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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Oct 25. 2022

허무한 세계를 채우는 인연의 기적

건대. CGV.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가능성이라는 말에는 긍정 혹은 부정의 의미가 없다. 가능성은 실현될 수 있는 정도를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가능성에 대해서 얘기할 때 우리는 대체로 실현될 수도 혹은 그렇게 되었다면과 같은 긍정의 의미를 전제한다. 실현이 안 될 수도 혹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과 같은 부정의 의미는 잊힌다. 긍정의 의미만 남은 가능성은 지금 여기의 현실 대신 더 나은 대체 현실 혹은 최고의 현실을 상상하게 한다. 이 과정에서 가능성이 지닌 공포의 속성은 잊힌다. 실현이 안 될 수도 혹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과 같은 부정의 의미가 공포의 속성이 아니다. 멀티버스로도 불리는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 태어난 순간부터 가지치기하듯 뻗어나가는 수많은 가능성의 세계는 생각만 해도 짜릿하다. 지금의 자신이 원했던 삶을 어떤 세계의 자신은 살고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하지만 과연 자신이 원했던 삶을 산다고 해서 정말 행복한 지는 알 수 없다. 게다가 원했던 삶을 산다고 해도 결국 어느 순간 끝에 도달하는데 그렇다면 행복도 의미가 없다. 가능성은 허무라는 공포를 내재하고 있다.

출처. 왓챠피디아

이러한 허무의 공포는 인간의 삶을 파괴한다. 과거를 거쳐 현재에 도달해 미래로 나아가고 있는 시공간 위에서 살지 못한다. 지나간 사건은 지금에 영향을 미쳤으며 지금의 사건은 오게 될 때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니 자기 삶에 권리도 책임도 못 느낀다. 무엇을 하든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살지도 죽지도 못한 존재(Undead)가 될 뿐이다. 재밌는 것은 끝없이 펼쳐진 공허를 깨어 살아가다 죽을 수 있는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이 모순되게도 가능성이라는 것이다. 가능성이 지닌 공포가 아니라 가능성이 지닌 희망의 속성 때문이다. 실현될 수도 혹은 그렇게 되었다면과 같은 긍정의 의미가 희망의 속성이 아니다. 예측할 수 없는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에서 지금 이 순간을 당신과 함께 채우고 있다는 것은 또다른 의미에서 짜릿하다. 대체 어떻게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 바로 여기에서 만나 함께 하고 있는가. 가능성이 지닌 희망은 바로 기적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 당신이라는 존재와 함께 하고 있다는 기적이 우리의 삶이 허무에 짓눌리지 않도록 지탱한다. 영화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이하, <엡엡올>)가 가볍고 우스운 B급스러움을 추구하는 와중에도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유이다.


1. 현실적 이상주의자 공자 : 팽창하는 관계 철학

“나는 새는 잘 난다는 것을 알고, 물고기는 헤엄을 잘 친다는 것을 알며, 짐승은 잘 달린다는 것을 안다. 달리는 짐승은 그물을 쳐서 잡을 수 있고 헤엄치는 물고기는 낚시를 드리워 낚을 수 있고, 나는 새는 화살을 쏘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용이 어떻게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 위로 올라가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오늘 나는 노자를 만났는데, 마치 용과 같은 존재였다.”

노자와 대담한 후 제자들에게 공자가 한 말 中

영화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잠시 노자와 공자의 철학을 돌아보자. 인연을 소재로 하니까 불교로 이야기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노자와 공자의 철학도 인연에 대한 사유를 내포하고 있다. 생몰연대가 겹칠 가능성이 적고 애초에 노자라는 인물이 실존했는지 여부를 파악하기 어렵기에 노자와 공자가 만났을 가능성은 적다. 하지만 두 철학자가 만나 서로의 사상을 나누었다는 이야기 그 자체만으로도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일 것이다. 아마 그런 상상에서 만들어진 듯한 이야기의 끝은 공자가 노자를 용과 같은 인물이라 평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굉장한 극찬인 것처럼 보이는 이 말은 동시에 굉장한 비판이기도 하다. 공자의 말을 살펴보면 공자는 새, 물고기, 짐승 등이 어떻게 살고 있으며 어떻게 해야 잡을 수 있는지 등 세계의 이치를 잘 알고 있다. 이는 노자 역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용인 노자는 이토록 당연한 세계의 이치를 다른 인간들은 왜 이해하지 못하고 그에 맞게 살지 못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공자가 보기에 세계의 이치가 단순하다 하여 그 세계에서 사는 방식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터인데 이미 앞서서 세계를 이해하고 어찌 살아야 할지 알게 된 노자는 지나치게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물처럼 보인 것이다.


