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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나은 Jul 25. 2021

얼어붙은 눈 #2

안데르센 <눈의 여왕> 재해석 글

 새벽에 일어나 가만히 침대에 누워 있으면 세상이 고요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공기가 아직 차서 침대에서 일어나기 싫지만 먹고살려면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유일하게 매일 하는 일은 너에게 문자를 보내는 일.

'잘 잤어? 오늘도 행복하게 보내자. '

 아직 덜 떠진 눈을 비비고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걸쳐 입는다. 이 조그만 고시원 방의 햇살이 들어오는 걸 본 적은 없다. 해가 뜨기 전에 나가서 해가 지면 돌아왔으니까. 일은 고단해도 할만하다.

 대학 등록금을 내는 날 마감이 언제더라, 다음 주 금요일이었던가.

 운동화 끈을 여미고 집을 나서는 데 진동이 울렸다. 너로부터 인가 보다.

 '응 잘 잤어. 밖에 많이 추워. 따뜻하게 입고 나가. 오늘도 힘내고 사랑해.'

 귀여운 이모티 콘과 함께 보낸 너의 문자를 보며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미소가 지어진다. 내가 한마디 하면 두세 마디 꼭 더 붙여서 대답을 보내는 네가 사랑스럽다고 생각한다.

 툭툭 운동화에 발을 쑤셔 넣으며 나가는 데 갈색 봉투 하나가 문 밑에 들어와 있다. 뭐지. 올 게 없는데. 일단 챙겨서 손에 들고 고시원을 나섰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이 동네와 어울리지 않은 스포츠카 한 대가 앞에 서 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 데 고시원 동네에 세워진 이 빨간 스포츠카는 아무래도 호기심을 자극했다. 진하게 선팅이 되어 있는 운전석 가까이의 유리 창문을 기웃거리는 데 '지잉' 창문이 내려졌다. 너무 놀라 얼굴을 뒤로 젖히자 안에 하얀 재킷을 입고 선글라스를 낀 여자가 나를 쳐다본다.

 "뭐해? 타."

 "네???"

 "타라고, 너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도대체 일을 몇 개나 하는 거야? 갈색 봉투 받았지. 들고 타."

  평소 같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인데 홀린 듯이 차에 탔다. 처음 보는 수상한 여자의 차에 타다니.

 그녀는 가까이서 보니 미인이었다. 그런데 이 추위에 차 안에 히터도 틀지 않은 채 얇은 블라우스 하나에 재킷만 걸치고 있다.  

"봉투를 열어 봐."

시키는 대로 봉투를 열어보니 내 이름 앞으로 된 억 단위의 차용증이다.

부모님이 남긴 사채 빚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살던 집을 도망 나와 고시원으로 왔지만 역시 알아냈구나.

"알고 있었지? 이 빚에 대해. 제안을 하나 하지. 이 빚 갚지 않아도 좋아. 대신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해."

"무슨 말씀이신가요."

"이제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너를 버리고 나랑 같이 가면 이 빚은 탕감해줄 거야."

"왜죠. 그리고 따라가면 무슨 일을 하게 되는 거죠?"

"그건 가보면 알아. 대신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 일단 우리 집에 있어."

 그녀는 딱 이렇게만 이야기하고 묵묵히 운전만 했다. 한 시간 남짓 걸려 도착한 곳은 엄청난 규모의 대저택 앞이었다. 그녀는 익숙하듯 자동으로 열리는 문을 지나 차고에 차를 세웠다. 두리번거리며 차에서 내려 그녀를 따라 들어간 저택 안은 온통 하얀색으로 인테리어 되어 있는 집으로 마치 정신 병원 같은 곳이었다.

  방을 하나 내어 주고 그녀는 휙 어디론가 가버렸다.

 덩그러니 온 사방이 하얀 벽인 방에 앉아있으니 지금까지 버텨오던 실오라기 하나가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대학 등록금이라니. 내가 대학을 갈 생각을 했다는 거 자체가 우습다. 평범하게 살려는 나를 비웃듯이 타이밍 좋게 찾아오는 불행에 익숙해질 때도 되었는 데 멍청하게 또 잘 살 수 있다는 착각을 했었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와 함께 그녀는 다시 나타났다.

  물 한잔과 함께 눈의 결정 모양 같이 생긴 알약을 준다.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 이 알약을 매일 아침에 먹어. 빚 탕감의 첫 번째 조건이다. 이상한 약은 아니니까 걱정 마. 그냥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한 너의 정신 개조랄까. 그런 데 필요한 거야."

 별로 이상한 약이어도 상관이 없었다. 입 안에 털어 넣고 약을 삼켰다. 그러자 잠이 쏟아졌다. 자고 일어나면 배고픔도 느껴지지 않았고 어김없이 알약과 물이 옆에 놓여 있었다. 며칠 동안 그렇게 먹고 자기만 했다.

마지막으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고 일어났을 때 눈앞의 하얀 벽에 빛이 부셔 눈이 시큰거렸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방을 나가니 그 여자가 서 있었다.

 그런데 느낌이 이상하다. 새로 태어난 기분이다. 준비해준 슈트와 신발을 신고 그녀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그 사이 눈이 엄청 왔는지 저택의 정원은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다.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해졌다.

 "모든 걸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거야?"

  아.. 딱하나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다. 여자 친구. 뭐 솔직히 이제는 그냥 될 대로 되라고 어차피 내 세상에서 더 이상 여자 친구의 존재는 불필요하다. 이미 평범한 삶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으니까. 세상이 날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으니 나는 잘 살고 싶은 마음이 아예 없다.

 "잠깐 만나고 오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여기 오기 전에 당분간 못 본다는 연락은 해 두었었다. 사실 만날 필요가 없을 거 같지만 후에 귀찮은 일이 생길 수 도 있으니까 확실히 정리하는 편이 낫겠지.


  카페에 앉아 너를 기다리는 데 멀리서 네가 보인다. 처음 만났을 때는 너의 환한 미소가 나에게 한줄기 빛처럼 느껴졌다. 오늘 보는 너는 얼굴은 깡말라서 광대뼈가 툭 튀어나와 있고 머리칼은 산발해 있다. 아.. 내가 저런 사람을 만났었나... 한시라도 자리를 빨리 뜨고 싶다. 이 상황이 불편해 창 밖을 바라보니 한없이 함박눈이 내리고 있다. 잠시나마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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