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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Oct 05. 2022

불을 켤 수 없는 공간과 존재의 불안

라이카 시네마. 홈리스.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의식주(衣食住). 인간이 살면서 가장 기본으로 갖춰야 하는 3가지 요소이다. 이 중 집에 해당하는 주(住)는 집 주인(人)이 켠 촛대의 불(主)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먹는 것(食)과 입을 것(衣)을 모두 갖춘 주인만이 한 공간을 밝힐 불을 켤 수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촛대처럼 어떤 한 공간의 불을 밝힐 수 있는 도구는 휴대가 불편하다. 어느 한 공간을 밝히기 위한 촛대와 같은 도구는 애초에 이동을 전제로 하고 있지 않다. 자신이 밝혀야 하는 공간을 비슷한 밝기로 매일 꾸준히 자신을 태워야 하는 도구인 것이다. 즉,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그 공간에 녹아든 공간-도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주(住)는 평생 일을 하며 돈을 모아도 편하게 자기 몸을 뉘일 집 하나 마련하기 어려운 현대의 관점에서 봤을 때 안정감만이 아니라 굉장히 무거운 답답함을 가지고 있는 글자인 것이다.


1. 공간과 존재 : 무지반성(Unheimlichkeit)

인간이 느끼는 불안과 관련된 하이데거의 무지반성(Unheimlichkeit)에서 Unheim은 집(Heim)이 없는(Un) 상태를 의미한다. 이때의 집은 자신이 왜 존재하고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를 사유하기 위한 공간을 의미한다. 존재가 의식에 선행한다는 주장으로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 명제를 반박하는 하이데거에게 근대인들은 지나치게 새로움이라는 결과에 집착하는 이들이다. 다가가면 다시 멀어져 결코 오지 않을(近代) 완벽한 새로움을 추구하느라 왜 존재하고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를 망각한 채 살아간다. 토대를 다지지 않은 채 계속해서 쌓기만 해서는 언제든 무너질 집이 될 뿐이다. 마찬가지로 결과 중심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은 자신이 불안정한 사유의 토대 위에 있다는 섬뜩함을 무의식에 내재하고 있을 뿐이다. 존재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순간 존재의 불안이라는 섬뜩함은 무의식이 아니라 의식의 차원에서 인간을 불안으로 흔든다.

출처. 왓챠피디아

이러한 하이데거의 사유를 시공간과 인간의 존재 인식에 덧붙여보자. 인간은 시간과 공간 중 공간을 통해서 더 쉽게 자신의 존재를 인식한다. 둘을 분리하는 것이 가당키나 하겠느냐마는 악마의 게임이라는 예시들만 봐도 시간은 의식하고 있지 않으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는 일이 수두룩하다. 반면 공간은 감각을 통해 가장 먼저 그리고 항상 인지된다. 인지할 수 있는 범위 내의 공간에 무엇을 감각하고 있는지를 통해 인간은 세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일차적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규정을 기반으로 인간은 세계와 자신의 관계를 확인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의심없이 받아들인다. 그렇기에 한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불안하게 느끼도록 하려면 그 인간이 존재하는 공간을 불안정하게 만들면 된다. 관계를 맺으며 함께 세계를 구성하고 있던 존재들이 모두 거짓으로 느껴질 때 인간은 자신의 존재마저 의심하게 된다.


