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재 배우의 감독 출사표인 <헌트>는 개봉 직후 여름에 개봉한 <외계+인>, <비상선언> 등 여타 한국 영화들과 비교해 가장 호평을 받고 있다. 이정재 배우가 아닌 이정재 '감독'으로 처음 대중에게 모습을 보이는 만큼 기대 자체가 높지 않았던 것이 호평의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그만큼 영화의 완성도가 기대 이상으로 높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단순히 완성도만 높았다면 첩보액션 장르라는 점에서 <헌트>는 주목할 만한 영화가 아니라 볼만한 영화 정도로만 평가받았을 것이다. 오히려 근현대사를 다룬 수많은 한국 영화들과 비교해 첩보액션이라는 닳고 다른 장르인 <헌트>는 자기만의 독특한 위치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주목 받았다고 봐야 한다. 이러한 <헌트>의 독특한 지점은 비슷한 시대와 사건을 소재로 한 <화려한 휴가>, <26년>, <택시운전사>, <1987>과 비교했을 때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날씨의 아이>를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1. 1980년대에 대한 공동체적 위령제인 한국 영화 : <화려한 휴가>부터 <1987>까지
출처. 왓챠피디아
<화려한 휴가>, <26년>, <택시운전사>, <1987>은 모두 1980년대 그 중 12.12 사태 직후 신군부 독재 체제, 광주민주항쟁, 고인이 된 전두환을 다루고 있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1980년대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암살 사건 이후 드디어 한국에도 민주주의가 가능할 것이라는 국민의 염원이 1979년 12.12 사태로 인해 완전히 박살나면서 다시 독재를 맞이한 시기이자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통해 최초로 민주주의를 맞이한 시기이다.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가장 격동적인 시기인 것이다. 이러한 1980년대의 시기를 <화려한 휴가>는 광주민주항쟁과 군부 정권의 잔인성을, <26년>은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의 잔재에 대한 남겨진 이들의 한을, <택시운전사>는 광주민주항쟁을 거치면서 한국 민중이라는 공동체로 나아가는 택시 운전사 평범한 개인의 성장을, <1987>은 독재에 저항하는 집단으로서 한국인의 민주주의에 대한 염원과 행동을 다루고 있다. 완성도는 잠시 차치하고 네 영화는 공통적으로 감성에 기반해 한국 민중이라는 공동체의 과거에 대한 위령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화려한 휴가>는 광주민주항쟁과 당시 정권의 잔인성을 스크린에 민주항쟁의 과정에서 권력에 의해 희생당한 민중의 피와 눈물이 난무하는 현장으로 재현한다. 지나치게 피와 눈물이 난무하는 재현은 신파에 의한 재현으로 이어져 광주민주항쟁이 지닌 의미를 지나치게 대중적이고 오락적으로만 향유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하지만 <화려한 휴가>의 신파를 통한 재현은 2007년 당시 아직도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1980년대 광주민주항쟁의 역사만이 아니라 권력에 의해 스러져 간 한국 민중을 떠올리게 해 그들을 위한 눈물을 흘리게 한다는 점에서 잊히고 제대로 위로받지 못한 민중에 대한 위령제로 판단할 수도 있다. <26년> 역시 광주민주항쟁이라는 피의 역사에 의한 상처를 위로 받지 못하고 오히려 피의 역사가 트라우마로 남은 채 억압당한 남겨진 이들의 분노를 영화의 상상으로나마 풀어주고자 하는 살풀이이자 죄인이라 칭하면서도 징죄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분노라고 할 수 있다. 계속해서 잊힘 당하고 왜곡 당하는 광주민주항쟁을 두 영화 모두 한국 민중의 기억에 각인시키고자 하는 노력이자 여전히 이어져 공동체에게 트라우마로 남은 피의 역사에 대한 위령제인 것이다.