노자와 공자의 철학은 각각 전체에서 개별로, 개별에서 전체로 나아가는 철학이라 할 수 있다. 노자는 세계가 유(有)와 무(無)가 함께 존재(相生)하는 즉, 서로 다른 존재들이 관계를 이루며 함께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세계를 살아가는 존재들은 모두 평등하며 그 가운데 인간은 무지무욕(無知無欲)한 상태로서 소박(素樸)을 의미하는 박(樸)을 내재하고 자신의 욕망이 어느 정도에서 만족하는지를 알고 이해하려는 자세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노자는 소국과민(小國寡民)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최대한 작은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갈 것을 주장한다. 공동체가 크면 클수록 공동체 내부에서 욕망이 충돌해 갈등이 발생할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외부로 욕망을 팽창해 더 큰 갈등이 발생하여 세계가 혼란해진다는 것이다. 최대한 작은 공동체를 이루고 자신의 욕망을 이해하며 관계를 파괴하지 않을 정도로 조절하는 인간의 상태를 노자는 현동(玄同)이라 말한다. 드러나지 않음 혹은 눈에 보이지 않음이라는 의미인 현(玄)이 모두 같다(同)는 의미니 세계의 모든 존재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한 채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자신의 위치에서 적절한 욕망을 충족하며 사는 것을 말한다.


공자가 노자의 철학을 이해하지 못했을리 없다. 다만 노자의 철학은 세계 전체를 이해한 다음 개별자들의 행동론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전체에 대한 이해는 필요하지만 전체를 이해했다고 해서 개별자들이 전체에 맞게 각자의 삶을 조절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애초에 그렇게 살 수 있었다면 천하무도(天下無道)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공자가 노자의 철학을 평범한 인간들을 고려하지 않는 용 즉, 선각자 혹은 이상주의자의 주장이라 평한 이유이다. 욕망의 만족도를 이해하고 알려는 자세가 중요하지만 이를 실천하는 과정은 쉽지 않고 소국과민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인간 문명을 모두 뒤집어 엎어야 가능하다. 전체에 대한 이해는 개별자의 허무를 일으키기도 한다. 세계 전체의 이해는 개별자가 세계에 대체 무슨 이유에서 존재하는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개별자가 단순히 전체 세계의 일부일 뿐이라는 사실만 일깨운다. 개별자의 욕망은 전체의 질서를 제대로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세계에 던져진 존재인 개별자는 아무런 이유 없이 살아간다는 허무를 맞이한다.


그렇기에 공자는 개별자들의 행동론으로 인(仁)과 예(禮)를 제시한다. 공자는 인간의 본성 중 하나이자 솔직하며 진실된 직(直) 가꿔야 사랑(仁)할 수 있다고 한다. 인간이 관계를 맺으면서 소통해온 방식이자 규범인 예는 사랑을 보다 더 성숙할 수 있도록 하는 존중(禮)에 해당한다.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보여 사랑을 표현하면서 상대방을 존중할 때 인간은 타인과 함께 진정으로 존재함을 느끼고 평안을 느낀다. 하지만 사랑은 세계 전체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할 수 없다. 세계 전체는 인간이 한 번에 인식하기에는 너무 크다. 공자가 가장 가까운 이부터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즉, 사랑은 자기 자신과 맺은 관계와 가장 가까운 이와 맺은 관계를 토대로 형성되어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깨닫게 한다. 전체 세계에서 지금 이 순간의 '나'는 당신과 관계를 맺어 사랑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당신이 있기에 존재하고 있다. 당신과 맺은 관계를 지키며 함께 나아가기 위해 당신을 사랑(仁)하며서 존중(禮)해야 한다. 그러한 사랑과 존중은 당신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당신과 다른 개별자의 관계, 공동체의 관계, 국가의 관계, 나아가 세계 전체의 관계로 이어진다. 바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이며 그렇기에 자신을 수양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에게서 세계를 향한 사랑이 시작되니 말이다.


