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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집엄마 Apr 16. 2021

남편은 출장 중

새삼스러워졌다.


난 게으르고 귀차니즘도 넘치고, 의지도 약한 편이고 보기와 정말 다르게 체력도 좋지 못하다.

그래서 남편까지(?) 있는 주말, 칼퇴를 하고 돌아오는 날은 사실 귀찮을 때가 많다.

한참을 긴 출장이 없던 터라 남편의 귀찮음과 불만족스러움의 수치가 확 치솟은 상태였다.

아이들 밥 먹이는 시간은 거의 정해져 있는데 늦는 것 같아 먹고 치웠을 때 타이밍 맞춰 퇴근하는 남편이 들어오면 우뚝 서서 남편을 무표정으로 쳐다본다.

평소에는 늦는다고 연락도 잘하면서 한 번씩 말없이 늦는 날은 귀찮음과 짜증이 섞인다.

겨우 밥을 차려주면 남편은 괜스레 내 눈치를 보며 잔반 있는 걸 싫어하는 나 때문에 배가 불러도 꾸역꾸역 다 먹어치운 뒤 다 먹은 그릇들을 싱크대에 얌전히 놓아두고는 "여보, 잘 먹었어"라는 말을 해주고는 거실의 애들 옆에 붙어 앉는다.

설거지를 시작한 나는 혼자 중얼거리면서

'나에게 퇴근은 없다'

'난 쉴 시간도 없어'

'아 힘들어'

'으휴'

온갖 부정적인 표현을 토해낸다.

혼자 중얼거린다고는 말했지만 사실 다 들리는 목소리로 남편 귀에 쏙 쏙 박히게 전달한다.

속으로 '출장은 대체 언제 가는 거야'라고 생각했다.

1명이라도 덜 있어야 내가 일을 덜 하는 기분이 들었다.

친정엄마는 '집에서 노는 년'이라고 잔소리를 하며 사위 편을 들지만 그 말은 핸드폰 건너편에서 맴도는 말일뿐 나에게는 전혀 들리지도, 관심도 갖고 싶지 않은 말이다.


그러다 남편이 드디어 출장을 갔다.

이번에 좀 긴 출장을 갔다.

내심 홀가분하기도 했고 당분간 애들 둘만 챙기면 된다고 생각하니 몸이 덜 피곤하겠다고 생각했다.

몇 년 전, 애들이 어린이집 시절에 이런 긴 출장을 가면 돌아오는 날까지 아무 생각 없이 바쁘게 애들과 시간을 보내며 정신없는 날들을 보내고 있을 때 남편이 돌아왔었다.

별 생각이 없이 '또 한 명 더 늘었구나'라고 생각했었고 이번에도 그때랑 똑같을 줄 알았다.


코로나라는 특수한 상황이라 그런 걸까 출장을 간 첫날부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손은 제대로 씻고 있으려나'

'소독제는 잘 바르려나'

'마스크는 코에 와이어 잘 조절해서 막고 있으려나'

'사람들과 너무 접촉하면 어쩌나'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들 중에 확진자가 있으면 어쩌나'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출장이 없는 동안 남편의 귀찮음과 불만족스러움 뒤로 익숙함과 편안함과 애틋함이 그동안 커져있었다.

몇 년 전 출장은 왜 이런 마음이 없었을까 라고 생각해보니 애들이 어려서 정신과 체력이 바닥을 치고 있다 못해 지하세계로 하강 중이라 마음의 여유가 없었고 우울했고 무조건 힘들었다.

지금은 애들도 어느 정도 커서 육체적으로 손이 많이 안 가는 날이 됐으니 마음의 여유가 생긴 거다.

'이슬비에 어깨 젖는 줄 모른다'는 말처럼 남편은 나에게 익숙해졌고, 유의미해졌고, 없으면 안 되는 존재가 되어있었다.

그걸 결혼한 지 13년이 되어가는 지금에서야 깨닫다니...

순간 남편에게 너무 미안하고 갑자기 그리움이 훅 밀려왔다.

연락이 자유롭지 못해 보고 싶으면 카톡으로 사진을 남기고 빨리 오라는 말을 남기는 행동을 하게 됐다.

어느 순간 애들 앞에서 '아빠 보고 싶다'라고 말하는 일도 생겼다.

분리수거를 하다가도, 도서관을 가다가도, 주말에 애들이 놀러를 나가더라도 '이래서 아빠가 있어야 돼'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빠를 너무 좋아해서 출장 가기 며칠 전부터 가는 날까지 울먹거리고 투덜대면서 회사 나쁜 곳이라고 뭐라 하던 애들은 아빠 이야기를 하는 나에게 그만하라고 까지 말한다.

애들도 아빠가 보고 싶은데 엄마까지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나 보다.


나를 잔소리 로봇으로 만드는 남편은 이제 나에게 없으면 안 되는 존재로 새겨졌다.

그렇다고 무뚝뚝함의 결정체인 경상도 토박녀인 내가 사랑이 넘쳐 남편을 바라보는 내 눈에 꿀이 뚝뚝 떨어지며 한 시도 안 떨어지려 하는 그런 손, 발 오그라드는 행동은 할 생각도, 할 수도 없지만 이런 마음을 느끼는 내가 새삼스럽기도 하고 한 편으로 이런 느낌을 갖는 내 모습에서 안정감도 느껴진다.


돌아오면 또 귀찮아질 거다.

말 없는 늦은 퇴근은 달갑지 않은 무표정으로 퇴근을 맞이할 것 같고 평소처럼 애들 앞에서 안으려 하면 떨어지라고 면박을 줄 것 같다.

장난기가 많은 남편이 내 뒤에 졸졸 따라다니면 장난으로 안 받아주고 저리 가라고 귀찮아할 것 같다.

그리고 수건함 열고 안 닫아놨다고 잔소리를, 아무 데나 누워서 걸어가는 길 막는다고 쓴소리를 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좋다.

몸은 귀찮지만 마음은 편안하게, 안정된 보통의 날을 만들어주는 내 남편이 이제는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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