위의 두 영화와 비교해 <택시운전사>와 <1987>은 트라우마로 남은 1980년대 피의 민주주의 역사를 조금 더 객관적인 시선에서 접근하려고 한다. <택시운전사>는 한국 길거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가장인 택시 운전사 개인이 외신 기자를 따라 광주민주항쟁의 현장을 경험하면서 군부 정권에 억압받는 민중 공동체를 인식하고 자신 역시 공동체의 일원이며 공동체를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을 스크린에 보인다. 이 과정에서 <택시 운전사>는 광주민주항쟁의 현장에서 나타난 피와 눈물을 정권의 잔인성과 연결하면서도 그 잔인성을 기자의 카메라와 연결해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해 영화의 분위기가 신파로 빠지지 않도록 붙잡는다. 후반부 택시 운전사들이 군인들의 차량을 몸으로 막는 카체이싱 장면은 영화 전반부의 노력으로 인해 그나마 덜 신파로 연결된다. 이를 통해 <화려한 휴가>와 <26년>과 달리 <택시운전사>는 조금 더 객관적으로 한국 민중이라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각성했으며 여전히 공동체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지만 잊힌 그 일원을 통해 트라우마로 남은 피의 민주주의 역사는 반복되더라도 우리 각자의 각성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과거를 위로한다.
<1987>은 앞의 세 영화와 비교해서도 특이한 지점을 갖는다. 서울대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사건에서 시작해 이한열 열사 피격사망사건을 거쳐 6월 민주항쟁이 발발한 현장을 재현한 <1987>은 실제 인물과 가상의 인물, 실제 사건과 가상의 사건을 거치면서 6월 민주항쟁까지 권력으로 민중을 억압하는 군부 정권과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일반 민중 전반을 모두 비춘다. 약 50명의 인물이 영화에서 실제적으로든 상징적으로든 고른 비중을 갖게 하면서 영화는 6월 민주항쟁의 과정에 집중하고 피의 민주주의 역사에서 한국 민중이 민주주의라는 결과에 도달하는 모습을 그린다. <1987>의 재현은 해방 이후 계속해서 민주주의를 제대로 알든 모르든 간에 민주주의라는 자유를 열망한 한국 민중이 피와 눈물을 거쳐 결국 도달함을 그리면서 4월 민주항쟁과 광주민주항쟁이라는 역사의 트라우마를 민중이 한마음이 되어 극복함을 그리는 것이다. 개봉 당시가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민중의 정치적 열망과 힘이 다시 한 번 드러난 박근혜 대통령 탄핵 사건 직후라는 점을 떠올렸을 때 <1987>은 한국 민중이 지닌 민주주의와 공동체 의식을 각성시키면서도 민주주의 역사에서 피와 눈물을 쏟은 과거의 민중에 대한 현대의 위령제이다. 피와 눈물을 쏟게 될지라도 결국 한국 민중이라는 공동체는 과거를 기억하며 언제든 저항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위로의 메세지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1980년대를 다루는 기존의 한국 영화는 한국 민중이라는 공동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피로 얼룩진 민주주의 역사에서 상처 받은 과거의 한국 민중을 위로하면서 현재와 미래에서 기억하고 있다는 위령제이다. 하지만 <헌트>는 기존의 한국 영화와 다르게 공동체로서 한국 민중이 아닌 개인으로 그 초점을 옮겨 간다. 이는 <헌트>의 '조유정'이라는 인물에서부터 기인한다. 조유정은 일본에서 활동한 박명호의 정보원인 조원식의 후임으로 박명호를 감시하러 온 북측 스파이이면서 비록 위장 신분이긴 하지만 남한 사회의 운동권과 접촉한 대학생이다. 그가 보기에 북한과 남한은 모두 뒤틀어진 독재 정권일 뿐이다. 북한에서 전투기를 몰고 귀순한 북한 군인은 북한 정권이 인민을 위한다고 해놓고는 실제로는 세습하면서 왕국과 같은 모습을 보인다고 말한다. 남한은 군인에서 군인으로 세습된 왕국이다. 혈연이건 군연이건 간에 결국 남과 북은 조유정의 말에 따르면 세상이 변하고 있음에도 정신을 못 차린 상태이다. 영화에서 가장 먼저 이를 언어로 발화하는 인물인 조유정은 운동권 학생들의 모습을 본 뒤 술 한 잔 더 해야겠다며 박명호를 데리고 가 소주를 마신 뒤 담배를 입에 물고는 박명호를 군부 독재의 하수인이라고 명명한다.