그렇다면 현대 한국 사회에서 자신만의 공간인 집을 소유하고 있느냐의 문제는 개인의 존재가 온전하냐의 문제로 연결된다. 개인이 집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사회와 무관하게 존재할 수 있는 개별적이고 특별한 공간이 있다는 의미라고도 할 수 있다. 소유한 집은 개인의 취향으로 꾸며진 공간이기 때문이다. 취향 존중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취향은 개인에게만 국한된 것으로 자기 존재의 표현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존재함을 사유해야 한다는 하이데거는 존재함이란 자신이 살고 있는 시공간에서 왜 존재하며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이를 자신만의 주제로 드러내는 것이라 말한다. 즉, 개인 공간은 오로지 한 인간의 존재만이 온전히 표현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현대인에게 정말 취향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는 잠시 제쳐두자. 중요한 것은 개인 공간에서 인간은 잠시지만 이동을 전제하지 않은 촛대처럼 공간에 녹아든 공간-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산업 사회 이후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의 분화가 당연하다는 듯 자리잡은 시대에 집이라는 공간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그만큼 더욱 중요해졌다. 하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자본으로 활용해 타인과 경쟁하며 항상 새로움을 추구해야 하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개별 공간을 온전히 갖는 것은 아주 극소수의 개인을 제외하면 불가능하다. 월세와 전세의 계약에 묶인 공간, 언제 물이 잠길지 모르는 공간, 다른 누군가 침범하기 쉬운 공간 등. 거의 모두가 어떻게든 몸은 뉘일 수 있을지라도 공간을 소유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온전하지 못한 존재를 가지고 있다. 불을 켤 수 있을지언정 저 불은 공간에 녹아 있되 공간과 '나'는 분리되어 있으니 불 켜는 행위를 할 수 있어도 공허할 뿐이다. 자기만의 주제화가 불가능한 무색무취의 공간에서 인간은 언제나 존재의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다.


무색무취한 공간이라도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현실적으로 무색무취한 공간이라 해도 자기 존재의 주제인 취향을 어떻게든 표현할 수 있으니. 진정으로 무색무취한 공간은 개인 공간 외부의 타인과 교류하는 사회이다. 그 사회를 떠도는 개인들은 존재를 유지하기 위한 경계를 끊임없이 사회에게 침범당한다. 보증금 사기, 밀린 월급, 아기의 분유값 등. 자신을 위한 공간이 없는 개인들은 당장 이 순간만이 아니라 내일도 생존 경쟁이 지속될 것이라는 섬뜩한 사실을 깨닫는다. 영화 <홈리스>의 한결과 고운이 느끼는 불안은 집이라는 사적 공간이 없음(less)이라는 불안정에서 오는 것이다. 흔들리지 않는 집(지반) 없이 매일 이동해야 하는 삶에서 다가올 내일은 기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밀어내고 피하고 싶은 것일 뿐이다. 당장 지금 이 순간이 흔들리고 있기에 다가올 내일은 가능성이 아니라 짐작할 수 없는 공포에 불과하다.


2. 관찰을 넘어 불안을 일깨우는 시선

한결과 고운이 느끼는 삶의 불안과 공포는 <홈리스>를 보는 관객에게도 그대로 느껴진다. 카메라라는 시선을 통해 보는 영화에서 관객에게 인물의 삶은 근본적으로 하나의 관찰 대상일 뿐이다. 관객과 인물 사이의 스크린은 관객에게 인물의 삶이 허구라는 것을 끊임없이 인식시키는 경계이다. 하지만 관객은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라 공감자이기도 하다. 관찰하는 시선인 카메라가 인물을 계속해서 조명하는 이상 관객에게 허구의 인물은 단순한 관찰 대상이 아니라 최소한 상영 시간 동안 완전히 함께 하는 것은 아니나 동일한 서사를 여행하는 동행자이다. <홈리스>의 카메라는 끊임없이 한결과 고운을 화면에 담아 관객의 시선이 한결과 고운을 떠나지 못하도록 한다. 한결과 고운 주변의 다른 인물들은 카메라의 시선에서 스쳐지나갈 뿐이다. 관객이 잊고 있던, 사회를 떠도는 개인이 될지 모른다는 공포가 관객에게 각인된다.

