 몫일 것이다. 시작과 끝, 사건 전개 등이 모두 모호한 연극의 흐름 속에서 유일하게 시간의 흐름을 느끼는 남자처럼 말이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인생도 연극 속 인물들의 하루처럼 그렇게 요동치지 않는다. 매일 만나는 사람도 비슷하고 마주하는 사건도 비슷하다. 시간이 흘러가고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흘러가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아 오늘 하루 다 갔네.", "아니 내일이 과제 제출일이야?", "왜 벌써 6월이지? 올해가 6개월만 남았다고?" 등. 당황스러움을 넘어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남자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흘러간 시간을 흘러간 대로 보내고 다가온 시간을 마주하며 천천히 적응한다. 내일이 과제 제출이면 그저 과제를 제출하기 위해 밤을 샐 것이며, 올해가 6개월이나 지나갔다고 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다시 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시작과 끝을 신경쓰지 않고 다가오는 순간에 충실히 살아갈 뿐이다. 충실히 삶을 살아가느냐의 여부에 따라 불행과 위로가 결정되는 것이다.


1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시작과 끝이 교차하면서 어떻게 흘러간지 모르는 사이 연극은 시작과 마찬가지로 조용히 막을 내린다. 술집 벽을 칠하던 남자 둘이 퇴장한 뒤로 연극의 끝을 관객에게 맡기겠다는 듯 커튼콜이 없다. 시작은 제작진에서 충실히 맡았으니 끝은 관객이 충실히 맞이해달라는 것인가 보다.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조용히 박수가 울리면서 극장의 시간은 끝이 난다. 하지만 동시에 여전히 관객의 시간은 이어지고 있다. 극장과 관객으로서 시간이 끝나고 새로운 시간이 시작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시간은 무심하게 연극, 관객, 배우 등을 지나 흘러가고 있으며 우리도 흘러가는 시간에 맞춰 흘러가고 있을 뿐이다. 언제가 시작이고 끝인지 파악하며 불안해 할 필요없다. 언제가 시작이든 혹은 끝이든 간에 그저 다가온 시간을 충실히 살아가는 자기 자신에게 시간에서 불안과 위로 중 무엇을 느낄지가 달려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이미 시간에서 위로를 느끼는 각자 나름의 충실한 방법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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