출처. 왓챠피디아
이러한 조유정의 모습은 <1987>의 명희와 비교했을 때 흥미롭다. <1987>의 명희는 남한 사회에서 군부 독재의 현실을 외면하려고 하는 젊은 세대의 상징이다. 자신의 주변에서 군부 독재에서 벗어나기 위해 피와 눈물을 흘리며 저항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고 명희는 그런다고 현실이 바뀌냐고, 왜 바뀌지 않는 현실에 자신의 목숨을 바치냐고 하며 민주주의에 희생당한 아버지를 떠올리고 현실을 외면한다. 하지만 빛을 비추지 않았음에도 후광이 나는 이한열을 만나고 그의 행보와 죽음에서 결국 민중의 일원이자 민중의 염원을 깨닫는 명희는 결국 한국 민중으로 수렴하는 개인이다. 하지만 조유정은 명희처럼 한국 민중으로 수렴할 수 없다. 조유정은 북한에서 암약한 스파이이면서 남한의 국민인 경계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계성은 조유정이 북한과 남한의 뒤틀어진 독재 현실을 간파하고 이를 발화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동시에 경계성을 통해 조유정은 어느 집단에도 속하지 않는 개인 그 자체를 의미할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1987>의 명희는 한국 민중이라는 공동체의 위치에서 파악되는 개인이지만 <헌트>의 조유정은 1980년대라는 격동의 한반도 근현대사에서 한반도라는 공간에 위치한 개인 그 자체가 되며 조유정의 존재를 통해 기존 한국 영화와 달리 <헌트>는 자신만의 독특한 위치를 가지게 된다.
3.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는 <헌트>의 회한 (2) : 한국 근현대사의 <날씨의 아이>
출처. 왓챠피디아
<헌트>는 표면적으로 봤을 때 안기부 해외팀과 국내팀의 갈등과 그로 인해 스스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 군부 독재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해외팀 차장 '박명호'와 국내팀 차장 '김정도'는 안기부의 북한 프락치인 동림을 발본색원 하기 위해 안기부의 살을 깎아먹는다. 군부 독재의 시스템에서 감시는 정권에 의한 민중 감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인 인간과 자유가 말살된 노예 사이 모순과 그에 따른 변증법의 과정으로 인간은 결국 예속과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는 것을 밝힌 헤겔의 관점에서 알 수 있듯 군부 정권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정권 그 자체를 제외하면 그 내부의 모든 일원을 서로가 서로를 감시할 때 유지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감시가 독재 정권이 지닌 한계이자 결국 정권 자체를 무너뜨리는 시발점 중 하나라는 것이다. 계단을 구르며 서로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박명호와 김정도의 모습은 결국 나락으로 떨어질 군부 독재의 모습과 다름없다.
군부 독재가 지닌 한계는 안기부라는 권력 단체에 있으면서도 정권 해체를 바라는 박명호와 김정도라는 인물 자체에서도 드러난다. 북한의 프락치 집단인 동림의 일원으로 한반도의 평화 통일을 바라는 박명호와 국민을 지켜야 하는 군인이 권력을 위해 국민을 학살한다는 모순에 스스로 자정하고자 하는 군인 출신 김정도는 서로 다른 꿈을 꾸지만 동시에 군부 독재 해체를 원한다.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다는 점에서 박명호와 김정도의 갈등은 당연한 수순이면서도 이들이 결국 같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헌트>는 두 인물의 시선이 똑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통해 보여준다. 워싱턴 정상회담 현장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는 교민의 시위를 바라보는 박명호와 김정도의 시선은 정문의 유리에서 교차하면서 나타나지만 동시에 동일한 방향으로 향해 있다. 나아가 방콕의 정상회담에서도 지속적으로 1호가 회담 장소에 도착했는지 여부를 확인하며 정문을 바라보고 있는 박명호와 김정도의 시선은 잠깐의 동맹이라고 해도 바라보고 나아가는 목표는 같아 보인다. 하지만 1호를 암살하려는 김정도를 방해하면서 결국 1호를 살리기로 결정하는 박명호의 선택은 이 둘이 바라는 목표가 결국 다르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리고 둘의 선택에서 결정적인 차이는 조유정으로부터 기인한다.
