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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Oct 12. 2022

인간을 찾을 수 없는 연극의 비극

명동예술극장. 세인트 조앤.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역사에서 남성과 여성이 겉으로나마 동일한 권리를 얻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20세기 초 여성의 참정권 운동이 있기 전까지는 사회에서 여성의 권리는 같은 공동체의 남성과 관계를 맺을 때 생기는 제한적인 권리를 제외하면 인간 그 자체로서 권리는 없다시피 했다. 가정을 제외한 외부 세계에서 여성이 활동할 수 있는 경우는 없었으며 가정 내에서도 남성 가장에 의해서 생활을 제한받았다. 여성은 인간이었음에도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했으며 항상 불완전한 존재 혹은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여겨졌다. 그렇기에 역사에 이름을 남긴 여성은 보통 악한 존재로 등장한다. 가정을 나와 인간 세계를 악으로 물들인 희대의 악녀. 하지만 아주 가끔 여성임에도 선한 존재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경우가 있다. 인간인 남성들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상황을 경이로운 능력으로 극복한 성녀. 여성은 이름을 남기는 상황에서도 인간이 아닌 존재로 기록된다는 재밌으면서도 슬픈 사실이다.


이같은 사실과 비슷하게 명동예술극장에서 상연되고 있는 <세인트 조앤>은 잔다르크를 인간이 아닌 성녀로 재현하고 있는 듯하다. 아직 여성의 권리가 남성만큼도 되지 않았던 시기이자 그렇기에 무대에 여성 배우가 서는 것조차도 금기시되던 시기에 여성 인물이 주인공인 이 텍스트는 당대에도 굉장히 혁명적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잔다르크라를 영웅이자 성녀로 기억할 뿐 여성이자 그 이전에 인간이었음을 기억하지 않는 현실에서 잔다르크를 조명한다는 점에서 <세인트 조앤>은 풍자극이자 비극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명동예술극장의 <세인트 조앤>이 잔다르크를 여성이자 그 이전에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조명하고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남성 인물을 중심으로 인간이란 무엇인지 고뇌하던 기존 연극과 달리 여성 인물을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고뇌해야 하는 <세인트 조앤>이 여전히 잔다르크를 여성-영웅이자 성녀로 그린다는 점은 또 다른 의미에서 비극이다.

1. 호모 사케르(Homo Sacer)와 여성

명동예술극장의 <세인트 조앤>이 잔다르크를 여성-영웅이자 성인으로 그리고 있다는 지점은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의 호모 사케르를 통해 사유할 수 있다. 호모 사케르는 인간임(Homo)에도 인간이 아닌(Sacer) 존재를 가리킨다. 번역하면 신성한 혹은 바쳐진 인간이라는 의미인 호모 사케르는 고대 사회 때부터 존재했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신에게 바쳐져 신성을 얻은 인간을 가리키는데 당시 사회에서 호모 사케르는 죽인다고 해도 사회적으로 문제가 없었다. 신에게 바쳐져 신의 소유이자 신성을 갖게 된 인간인데 죽여도 된다니. 어딘가 모순되어 보인다. 하지만 다르게 보면 호모 사케르를 죽이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殺人)이 아니다. 신에게 바쳐지는 순간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된다. 인세(人世)에 존재하는 것은 어떤 존재의 육체일 뿐 영혼은 이미 천상에 귀속된 존재이다. 즉, 호모 사케르는 파괴되는 사물일지언정 죽임을 당하는 인간이 아니다.


신은 인세를 창조했으나 인세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줘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간접적으로 인간과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하며 인세의 일은 인간이 책임을 질 뿐이다. 다만 아주 가끔 인간이 책임지기에는 공동체를 파괴할 정도로 너무나 강대한 사건에 대해서 인간은 신을 찾는다. 이 때 신은 인간 세계에 직접 강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존재를 매개로 강림한다. 즉, 호모 사케르는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영혼을 희생해(Sacer) 신성이 지상에 강림할 수 있도록 육체를 비운 존재이다. 죽음을 억압받아 살아 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존재(Undead)인 것이다. 르네 지라르(Rene Girad)가 말한 것처럼 호모 사케르는 인세에 감당하기 힘든 일의 모든 책임을 부과받은, 공동체의 회복을 위한 사회적 희생양이다. 어차피 모든 책임은 호모 사케르가 갖고 있기에 인간은 책임과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 희생에 대해서는 추모하면 그만이다. 어차피 인간으로 돌아올 수 없을테니.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와 관련해서 2차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감금된 유대인들을 살펴보자. 아우슈비츠에서 생존한 유대인인 프리모 레비(Primo Levi)는 <이것도 인간인가?>(원제, Se Questo e' un Uomo)를 통해 자신이 겪은 수용소의 실상을 전한다. 여기서 레비는 수용소의 지옥같은 생활로 인해 인간의 육체를 지녔으되 어떠한 감정 표현과 사유를 하지 못하고 타인과 관계도 맺지 못한 채 하루 종일 멍하니 하늘 혹은 땅을 바라보는 유대인을 무젤만(Muselmann)이라 지칭하며 인간인지를 묻는다. 인간의 육체를 지녔으되 영혼은 어디론가 가버린 듯 인간 세계를 둥둥 떠다니는 무젤만은 아무런 사유도, 표현도 하지 못한다. 즉, 무젤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어떠한 증언도 할 수 없다. 나아가 수용소 생활로 무젤만이 되었다가 겨우 살아남아 다시 인간이 된 레비 자기 자신도 무젤만에 대해서는 왜곡된 증언밖에 할 수 없다. 주체성을 잃어버린 무젤만은 누가 어떻게 증언할 수 있는가? 증언할 수 없는 존재인 무젤만은 인간인가?