출처. 왓챠피디아

모델 하우스와 찜찔방을 전전하며 겨우 모은 보증금으로 이제 곧 이사할 새 집을 기대하던 한결과 고운의 꿈은 보증금 사기로 연기처럼 사라진다. 하지만 영화의 전개 속도는 빨라지지 않는다. 서사는 비슷한 속도로 전개되는 가운데 카메라는 한결같이 한결과 고운을 관찰하며 담을 뿐이다. 마치 한결과 고운을 관찰하는 다큐멘터리 같다. 한결과 고운을 중심으로 화면은 구성되고 다른 인물들은 화면 바깥에서 목소리로만, 혹은 한결이나 고운과 함께 화면에 비춰진다. 때때로 한결 혹은 고운의 시선이 관객의 시선 즉, 카메라와 일치되면서 대상을 바라본다. 생존 경쟁 사회에서 언제 낙오되어 무색무취한 공간을 떠돌게 될지 모를 공포가 시선이 모이는 한결과 고운으로 응축된다. 한결과 고운의 모습은 그 자체로 인정하고 있지 않았을 뿐 무의식에 내재한 관객 자신의 공포 그 자체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아기까지 지켜야 하는 상황에서 평소 한결을 좋게 봐주던 할머니의 집에 무단으로 들어가 살기 시작하는 한결과 고운의 모습은 더욱 위태로워 보인다. 언제 다른 누군가 찾아와 할머니를 찾지는 않을까, 아무것도 모른 채 들어온 고운이 혹시 무슨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나중에 나갈 때 지문이 남아 있지 않을까 걱정하다 겨우 잠에 든 한결은 누구도 누른 적 없는 초인종 환청을 들으며 깬다. 그에 맞춰 조금씩 흔들리는 카메라의 끝에 공포가 가득한 한결의 눈이 보인다. 썩어 문드러진 할머니의 시체를 발견한 고운은 모든 것을 숨기고 집에 들인 한결을 원망하는 와중에도 어디로도 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절대 나갈 수 없다며 독기로 눈을 채운다. 할머니와 관계된 모든 물건을 집 밖으로 꺼내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카메라는 그만큼 자기 자신의 어떠한 모습도 드러낼 수 없는 무색무취한 공적 공간에 대한 공포가 고운에게 오래되어 단단히 박혔음을 알게 한다.

출처. 왓챠피디아

한결도 고운도 알고 있다. 할머니의 집은 절대 자신들의 집이 될 수 없음을. 이 집은 절대 불을 키며 푹 쉴 수 있는(住) 공간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미 너무 오랫동안 떠돌아다닌 이 둘에게 할머니의 집은 떠날 수 없는 공간이다. 할머니의 시체에서 나온 바이러스에 아기가 감염되었지만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다시 저 무색무취한 공적 공간에서 생존을 위해 떠돌아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배달을 왔을 때 할머니가 챙겨준 스시를 먹은 기억과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지쳐버린 밤이 교차한 가운데 죽은 할머니의 환영과 마주한 한결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저희 여기서 조금만 더 살면 안 돼요?" 한결은 눈과 손을 떨며 배달 사장님을 배신하고 금고의 돈을 털었다. 고운은 독기를 채운 눈으로 할머니의 시체가 방치됐던 방을 철수세미에 락스를 묻히고 박박 닦는다. 한결과 고운을 바라보는 카메라는 더 이상 떨리지 않는다. 관객은 이보다 더 커질 수 없는 불안을 안고 떨고 있음에도 말이다.


한결과 고운의 지반은, 공간은 여전히 불안하다. 찾아온 사회복지사에게 손자라고 말하는 한결의 눈은 차오르는 불안을 애써 숨긴다. 의아해하는 사회복지사의 모습은 한결과 고운에게 불안한 현실이 언제고 다시 찾아올 것임을 암시한다. 카메라는 더 이상 떨리지 않지만 한결과 고운의 공간은 마냥 편안하지 않다. 자신들이 죽인 것은 아니지만 집을 무단으로 사용하기에 도의상 할머니를 마당에 묻고 제사까지 지냈으나 그 때문에 더욱 불안하다. 무단 입주 첫 날 맛있게 담갔다고 말하며 먹은 김치는 애써 무시하는 불안에 타들어간 속마냥 어느새 너무 쉬어버렸다. 하지만 버릴 수 없다. 참고 다 먹지 않으면 숨겨둔 불안이 금새 다시 고개를 쳐들 것이다. 조금만. 조금만 더. 새 집을 살 수 있는 보증금을 다 모을 몇 년 동안만이라도 불안이 고개를 쳐들지 않길 바라며 우걱우걱 밥을 씹는다. 여전히 불을 키며 마음 편히 몸을 뉘일 수 없는 공간을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서늘하게 채운다. 소리는 스크린을 넘어 관객에게 노크한다. 당신은 지금 어떤 공간에 있는지 물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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