출처. 왓챠피디아
김정도는 자국민을 수호해야 한다는 군인으로서 목표와 의무에 따라 군부 독재를 자정하고자 하는 인물이다. 신군부 혁명(?) 세력을 혁명해 새로운 정권을 만들려는 반군부 세력에게 자신들이 하려는 것은 혁명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하게 발화하는 김정도는 남한 국민이라는 공동체에 대한 사죄를 목표로 한다. 광주민주화항쟁 당시 11세의 어린이의 가슴을 관통한 탄환을 기억하며 눈물을 삼키는 김정도는 군인으로서 목표와 의무를 다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는 인물이나 동시에 같은 군 부대에서 근무했으며 동지인 최사장을 전기 고문으로 죽이는 선택을 한다는 점에서 대의를 선택하는 인물이다. 남한의 민주주의에 현실적으로 가까운 인물이지만 김정도는 기존의 한국 영화와 같이 한국 민중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헌트>가 기존의 한국 영화와 연결되는 지점이자 동시에 1980년대에 대한 한국 영화의 한계를 보여주는 인물인 것이다. 피의 민주주의 역사에서 한국 민중이라는 집단으로 수렴하기만 한 기존 한국 영화의 한계는 회담 장소를 파괴한 폭탄의 파편을 가슴에 박은 채 "박명호!"를 외치며 대의에 대한 배신에 분노하는 김정도의 모습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영화 내 박명호의 위치는 김정도와 달리 복잡하다. 13년이라는 세월 동안 안기부에 암약한 북측 프락치 동림인 박명호는 군부 독재의 하수인이면서도 평화통일을 위해 남한 1호를 제거하려는 암살자이다. 하지만 박명호의 복잡한 위치는 일본에서의 정보원이자 자신을 감시하던 북측의 스파이인 조원식의 죽음 이후 딸이라고 등장한 조유정을 대하는 모습에서 더 명확히 드러난다. 총에 맞아 죽어가는 가운데 "내가 죽으면 곧 다시 다른 누군가가 올거야."라는 조원식의 말에도 불구하고 박명호는 조유정을 크게 의심하지 않는다. 조원식의 유언(?)에서 조유정이 북측에서 보낸 자신의 감시자라고 의심할 수 있음에도 박명호는 그가 원식의 딸이냐고, 나이가 몇이냐고 물을 뿐 따로 신원 조사를 하지 않는다. 조유정이 운동권 학생들과 몇 번이나 접촉하고 자신을 도와달라고 할 때는 싫은 티를 낼지언정 거절하지 않는다. 나아가 안기부로 끌려간 운동권 학생들의 상황을 알려달라는 조유정에게 더이상 나서지 말라고 말한다. 북측 중심의 통일을 위해 남한에 암약한 스파이임에도 박명호는 조유정을 의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마음을 쓰면서까지 조유정 개인을 아끼고 안위를 살핀다.
출처. 왓챠피디아
이러한 박명호의 모습은 남한 민중을 향한 사죄와 군부 정권의 해체를 원하는 김정도와 비교하면 흥미롭다. 자신을 동림으로 의심하는 남한 안기부 직원과 함께 동림에게 사로잡혀 고문 받는 박명호는 동림의 총책인 천보산이 1호를 죽이는 즉시 적화통일을 위한 북측의 행보가 시작될 것이라는 말에 평화통일을 위해 자신은 지금까지 노력했다고 말한다. 여기서 박명호는 전쟁에 의한 통일을 반대하면서도 북측 중심의 평화 통일을 주장하는, 북한이라는 공동체를 대표하는 인물로 보인다. 하지만 잠깐의 동맹을 위해 김정도가 구해준 뒤에 박명호는 가장 먼저 조유정을 남해의 외딴 절로 보내면서 남한에서 무슨 일이 있든 절대 절에서 나오지 말라고 한다. 김정도를 사찰하면서 연관되어 있는 군수업체를 과감하면서도 치밀하게 조사한 모습과 달리 박명호는 자신에게 조금은 가벼워지라고, 편안해지라고 말했던 감시자의 딸 조유정에게는 스파이가 아닌 무뚝뚝하지만 어떻게든 자신이 아끼는 조카와 같은 이를 지키겠다는 아저씨의 모습을 보인다. 즉, 박명호는 자신의 조국인 북한보다 조유정을 더 먼저 생각하며 북한의 행보에 의해 조유정이 어떤 위협도 받지 않는 것을 원한다.