2. 가능성과 존재의 허무에서 기적까지 : 공자의 철학을 통한 버스 점프(Verse Jump)

이제 노자와 공자를 기반으로 <엡엡올>을 이야기해보자. 모든 것이 어디에나 동시에 존재한다는 제목의 의미답게 <엡엡올>은 멀티버스를 다루고 있다. 영웅들이 판치는 M사의 화려한 멀티버스가 아니라 중국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중년 아줌마 에블린(양자경 분)의 B급 멀티버스이다. 그것도 세계와 존재의 원리를 깨우친 노자-용과 같은 존재, 조부 투바키(스테파니 슈 분)에게서 세계를 구하는 에블린의 멀티버스 이야기이다. 이 영화에서 B급 정서는 (필자가 선택한 것이긴 하지만) 노자와 공자의 철학을 기반으로 하는,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한다는 점과 바로 옆을 함께하는 인연이 소중하다는 무거운 주제를 유쾌함과 감동의 격차로 관객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러한 영화의 B급 정서는 남편 웨이먼드(조나단 키 쿠안 분)가 세탁물에 붙인 플라스틱 눈알을 떼어내는 것을 시작으로 형성된다. 인연을 끊었던 아버지(제임스 홍 분)의 생신을 축하하면서 미국에서의 삶을 보여 드리면서 레즈비언인 딸 조이까지 소개하고 최우수 세무 조사원만 받는 트로피를 3개나 받았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깐깐한 백인 할매(제이미 리 커티스 분)를 만나러 가야 하는 판국에 난데없이 눈알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플라스틱 눈알이라니. 실소가 터져나올 수밖에 없다. 세무 조사, 자신의 삶에 대한 불만족, 가족과의 불안한 관계 등으로 진지하고 정신 없는 에블린과는 대조적인 영화의 분위기는 무겁고 진중하게 느껴질 영화의 주제에 관객이 느낄 부담감을 덜어주기 시작한다.


서사 전개와 액션 장면도 살펴보자. 알파 웨이먼드가 처음 주인공 에블린의 웨이먼드로 버스 점프(Verse Jump)한 장면이 대표적으로 B급스럽다. 이 장면은 조부 투바키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 가장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주인공 에블린을 찾기 위해 수많은 우주를 점핑하고 있었다는 논리를 기반으로 우연하게 발생한다. 즉, 서사 내부의 논리가 없는 것은 아니나 동시에 꽉 짜여진 인과율에 기반해 진행된 사건은 아니라는 점에서 B급스럽다. 버스 점핑을 하기 위해서는 엉덩이에 트로피를 박는 정도로 자기 세계에서 자신이 절대 할 것 같지 않은 행동을 해야 한다는 설정도 B급스러운 서사 전개를 강화한다. 자신이 절대 할 것 같지 않은 행동 즉, 인과율을 벗어난 완전히 생뚱맞은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은 멀티버스라는 거대한 세계관과 세계관을 통해 전해줄 무거운 주제의 부담감을 덜어준다. 오마주하는 영화의 장면들도 마찬가지이다. <라따뚜이>, <화양연화>, 홍콩 무술 영화 등 다양한 영화가 오마주되는 것은 <엡엡올>의 소재인 멀티버스라는 세계관을 더욱 강화하면서도 관객이 멀티버스를 편안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한다. 즉, 자신의 기억과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그리고 절묘하게 <엡엡올>과 합치되는 오마주에서 관객은 영화에 몰입할 뿐만 아니라 넘치는 영화적 즐거움에 웃음을 터뜨린다.