자신을 증언할 언어가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존재라는 증거이자 발화 권력이 있음을 의미한다. 즉, 자신을 증언할 권력이 없던 여성은 역사에 악녀 혹은 성녀라 이름을 남긴 호모 사케르이자 무젤만이다. 여성은 관찰과 기록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관찰과 기록의 주체도 아니다. 악녀도 성녀도 아닌 채로 기록된 경우에는 남성의 역사에서 귀퉁이를 꾸며주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로 기록되며 악녀나 성녀로 기록된 경우에는 인간인 남성이 감히 감당할 수 없었던 어떤 존재로 기록된다. 육체는 분명 지상에 있었으나 영혼은 어딘가로 가버린 듯한, 원치 않는 희생을 하며 신성을 얻은 존재. 영국과 프랑스의 100년 전쟁에서 프랑스를 구한 잔다르크 역시 다르지 않다. 가장 대표적인 성녀이자 영웅으로 기억되는 잔다르크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인간이 아니라 악녀로 규정되며 화형에 처해졌다가 사후 성녀이자 성인으로 시복되었다. 살아있을 당시의 기록은 인간으로서 기록이 아니라 전쟁터에서 믿기 힘든 능력을 보인 영웅으로서 기록이 남아있다.

2. 인간 잔다르크와 성녀-영웅 잔다르크

잔다르크의 기록을 토대로 아일랜드와 영국의 작가 조지 버나드 쇼가 지은 <세인트 조앤>은 겉으로 보면 굉장히 성녀와 영웅으로서 잔다르크를 조명하는 대본이라 할 수 있다. 22명의 인물이 나오는 가운데 여성은 단 2명, 조앤과 공작 부인 뿐이다. 이 중 공작 부인은 대사도 별로 없거니와 조앤이 샤를 7세를 만나러 궁정에 왔을 때를 제외하면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즉, 이미 대본 자체가 남성 중심의 봉건 사회에서 잔다르크의 영웅성과 신을 향해 지극한 신앙심을 지닌 성녀라는 점을 부각하고 있는 듯하다. 명동예술극장의 <세인트 조앤>에서는 잔다르크의 성녀와 영웅으로서 이미지를 더 부각하기 위해 공작 부인은 아예 제외하기까지 했다. 대사도 별로 없을 뿐더러 극 중에서 오직 단 한 명의 여성인 잔다르크가 남성 중심의 사회와 궁정에서 자신을 향한 비웃음과 무시를 믿음으로 무장한 채 굳건히 서있는 모습은 가히 잔다르크를 성녀이자 영웅으로 보이게 한다.


하지만 <세인트 조앤>의 서사 전개와 잔다르크의 대사를 살펴보면 21명의 인물 중 잔다르크만 여성 인물로 설정한 것이 잔다르크를 성녀이자 영웅으로 재현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은 맥 빠지는 일이다. 로베르의 영지 장면을 시작으로 샤를 7세의 침실 장면으로 이어지는 <세인트 조앤>은 잔다르크를 단순히 남성만큼 혹은 보다 능력이 뛰어난 여성이기에 성녀이자 영웅으로 그리고자 하지 않는다. 잔다르크라는 인물을 오늘날 다시 보여주려고 했다면 잔다르크가 지닌 성녀-영웅과 인간이라는 복합성과 그러한 복합성의 발생 이유와 의미를 호모 사케르와 연결해 살펴봐야 하지 않았나 싶다. 신성과 영웅성이 아예 재현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신성과 영웅성은 잔다르크를 인간으로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나아가 신성과 영웅성은 자신들만을 인간으로 여긴 남성들에 대한 풍자이자 비판이다.