출처. 왓챠피디아
방콕의 정상회담에서 적화통일을 위하는 북측 저격병과 군부 정권의 자정을 원하는 김정도가 자신이 지금까지 원한 남한 1호의 암살을 원하고 있음에도 박명호가 계속해서 갈등하는 이유이자 암살을 방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남한 1호의 암살은 남한 민중에 대한 사죄와 민주주의 정권의 시작일 수 있지만 동시에 북측의 적화통일 즉, 전쟁의 포화가 시작되는 사건이다. 전쟁은 약 1주일 정도만에 결과가 나타날 것이지만 동시에 수백만의 희생을 야기하며 그 수백만에는 남해로 피신해 있는 조유정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북한도 남한도 아닌 조유정이라는 개인을 위해 남한 1호 암살을 막는 김정도는 북측 스파이들에게 제거 당하는 순간에도 조유정에게 한반도를 떠날 수 있는 여권을 건넨다. 김정도가 조유정에게 건네는 여권은 갈등, 피, 눈물로 얼룩진 1980년대 한반도라는 공간에서 벗어나라는 외침이면서도 공동체와 대의에 스러져간 개인에게 동시대를 살았던 군부 독재의 망령이 남기는 현재의 회한이다. 오로지 공동체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피와 눈물을 흘리며 죽어간 개인을 위한 위령제이자 개인을 희생시켜야 했던 격동의 역사에 대한 후회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이러한 지점에서 <헌트>는 신카이 마코토의 <날씨의 아이>를 떠올리게 한다. 날씨를 조종할 수 있지만 그 끝에는 결국 존재의 소멸로 이어지는 소녀를 구하는 소년의 사랑은 일본 전체에 엄청난 폭우를 부르고 일본의 전 국토는 물에 잠기는 아포칼립스를 맞이한다. 하지만 소녀를 구한 소년에게 사설 탐정은 굳이 미안해 하지 말라고, 소녀를 구한 것에 절대 후회하지 말라고, 그 사랑의 감정에 그 누구도 원망할 권리는 없다고 말한다. 공동체와 대의를 위해 개인은 희생 당해서는 안 된다는 <날씨의 아이>처럼 <헌트>의 김정도는 조유정을 피의 민주주의 역사와 남북한 갈등의 역사와 무관한, 민주주의 역사에서 희생 당한 개인으로 인식해 구하며 독재 정권의 망령의 떨리는 손으로 여권을 건네며 사라지는 것이다. 여권을 받은 조유정이 망령의 시체를 뒤로 하고 차에서 나와 북측 스파이들을 향해 총을 쏘며 다시 피를 흘리는 모습은 피와 눈물로 얼룩진 1980년대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성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현대에서 전하는 회한을 더욱 짙게 한다. <날씨의 아이>의 탐정은 관객에게 소년의 선택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과 달리 <헌트>의 마지막 총격은 1980년대 근현대사에 대한 현대의 회한에 방점을 찍으며 관객에게 회한의 감정을 전달한다.
기존 한국 영화와 마찬가지로 <헌트>는 피로 얼룩진, 격동의 1980년대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위령제이다. 하지만 기존 한국 영화는 피와 눈물로 가득한 민주주의 역사를 트라우마로 간직한 한국 민중이라는 공동체를 위한 감성의 위령제이다. <헌트>는 첩보와 액션이라는 지극히 이성적인 행위에 기반해 수많은 정보를 남발하는 가운데 관객을 정신없이 만들면서도 대의와 공동체에 가려진 개인을 위한 위령제를 펼친다. 위령제의 끝에서 개인은 결국 역사의 격랑에 휩쓸려 죽는 것으로 보이며 이는 <헌트>의 한계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마지막 조유정 개인의 선택은 경계성의 위에서 어느 한 집단으로 향하지 않은 채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친 김정도 개인을 위한 분노이자 공동체가 아니라 공동체 내 개인을 위해 달성되어야 했던 민주주의가 결국 개인을 희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에 대한, 그러지 말아야 했다는 과거를 향한 회한의 위령제라는 점에서 <헌트>는 기존의 한국 영화와 차별점을 갖는다. 과거의 남겨진 개개의 영혼들을 위해 우리는 풀지 못한 채 남겨진 과거사를 부단히도 그리고 차근차근 위령제를 준비해야 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