출처. 왓챠피디아

영화의 액션 장면도 가볍고 유쾌하다. 멀티버스를 위협하는 악당 조부 투바키가 처음 얼굴을 드러내 경찰들을 살해하는 장면은 <위풍당당 행진곡>에 맞춰 악당들의 머리가 터지는 <킹스맨>의 장면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더 가볍고 유쾌하다. 총탄을 맞아 피가 튀어야 하는 구멍에서는 폭죽이 터지는 장면, WWE 선수보다 더 화려한 공작같은 옷을 입고 경찰의 허리를 꺾어버리는 조부 투바키의 모습. 영화 액션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쿵후 역시도 기존 중국 무술 영화의 유려하면서도 절도 있는 쿵후가 아니다. 엉덩이에 트로피를 낀 채 쿵후를 하는 투바키의 부하들은 고수와 같은 무술 실력에도 불구하고 마치 뭔가를 참으며 싸움에 임하는 듯하다. 버스 점핑을 하면서 쿵후를 할 수 있게 된 에블린의 모습도 마찬가지이다. 기존 영화에서 진중하면서도 날카로운 눈빛으로 상대를 쏘아보던 양자경 배우의 눈은 버스 점핑으로 얻은 쿵후에 휘둥그레진 눈으로 놀라며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다. 심지어 베이글 블랙홀로 들어가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조부 투바키를 막기 위해 자신을 막는 악당들의 욕망을 하나씩 충족시키며 나아가는 에블린의 모습에서 액션은 쿵후처럼 화려하지 않다. 슬로우 모션 속에서 상대를 피하는 간단한 액션은 상대의 엉덩이를 때려준다던가, 상대를 꼬옥 포옹해준다던가 등 순수한 아이들의 움직임으로 연결된다.

출처. 왓챠피디아

하지만 단순히 주제의 부담감을 가볍게 만들기 위해 B급 정서를 활용하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의 B급 정서는 추진력을 위한 무릎 꿇기와 같다. 베이글 블랙홀에서 관객은 영화가 활용하는 B급 정서의 정점에 도달한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이런 영화는 없었다. 이것이 우주인가 베이글인가. 드넓은 멀티버스가 베이글로 귀결된다는 영화의 표현은 실소를 넘어 영화를 대하는 관객의 태도를 편안하게 만든다. 노자-용인 조부 투바키가 깨달앗듯 어차피 어디에나 어떻게든 존재하고 있다는 멀티버스의 가능성이 공포스러운 허무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공기를 떠다니는 먼지처럼 가볍게 느껴진다. 그랜드 캐년을 닮은 드넓은 평원과 계곡을 바라보는 돌이 되어 세계에 존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즉, 영화의 B급 정서는 관객이 영화를 보면서 사유하거나 느끼게 될 전체로서 세계와 그 세계에서 먼지처럼 존재하고 있을 자기 존재를 허무로서 공포가 아니라 가벼운 편안으로 대하게 한다. 그깟 세무 조사. 그깟 배우로서 성공. 그깟 관객을 위한 노래. 그깟 사랑. 이때의 그깟은 그야말로 존재의 무의미성에 대한 편안의 발로이다. 세계를 멸망시킬 생각은 없고 그저 허무 속에서 자기 존재의 사라짐을 바란다는 조부 투바키의 말처럼 우리는 어디에나 어떻게든 존재하며 결국 소멸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 뿐이다.


무릎을 꿇었으니 이제 일어날 때이다. 너무 오래 꿇으면 무릎이 아니라 다리가 저리다. 수많은 우주에서 우리가 어떤 방식과 형태로든 존재한다고 해서 지금 이 순간의 자신은 무의미한지 생각해보자. 오히려 더 기적 같은 순간이 아닌가? 수많은 분기점에서의 선택이 쌓이고 쌓이는 와중에 당신과 만나 삶을 함께 만들고 있다. 아무 의미 없는 욕망이 아니라 수많은 우주 중 오직 그 우주의 자신만이 갖고 있는 욕망이며 당신만이 해결해줄 수 있는 욕망이다. '나'의 존재가 세계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를 알려주는 좌표이다. 즉, 욕망은 당신과 맺은 관계에서 비롯된 '나'의 존재 방식이다. 노래, 쿵후, 철판 요리, 피자 간판 돌리기 등 뭔가 특별한 능력이 없어도 괜찮다. 낡은 세탁소에서 세무 조사를 위해 자잘한 출금 내역을 일일히 확인하고 가족과의 관계에 불안해하는 인생이어도 괜찮다. 수많은 우주에 당연하게 소멸을 향해 가는 존재 중 조이 '너'의 엄마로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고 있으니.