로베르 영지를 시작으로 오를레앙의 탈환까지 잔다르크의 비범함은 서사에서 중요한 요소라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이 연극에서 더 중요한 것은 무능함에도 잔을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 남성들의 모습이다. 우연이든 신의 개입이든 잔다르크는 어떤 어려움이든 해결할 수 있는, 요새 말로 하면 먼치킨류 주인공에 가깝다. 관객 입장에서 잔은 잔다르크에 대한 기록과 이미지를 기반으로 구축된 여성 주인공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이입하기 좋은 매력있는 인물은 아니다. 신의 축복을 받은 잔은 어떤 장애물이든 쉽게 해결할 테니까. 자신의 권위를 시종이나 잔에게 휘두르지만 정작 영국군에게는 두려움으로 가득한 로베르를 잔은 쉽게 설득할 것이다. 궁정 귀족을 한 번도 본 적 없음에도 다른 신하들과 똑같은 옷과 망토를 두른 샤를 7세를 잔은 쉽게 찾을 것이다. 어린 소녀라 무시하는 대주교를 몇 번의 말로 설득해 축복을 받을 것이다. 잔이 오자마자 불지 않던 서풍이 부는 것을 보고 뒤누아는 잔에게 선봉과 군 통수권을 맡길 것이다.

<세인트 조앤>의 남성 인물들은 단순히 당대 남성들의 무능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무능해 보이고 실상 모든 것을 잔에게 의지하는 모습에 비웃음을 받을지언정 남성들은 잔을 끊임없이 인간이 아닌 천사, 성녀, 영웅으로 부르며 호모 사케르로 만든다. 100년 전쟁 당시 영국군에게 연속해서 패배하고 일부 대귀족들이 영국군과 내통하며 국가가 멸망할 것 같은 절망감에 있었으니 인간인 남성들에게 기적을 일으키는 듯한 여성 잔의 모습은 천사이자 성녀이자 영웅으로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잔의 결말을 알고 있는 관객에게 위기를 쉽게 극복하며 천사, 성녀, 영웅으로 불리는 잔의 모습은 오히려 이면에서 쌓이고 있는 진정한 위기를 느끼게 한다. 종교 재판 이전까지 무능한 인간 남성들을 향한 비웃음은 연극의 세계에 관객을 몰입시킨다. 이를 통해 거의 3시간에 가까운 러닝 타임 동안 관객이 중간에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잔을 이용하면서도 잔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추앙하는 남성들에게 관객이 불안을 느끼도록 하는 이중 역할을 한다.


하지만 명동예술극장의 <세인트 조앤>은 오를레앙 탈환 이후 궁정에서 귀족들과 잔이 갈등하는 장면까지 남성들을 향한 비웃음을 적절하게 사용했다고 보기 어렵다. 오늘날의 관객이 연극보다 영화와 같은 영상 매체에 더 익숙한 것은 현실이다. 기술의 발전 속에서 영화의 액션은 더욱 다양하고 화려해지고 있다. 그에 반해 <세인트 조앤>은 너무 정적이다. 관객을 향해 열려 있을 뿐 길고 긴 대사를 정적인 자세와 액션으로 전하는 연기는 좁은 관객석에서 무대를 바라봐야 하는 관객에게 고역이다. 연극이 일종의 환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연출의 생각은 당대 시대상을 반영한 듯 품격이 느껴지는 대도구와 소도구, 배우들의 의상을 제외하면 환상보다 지루함을 먼저 가져온다. 무능한 인간 남성은 고리타분하게 보여 좁은 관객석을 더 좁게 느껴지게 해 비웃음보다 피로감을 먼저 느끼게 한다. 고풍스러운 대사가 공허하게 극장을 채우는 동안 관객은 무능한 인간 남성과 비범한 잔을 자세를 이리저리 고치며 간신히 참아낼 뿐이다.

