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돈 노
장시간 비행을 마친 후 처음 디뎌보는 지면에 어지럽기까지 하다. 첫 발을 내디디는 시점은 언제나 만감이 교차한다. 미국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던가? 개인적인 생각으론 목적지에 도착해서부터가 아니라. 여행자금을 모으는 일부터 시작이 아닌가 싶다.
PCT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대략적으로 천만 원 정도의 자금이 필요하다. 이십 대 후반에 천만 원도 없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열심히 살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것저것 시도해서 실패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기도 하다. 언론이나 매스컴에서 빨리 '부자'가 되는 방법만 강조해서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마치 도전을 하지 않으면 인생을 낭비하는 것 같고, 세계여행을 다니며, 남들보다 많은 경험을 쌓아야 글로벌 인재가 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것들은 소수의 일부다. 성공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실패'를 내포한다. 확률적으로 볼 때, 100명이 도전하면 10명 이내가 성공하는 게 정상이고 90명이 실패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실패를 하는 확률이 아니라, 계속 일어서고, 버티면, 확률 값은 올라간다는 것이다.
마음은 여전히 무겁지만, 간단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다이어트하러 왔다!'
늘 적정 체중을 유지하던 몸무게가 인생의 매운맛에 이러 처맞고 저리 처맞다 보니, 80kg을 넘어 어느샌가 90kg이 넘었고, 여기서 정신줄을 놓으면 0.1톤이 되는 것을 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살이 찌면 불편한 것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몇 가지를 이야기해보자면, 첫 째론 코골이가 심해져서 가족들이 괴롭다. 목에 살이 쪄서 숨이 잘 안 쉬어진다. 둘 째론 리모컨을 가지러 가는 속도가 느려지고, 소파에만 누워있게 된다. 신발끈 묶는 것도 숨이 찰 지경이다. 습관적으로 오는 허리디스크는 덤이다.
몸이 아프면 생각이 부정적으로 변한다. 꾸준히 운동을 하고, 적정 체중을 유지하는 사람들의 맨탈이 좋은 이유가 있다.
PCT(4200KM의 하이킹)를 마치고 나면, 최소한 80Kg 안쪽으로는 들어가지 않을까? 행복한 상상을 해봤다. 살 빼러 간다는 의미와 조금 더 덧 붙이면 약간의 현실도피 아니겠는가?
(사실 혼자가 아니다. 후에 서로가 원하는 게 방향이 달라져 틀어졌지만, 빼놓고 이야기하기에는 이야기가 깔끔하게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밝히 기로 한다. 필자는 모 방송국에서 하는 프로그램에 출현을 하게 돼있고, PD 한분과 두 명의 감독님, 그리고 서포트를 해주는 국장님 한분 이렇게 같이 동행했다. 최대한 배제하면서 이야기를 하려고 미리 밝혀두며, 가끔 거론이 될 예정이다. )
길고 긴 입국심사를 기다리면서 가슴이 쿵쾅거린다. 부끄럽지만 당시 필자의 영어 수준은 초등학생 수준도 안됐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영어 잘하시나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부끄러워하며, 초등 수준이라고 이야기를 하고는 하는데, 내게는 그 초등 수준이 너무 높게 느껴졌다. 그런 사람들 대부분 필자의 기준에서는 영어를 굉장히 잘하는데 초등학생 수준이라 대답하니 필자의 영어실력은 원시인과 다름없었다.
입국심사에 묻혀가기 위해서 PD님 뒤에 따라갔다. 모 방송국 PD님이니 영어를 굉장히 잘할 것 같아서였다. 기대했던 PD님은 나와 같은 원시인이었다. 손과 발짓으로 대화를 이어나갈 뿐이다. 그저 간간히 들리는 것은 Broad Cast PD라는 소리만 들렸다. 덩치 큰 흑인 심사관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권을 이리저리 살피는 모습에 괜시레 더 긴장이 됐다.
배낭에 담배 5보루를 넣은 것을 걸릴 것만 같았다. 사실 이게 가장 큰 이유였다. 미국에 입국할 때는 면세 담배 2보루만 허용이 되지만, 미국 담배값이 비싼 소식을 듣고, 다섯 보루를 사버렸기 때문이다. 별의별 생각이 든다.
