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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시 Jul 25. 2017

내사랑(Maudie, 2017)

영화 "내 사랑" 후기

제목을 쓰고 나니 "어느 날, 너는 내게 말했어~ 행복이란 뭘까"로 시작하는 옥상달빛의 가장 쉬운 이야기라는 노래가 떠오른다. 이 영화도 나에게 똑같이 물었다. 행복이란 뭘까?


한글 제목은 내사랑이지만, 원래 제목은 모디(Maudie)이다. 모디는 영화의 주인공 이름이다.

이야기는 관절염을 앓고 있는 모드가 숙모의 집을 뛰쳐나오면서 시작된다. 모드는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짐처럼 여기는, 체면과 돈만 밝히는 가족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것 같다. 모드가 숙모의 집을 탈출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모드의 오빠 찰스가 엄마가 유산으로 남긴 집을 모드와 아무런 상의 없이 팔아먹은 일 직후다.


모드는 우연히 에버렛 루이스가 가정부를 구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무작정 에버렛 루이스의 집으로 쳐들어간다. 모드는 에버렛이 원한 가정부는 아니었다. 에버렛은 성격이 괴팍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거나 존중하는 일이 없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다. 모드는 에버렛의 성품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그 집에 굳이 들어가려 한다. 좋은 사람인 척 가면을 쓰고 사는 숙모와 오빠보다 인간적이라고 느꼈던 건 아닐까.  


에버렛은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모드가 탐탁지 않았지만 별다른 대안이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모드를 내쫓지는 않았다. 사실 에버렛의 괴팍함과 무심함을 받아줄 가정부는 세상에는 없다. 그런데도 에버렛은 자신이 모드를 거둬들였다고 생각한다. 모드는 그런 에버렛의 태도에 종종 슬픔을 표현하기는 하지만 기꺼이 받아들인다. 모드의 선한 천성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모드에게도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일까. 모드는 체념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숙모의 집을 나오는 모드의 행동이 무모해 보이기도 하지만 나는 모드의 용기가 부러웠다. 모드는 '자립'이라는 하나의 목표에만 관심을 두었고, 숙식이 해결 가능하고 돈을 벌 수 있으면 어디든 상관없다고 여긴 듯하다. 그러므로 에버렛이 어떤 남자인가도 중요하지 않았다. 예상한 바처럼 에버렛은 모드를 자신의 개, 닭 보다도 쓸모없는 존재로 여겼고, 수시로 무시했다. 그래도 모드는 그를 떠나지 않았다. 아니 떠날 수 없었다는 게 정확할 것 같다. 모드는 에버렛에게 한껏 경멸과 무시를 당한 직후, 손가락에 물감을 묻혀 벽에 무언가를 그린다. 그게 모드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시점이다.


“내 인생 전부가 이미 액자 속에 있어요.”


모드에게 그림은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집안이 조금씩 그림으로 채워졌고 채워져 갔다. 늘어나는 그림만큼 모드의 생도 살아나는 듯하다. 모드는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과 에버렛과 동물들을 그렸다. 거동이 불편한 모드에게 창문은 바깥 세계와 자신을 연결해주는 것이고, 창문을 통해서 보이는 것들을 그림으로써 바깥 세계와 자신이 만나게 된다. 그렇게 경계를 넘나들며 모드의 생도 확장되었다.


소박한 삶이지만 모드와 에버렛은 마침내 행복했고, 그들의 행복은 마우디가-체면을 중시하는 숙모와 돈을 좋아하는 오빠-에게 일갈을 가했다. 그러니까 영화가 단순히 모자란 남녀의 아름다운 사랑에 초점을 맞춘 것 같지 않은데 내사랑이라는 제목은 영화를 로맨스로만 읽도록 제한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마우디가를 벗어나면 행복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모드가 마우디가를 벗어남으로써 비로소 행복을 얻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으며, 소위 비정상의 두 남녀가 만들어낸 행복이 정상성의 상징인 마우디가에게 무엇이 행복이냐고 묻기도 한다. 그래서 마우디라는 원제가 좀 더 와 닿는다.


모드의 그림을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이 나타나면서, 모드는 보다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게 된다. 모드가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집안일은 점점 에버렛의 몫이 되어간다. 모드에게 에버렛이 없었다면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 애초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도 에버렛의 무시와 경멸 속에서 자신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었고, 작은 오두막이지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 것도 에버렛이다. 모드가 한참 유명해졌을 때, 어떤 인터뷰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은 자기가 바깥일을 하기 때문이라는 에버렛의 볼멘소리도 인상적이다.  그래서였을까? 모드는 그림을 그리고 사인할 때, Moud & everett이라고 썼다. 그림에 자기 이름을 왜 쓰냐고 묻는 에버렛에게 모드는 우리의 그림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였을까? 모드는 그림을 그리고 사인할 때, Moud & everett이라고 썼다. 그림에 자기 이름을 왜 쓰냐고 묻는 에버렛에게 모드는 우리의 그림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모드는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에버렛을 미워하지 않는다. 에버렛의 집에 들어간 것을 두고 사람들이 성노예라고 수군대는 말에도 의연하다. 모드에게 중요한 것은 오롯이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을까. 모드는 에버렛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려고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다. 자기의 기억에만 의존해서 본의 아니게 사람들에게 사기를 치는 꼴이 되는 에버렛을 위해서 장부를 만들어주고, 청소를 하고, 스튜를 끓인다. 그뿐인가 그림을 팔아서 돈도 벌어준다.  


"당신은 내가 필요해요"


어딘가 모자란 두 사람은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다. 그래서 외로웠던 두 사람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모드는 에버렛과 결혼했고, 마우디라는 성 대신 루이스라는 성을 얻었다. 모드와 에버렛이 결혼한 날에도, 에버렛의 친구는 모드의 결정을 쉽게 납득하진 못했다. 그날밤, 에버렛은 모드의 발이 되어 주었다.


모드는 자신에게 에버렛이, 에버렛에게 자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나 보다. 어찌 보면 찌질하기만 한 두 남녀의 연대가 왜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는지 모르겠다. 둘은 참 소박했다. 어느 날 찾아온 오빠 찰스가 그림을 판 돈을 에버렛에게 다 주는 모드를 바보로 취급하기도 하지만, 모드는 잃어버린 자기 자신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손에 쥐려고 하지 않는다. 소소하게 덧문 하나를 바랄 뿐이다. 영화 내내 모드가 무언가를 원한 것은 덧문뿐이었다.


모드와 에버렛에게서 달달한 사랑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저 서로의 필요를 채워줄 뿐이다. 여전히 에버렛은 츤데레이고 모드는 그림을 그리는 일 이외에는 답답할 만큼 에버렛에게 맞춰준다. 어쩌면 모드는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했는지도 모르겠다. 숙모의 집에서 모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겨졌지만, 에버렛의 집에서 모드는 뭐라도 해야만 존재할 수 있었다. 에버렛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모드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


 모드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나는 사랑받았어"라고 고백한다. 모드는 에버렛을 만나,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었고 창문 밖 세계를 넘나들며 자신의 인생을 담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모드의 마지막 인사에 화답하듯 에버렛은 모드가 자신에게 과분한 사람이었다고 뒤늦은 고백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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