인간 남성에 대한 비웃음이 쌓이지 않은 상태에서 잔이 자유로운 인간으로 남고자 하는 죽음을 택하는 종교 재판 장면은 갑작스럽게 느껴진다. 인간 남성에 대한 비웃음은 잔의 비범함이 아니라 잔을 하나의 상징으로 이용해 위기를 극복하면서도 절대 잔을 인간에 위치시키려고 하지 않는 세계의 비극성을 돋보이게 한다. 하지만 관객은 비웃음이 아닌 지루함과 피로감 뿐이다. 잔을 인간이 아닌 악마에 꼬임에 넘어간 어리석은 소'녀'이자 마'녀'로 분리하는 남성 종교인들의 행위는 여성을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 않는 당대 사회와 당대 사회를 통해 오늘날의 사회를 되돌아보게 하지 못한다. 그저 당대 시대상을 반영한 정적인 연기와 그러한 경직된 사회에서 자신의 능력에도 불구하고 마녀로 몰린 비극적인 여성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가정 내로만 제약된 여성의 행위를 넘어서 다른 인간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자유롭게 세계에서 말을 달리고 싶다는 잔의 외침은 자신을 동등한 인간으로 봐달라는 외침이 아니라 시대상 휩쓸린 비극적인 여성만을 보여준다.

이 연극의 핵심 장면인 잔 사후 25년이 지난 샤를 7세의 침실 장면에서도 잔은 여전히 비극적인 여성일 뿐이다. 종교 재판으로 화형을 당한 잔은 25년이 지나서야 재판이 잘못되었다는 판결을 통해 마녀에서 벗어나게 되고 카톨릭 교회에서는 잔을 1909년에 시복, 1920년에 시성하며 교회에서 인정하는 성인이 된다. 죽은 잔은 샤를 7세의 꿈에서 자신의 죽음과 관련된 인물들에게 웃으며 물어본다. 그럼 이제 자신이 다시 인간으로 돌아가 당신들 곁으로 가도 되겠느냐고. 거짓된 신성을 부여받아 마녀로 몰려 죽은 잔에게 사과하고 결국 성인이 된 것을 축하하며 잘못된 일이 바로잡혔다고 말하던 인물들은 굳은 얼굴로 온갖 핑계를 대며 절대 인간으로 돌아오지 말라고 한다. 자신은 충분히 죄책감을 느꼈으니 죽을 때는 편하게 죽고 싶다고. 같이 말을 몰며 전쟁터를 누비고 싶지만 자신은 잔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정치적인 일은 잘못될 수 있어도 그 당시에는 필요한 일이었다고. 핑계의 끝에서 잔은 성인으로 남되 인간이 되지는 못한다.


마지막까지 인간 남성들의 모습은 자신의 책임을 끝까지 피한다는 점에서 비겁하고 우스꽝스럽다. 하지만 인간 남성을 향해 관객이 비웃게 되더라도 잔은 비극적인 여성이자 성인으로 남는다. 하느님에게 언제쯤 진정한 의미의 하느님 나라가 올지를 묻는 잔이 무대 중앙에 서는 순간 빛나는 하얀 봉이 가로로 잔의 뒤에 자리하며 십자가를 형성한다. 무대 전체의 조명이 어두워지는 가운데 밝게 빛나는 흰 봉의 후광을 통해 잔은 시대의 비극 속에서 스러져 간 여성과 비극에 대한 보상으로 성인의 상징이 된다. 여성처럼 길쌈과 같은 집안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병사처럼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 자유롭게 들판을 달리는 인간이 되고 싶었던 잔은 빛나는 십자가의 후광을 통해 원치 않는 신성을 획득하며 호모 사케르가 될 뿐이다. 여성 인물을 통해 인간을 보여주고자 했던 혁명, 인간 남성에 대한 풍자, 인간이 되지 못한 여성에 대한 비극은 모든 의미를 상실한다.

잔을 태운 불길은 잔을 마녀로 만들고 잔에게 후광을 비추는 빛은 잔을 성인으로 만들었다. 잔을 보며 인간은 자신의 죄책감을 느끼며 인간임을 깨닫고 잘못된 일을 바로 고치며 정의로운 존재로 나아간다. 그저 인간이길 원했던 잔은 여전히 인간을 위한 어떤 상징으로 남아 살지도 죽지도 못한 호모 사케르가 된다. 그리고 명동예술극장의 <세인트 조앤>은 다시 한 번 잔을 살리고 죽이면서 잔이 지닌 여성, 성녀, 영웅의 상징을 강조할 뿐이다. 관객이 인간 남성을 향해 온전히 비웃지 못하게 하고, 비웃음에도 잔을 향한 비극적 결말에 불안도 좌절도 느끼지 못하게 하며, 여전히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인간인지, 인간다움이란 대체 무엇인지를 잔의 상징으로 가린다. 끝내 인간이 되지 못한 잔을 애도하며 현실에서 자신은 인간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으며 사회에서는 누구를 인간으로 보고 있는지 생각하지 못하게 한다. 그저 인간으로 돌아오지 못할 잔을 향해 약간의 추모만 공허하게 극장을 떠돈다. 대체 이 연극 어디에 인간이 남아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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