갑자기 검은 셰퍼드 한 마리가 튀어나와서 컹컹 내 배낭을 맡으며,
'왈왈왈왈왈' (이 새끼 다섯보루!!)
심사관에게 알려줘서 내 배낭을 압수 수색하며 어느새 내 몸은 땅바닥에 처 박혀 구금당하고 있지 않을까? 만약 걸리면 뭐라 말해야 할까? 예전에 한 코미디언이 미국에 입국할 때 영어를 할 줄 몰라서 미국은 무조건 OK만 하면 된다는 이야기에 심사관이 '당신 불법 체류자'입니까?라고 묻는 질문에 'OK! OK!'라고 답했다가 수색을 받은 적 있다고 하는 웃픈 이야기가 있어, 나는 'I DON'T KNOW'를 외칠 생각이었다.
'아 돈노!' '아 돈노!!'
갑자기 심사관이 PD님과 세 걸음 떨어져 있는 내게 오라는 손짓을 했다.
'캄!'
역시 본토 발음은 다르다. '컴Come'이 '캄'으로 들리다니, 벌써부터 담배 다섯 보루를 눈치챈 것인가? 하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긴장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최대한 웃으면서
'Hi' 인사를 건넸다.
심사관은
'you too?'
라고 물었고, 정황상 너도 일행이냐는 질문인 것 같아'
'oh me too, me too'를 연발했고, 적극적인 내 대답에, 잠시 미소 지어 보이더니,
'즐거운 미국 여행해!'
라는 말과 함께 담배 다섯 보루를 밀수? 하는 데 성공했다.
웰컴! 웰컴! 로스 엔제리너스! 살면서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았다! 처음 도착한 미국은 생각보다 평범하다.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큰 건물들이 수시로 폭발하는 장면을 봐서 그런 것인지, 멀쩡하게 서있는 건물이 평범하게 느껴진다.
이제 며칠 후면 4200km가 훨씬 넘는 거리를 오로지 두발로 걸어야 한다. 설렘과 동시에 다시금 걱정이 몰려왔다.
일행 모두가 빠져나오자,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현지 가이드 분의 차를 얻어 타고 숙소로 이동했다.
모텔 6이라는 체인 브랜드인데, 상호명과 비슷하게 대부분 1박에 60불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다. 트레일을 하면서도 종종 들렀던 곳인데, 미국의 모텔은 한국의 그것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낙후되고, 구리고, 비싸다.
짐을 풀고 나서 촬영팀과 미팅을 가졌다. A PD님이 혹시 계획이라던지 운행일정을 가지고 온 것이 있냐는 질문에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정말 부끄럽지만, 출발지로 가는 것조차 검색해보지 않았다. 촬영팀이 알아서 할 것이라 생각하고 대책 없이 왔다.
계획하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서 대략적으로 출발지와 도착지의 정보만을 가지고 무작정 떠나는 방식을 좋아한다. 그 속에서 일어나는 알 수 없는 사건과의 조우를 통해 해결하고, 좌절하면서 성장하는 형태의 여행을 선호하는 편이다. 여행은 '비움'과 '낯 섬'의 연속적인 마주침이 라게 내 여행의 철학적 명제 다는 핑계로 변명해본다.(사실은 귀찮다)
애초에 6개월짜리 코스를 어떻게 계획을 하고 떠난다는 것인가? 내 몸뚱이가 얼마만큼 잘 버텨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PCT 관련 책들은 전부 영문으로 돼 있어서 한국에서 이것저것 알아보긴 했지만 어차피 구매를 하더라도 읽을 수가 없기에 무용지물이다.
간단한 미팅이 끝나고 나서 그제야 이것저것 검색을 해봤다. 일단 가야 할 곳은 LA에서 샌디에이고로 이동해 CAMPO라는 곳으로 가야 한다. 여기서 5시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해 있고, 샌디에이고에서 CAMPO까지 하루에 한대 정도의 버스만 다녔다.
복잡한 이야기는 일단 제쳐두고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멕시칸 음식점에 들러 음식을 주문했는데, 음식이 정말 느끼하고 못 먹을 맛이다. 맥주를 거하게 마시며, 비행 피로 때문인지, 아니면 평소보다 들뜬 분위기라 취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알딸딸하게 취해, 숙소로 돌아와 몸을 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