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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킹맘은개뿔 Oct 28. 2020

존버란 무엇인가

[워킹맘의 존버실패기] #1

한 때 나는 존버라는 말을 좋아했다. 이외수 선생의 책에도 나오는 그 말은, 내가 퇴사를 생각할 때마다 그 마음을 희석시키며 자주 썼던 말이었다. 탄탄한 퇴사 결심은 존버라는 말 앞에서 설탕이 물에 녹듯 스르르 사라지기 일쑤였다. 월급이 입금되는25일 오전에, 휴가를 내고 떠난 코타키나발루의 공항에서, 친정 엄마께 용돈을 부쳐 드리면서 나는 이 직장에서 존버해야 된다고 종종 생각했다. 


그 말은 나만 좋아한 게 아니었다. 내 아들도 좋아했고 동료들도 존버를 외쳤다. 아들은 배틀 그라운드라는 게임을 하면서 친구들과 “야! 존버해!!” “존버타!” 소리질렀다. 수풀 같은 녹색 길리슈트를 입고 아들의 게임 캐릭터는 풀밭에 누워 있었다. 그 상태로 기다리다가 누가 오면 갑자기 툭 튀어나와 상대를 차례로 쓰러뜨리고 팀 1등을 했다. 마지막까지 버텨고 이겨야 치킨을 먹을 수 있다고 했다. 동료들은 어땠나. 회사 지인들은 내 징징거림을 듣고 나서 끝까지 존버하자는 카톡 메시지를 보냈다. 계속 다녀야 한다며 손을 꼬옥 잡아주기도 했다. 같이 제육볶음을 먹으면서 우린 이제 나이 많다고, 재취업도 쉽지 않을 것이니 참고 다녀야 한다고 했다. 화장실에서 자주 뵙는 청소 여사님도 직장은 끝까지 붙들라고 하셨다.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불안과 용기가 서로 싸움하는 상태로 시간은 아주 빠르게 흘러갔다.  낮에는 98통의 메일이 받은 편지함에 시커멓게 쌓였고, 밤에는 아이의 단원평가 준비를 위해 문제집을 같이 풀었다. 당시 나는 늦깎이 대학원생이었기에 주중 3일은 수업을 마치고 11시에 집에 들어왔다. 주말에는 학교 도서관에 틀어박혀 과제와 발표 준비 그리고 중간고사 공부를 했다.  뭔가 이상한 삶이었다. 무엇인가 얻으려고 너무나 노력하고 있는데 그 무엇도 내 것이 아니었다. 미친 듯 바쁘게 지냈지만 그 어떤 시간도 나에게 안정을 주지 못했다. 




그 즈음 존나게 버티는 것만이 이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몸이 알려주기 시작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마음이 아니라 몸으로 깨닫는다는 것이. 이상한 장소,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눈물이 툭하고 흘렀다. 그 동안 잘 울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엄한 곳에서 주르륵 눈물이 흐르니 미칠 지경이었다. 한 번은 같은 빌딩에 있는 외국계 회사의 교육에 초대받아 간 자리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하면서 숨을 쉬었어요’ 하며 얘기를 하는데 갑자기 목이 콱! 메어오는 것이었다. 거기서 웃음으로 급히 대화를 끊은 다음, 나는 황급히 남의 회사 복도에 나와 울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아서 화장실에 들어가려고 보니….. 아뿔사! 그 회사는 화장실도 직원 ID Card를 찍어야 입장할 수 있는 곳이었다! 마침 근처에 서 있던 남자분이 자신의 카드를 찍어 주셔서 나는 간신히 몸을 피해 조용히 울 수 있었다. 카드를 찍어주면서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으시죠? 물으셨던 친절한 남자분께 아직도 고마움을 느낀다. 나 때문에 화장실에서 길게 있었던 걸로 오해받지 않으셨으면….


또 어떤 날은 세미나가 열리는 호텔 화장실에서 한 쪽 눈이 시뻘겋게 피 터져 있는 걸 본 적도 있다. 전날까지도 괜찮았는데 하필 사람들과 교류해야 되는 세미나에서!! 천녀유혼 주인공처럼 예쁘지도 않은 나는 피맺힌 눈을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이들과 얘기해야 했다. 회사로 돌아와서 눈을 까뒤집어 사람들에게 보여주면 다들 나를 안쓰럽게 봐 주어서, 덕분에 수월하게 당일 휴가를 쓸 수 있었지만 말이다.

                                                         (Photo by Tim Goedhart on Unsplash)



존버 나라의 이상한 눈물은 출근길에서 특히 심해졌다. 사람이 쥐어짜져서 참기름이 될 것 같은 내장 파열의 9호선에서 내려 밖으로 나오면 어김없이 콧물과 눈물이 흘렀다. 아, 그 때는 추울 때였으니 더운 곳에 있다가 밖에 나와서 콧물도 같이 흘렀나보다. 다행히 회사까지는 15분 정도 걸어야 도착하는 길이라서 나는 약간의 오르막을 빠르게 걸으며 이른 아침의 눈물을 다 말리고 출근했다. 


그 때는 자주 음악을 들었는데, 이상하게도 미녀와 야수 OST를 들으면 마음이 진정되면서 사무실에 들어갈 수 있는 용기가 나곤 했다. 아리아나 그란데가 아아아아아~ 하면서 tale as old as time, true it can be~하고 부르면 목소리 좋은 남자 가수가 just little change~ 하고 이어 부르는데 그걸 듣고 있노라면 눈물이 날아가고 등에 땀이 솟았다. 


나는 certain as the sun rising in the east ~ 부분을 들으면서 결심했다. 언젠가 눈물 흘리며 일하러 나섰던 이 날을 꼭 글로 쓰겠다고. 그렇게 바쁘게 최선을 다해 살았지만 너무나 힘들었던 그 때를 꼭 글로 풀어낼 거라고. 그래서 무엇도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시간을 탈출할 거라고.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맘대로 한 번 살아볼 거라고. 참고 견디는 존버 따위는 때려치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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