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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시 Aug 08. 2017

여름을 지나가다(조해진)_청춘이라는 여름의 끝

조해진, '여름을 지나가다' 후기

여름. 견디기 힘든 더위가 계속되는 6월부터 8월까지를 말한다.

작가는 두 남녀의 흔들리는 청춘을 여름에 비유했다. 에어컨도 선풍기도 없이 힘겹게 여름을 보내는 두 사람의 흔들거리는 이야기가 이 소설의 개요다.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여름도 결국엔 지나간다. 그러니, 고되기만 한 청춘도 지나갈 것이다. 소설은 6월부터 8월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설의 두 주인공인 민과 수의 봄이 어땠는지는 어렴풋하기만 하다. 그들이 겨우 지나간 여름 뒤에 맞는 가을은 아름다울까?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아 보지만, 현실이라는 것이 꼭 그럴 것 같지만은 않다.


소설에는 민과 수라는 두 청춘이 등장한다. 민과 수 모두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른 사람으로 사는 이들이다. 민은 껍데기는 그대로이되 속을 바꾸었고, 수는 그 반대다.


민은 전문직(회계사)이었다. 그곳에서 만난 동료와 연애를 하고 그와 결혼을 앞둔, 다들 부러워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민이 꿈꿨던 삶은 그저 사랑하는 이와 가정을 꾸리고 알콩달콩 사는, '평범함'이었다. 그런 민에게 회사의 비리를 폭로하고 싸우려는 약혼자의 행동은 평범함으로 들어가는데 장애물이 되었다. 민은 약혼자를 최선을 다해 만류하였다. 그러나 민의 최선은 오히려 약혼자를 곤궁에 빠뜨렸고, 그들은 파혼했다. 이후 회사에서도 퇴사한 민은 이전의 나를 버리고 다른 이가 된다. 민은 계약직으로 공인중개사에서 취직하여 부동산 중개업자가 되었다.


수는 한 때 여행기자, 여행작가, 여행 가이드와 같은 여행 관련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수는 여태껏 한번 해외에 나가본 적이 없다. 수의 아버지가 가구점을 내면서 집안의 가세가 기울었고, 빚이 점점 쌓여갔다. 수는 부모님 대신 대출을 받기도 했다. 그래도 빚은 줄기는커녕 점점 몸집을 불려 갔다. 그 와중에 수의 아버지는 안면에 마비가 생기면서 방으로 숨어 들어갔다. 그리고 수는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채무자 신분으로는 아르바이트도 구하기가 어려웠던 수는 우연히 주운 지갑에서 얻는 신분증의 정보를 가지고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수는 그렇게 박선호라는 껍데기를 쓰고 산다.  


자신을 버린 민과 구는 문 닫은 가구점을 공유한다. 문 닫은 가구점은 민과 수는 견디기 어려운 인생의 여름이 주는 무더위를 식히는 공간이다. 같은 시간에 가구점을 찾은 적은 없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알 수 없는 위로와 연대감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그들이 지나가는 여름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111-112)

용서로부터 가장 먼 곳에 있는 어긋남......

남자아이가 엉거주춤 의자에서 일어나는 순간, 민은 그대로 돌아서서 뛰듯이 걷기 싲가했다. 그들과는 애도를 나눌 수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니, 그들의 슬픔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켜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의 슬픔과 자신의 슬픔이 교환되고 공유되어 결국 같은 무게로 남게 되는 상황을 견딜 수 없다는 게 가장 솔직한 심정인지도 몰랐다.


민과 수는 8월이 되면서 서로의 존재를 눈으로 확인하게 된다. 민은 자신이 가진 보통의 삶을 지키려다 약혼자를 잃었다. 그런 민에게 누군가와의 연결은 두려운 일이었을 것 같다. 그런 민의 삶에 자신을 내팽겨친 이들이 자꾸 들어온다. 수도 그들 중 한 명이다.


(161)

기억이 났다.

그 때도 한 차례 태풍이 지나간 한여름이었을 것이다. 고등학생 때였고, 수는 싫어하는 수학 수업을 듣고 있었다. 턱을 괸 채 운동장을 건너다보고 있는데 조명이 꺼지듯 갑자기 어둠이 내리면서 운동장엔 잿빛 먼지만 나부끼기 시작했다. 수는 창밖의 운동장이 육신을 잃은 영혼들의 대합실 같다는 상념에 빠져들었다. 아무리 먼 곳으로 여행을 다녀온다 해도, 온 생에에 걸쳐 두고두고 회상할 엄청난 경험을 하고 돌아와도, 결국엔 저렇게 황량한 곳이 생의 최종 목적지가 될 거라고 생각하자 모든 것이 시들해졌다. 어쩌면 처음부터 기대하는 건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루를 살다가 다음날이 되면 미련이나 고통없이 그 지나간 하루를 인생의 총합에서 마이너스하는 것, 사는게 그것만은 아닐 거라고 믿고 싶어서 여행작가니 여행 가이드 같은 허상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수는 박선호라는 이름을 벗게 된다. 사실, 잘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수가 연주에게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연주는 수가 박선호라는 이름으로 아르바이트를 할 때 만난 사람이다. 수가 일한 곳은 마트 옥상의 작은 놀이동산 같은 곳이고, 연주는 그곳의 팀장이었다.) 위태위태하게 겨우 생을 이어가고 있는 줄을 뻔히 알면서 수는 연주에게 왜 그랬을까.    


(176)

그녀는 말을 맺지 않았고, 침묵은 길어졌다. (중략) 그녀의 마지막  뒷모습은 다행히 휘청거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넘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녀를 속일 것이고 누군가는 그녀에게서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갈 것이다. 그녀를 비웃고 무시하고 외면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나타날 터였다. 그럴 때 수는 그녀 곁에 있을 수 없었다. (중략) 나한테 미래가 없어요. 그녀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야 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알고 있죠? 다 알면서 나처럼 헛된 기대를 한 가잖아, 그렇죠!


수는 연주에게 희망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연주가 내민 손을 뿌리치고 말았나. 함께라고 여름이 봄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수는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169)

중개사무소 보조원의 생애를 떠난 뒤에 뭘 할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어쩌면 이번에도 쇼인도에 붙은 구인 광고에 이끌려 충동적으로 직업을 고를 수도 있을 것이다. 발을 헛딛는 것쯤은 이제 두렵지 않았다. 두려운 건 오직 하나, 영원히 반복될 것 같은 오늘 뿐이었다. 단절이나 휴지없이 이어지는 단 하나의 생애, 그 관성이었다.  


민은 수와 연주와는 결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어쨋든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인물들인 민, 수, 연주는 벗어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는 현실에 갇힌 사람들이다. 민의 독백처럼, 그들이 두려운 건 "영원히 반복될 것 같은 오늘"이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것만 같은 이들에게 작가는 그건 곧 지나갈 여름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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