출처. 왓챠피디아

모든 것이 어디에나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 뭐 어떻단 말인가. 수많은 분기점에서의 선택이 모이고 쌓여 모든 세계 중 단 하나의 세계에서 친구로, 연인으로, 가족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그깟 수많은 가능성 따위. 그깟 소멸 따위. 베이글 블랙홀로 사라져 버릴 하찮고도 가벼운 우주는 인연으로 형성되는 관계와 감정의 무게에 순식간에 무거워진다. 다가오지 말라고 하는 조이-돌의 말을 플라스틱 눈을 흔들며 무시한 채 다가가는 공자-에블린-돌은 외친다. "난 네 엄마야!" 가능성의 멀티버스에서 에블린과 조이가 엄마와 딸로 만난 우주는 단 2곳, 알파 우주와 주인공 에블린의 우주이다. 어쩌면 더 있을지도 모르지만 영화 상에서 나타난 곳은 단 2개이다. 수많은 가능성을 뚫고 엄마와 딸의 관계가 나타난 것이 단 2곳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주인공 에블린과 딸 조이의 관계는 단 1곳 바로 지금 이 순간 여기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맺은 조이와의 관계는 단 하나이면서도 멀티버스 전체를 관통해 조부 투바키의 마음을 바꾼다. 투바키와 조이는 멀티버스의 가능성으로 연결된 개별자이자 세계 그 자체이기에.


에블린의 '너'는 조이가 아니라 웨이먼드여도 아버지여도 혹은 세탁소 손님 중 누군가 한 명이어도 된다. 누구라도 사랑(仁)과 존중(禮)의 시작 지점인 너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수많은 너들 중 조이가 에블린의 사랑과 존중의 시작 지점이 되는 것은 에블린 주변의 수많은 인물들 중 딸인 조이가 느끼기에 엄마인 에블린이 자신을 가장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고 오히려 부끄러워 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즉, 공자가 말했듯 결국 인간은 가장 가까운 이 즉, 자기 자신에서 시작해 가족부터 사랑과 존중을 할 수 있다. 바로 너이기에 '나'의 지금 이 순간은 수많은 가능성을 뚫고 엄마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고 그렇기에 널 조건없이 당연하게 사랑하고 존중한다. 가족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사이 타인들도 '나'의 이야기를 듣고 배려하고 존중해준다. 자신과의 결혼 생활 동안 자신이 아닌 에블린이 불행한 삶을 산다고 생각해 이혼까지 생각하는 엉뚱한 웨이먼드나 세무 조사를 위한 자료를 정리할 수 있도록 기한을 더 늘려주는 세무 조사원처럼 말이다. 팽창하는 관계의 철학이 주는 감동을 통해 유쾌한 B급 연출로 가볍게 날아다니던 관객은 인연에 의한 관계와 감정의 깊이를 느끼며 깊디 깊은 격차를 점프해 가능성이 주는 희망과 존재의 기적에 도달한다.

출처. 왓챠피디아

삶에서 허무를 느끼는 인간은 자기 삶에 충실할 수 없다. 텅 빈 듯한 삶에서 인간은 계속해서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며 다른 더 나은 삶을 상상한다. 상상이 현실의 노력으로 승화된다면 다행이지만 점점 상상하는 재미 속에서 오히려 현실의 삶이 허무해질 뿐이다. 상상이라는 가능성은 자신이 세계 전체 어디서나 어떻게든 존재하는 허무의 공포로 전락한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삶은 수많은 타인을 넘어 다른 존재와 맺은 인연으로 다채롭게 꾸며지고 있다. 가능성이 자신에게 수렴하면 허무의 공포로 전락하는 것과 달리 다른 존재와 맺은 인연과 함께 팽창하면 희망의 기적으로 나아간다. 당신을 사랑하고 존중할 때 지금 이 순간의 삶은 따사로운 햇살과 같아지고 과거는 따뜻한 추억으로 남으며 미래는 기대되는 기적이 된다. 노자가 되었든 공자가 되었든 삶이 허무의 공포와 희망의 기적 중 어느 쪽으로 기울게 될지는 각자의 몫이다. 그저 인연에 대한 사랑과 존중이 삶을 충만하게 만드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인연을 향한 사랑과 존중은 지금 이 순간에만 가능하다. 모든 것이 모든 곳에 동시에 존재한다고 해도 지금 이 순간은 말 그대로 지금 존재하는 소중한 순간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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