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데르센 <눈의 여왕> 재해석 글_ 완결
나는 할머니께 이번 겨울 방학 동안 스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너를 찾기로 결심했다. 다행히 몇 주간 너를 완전히 잊은 사람처럼 밝게 행동하고 친구를 만나러 밖으로도 다녔기 때문에 할머니는 별 의심 없이 나를 보내준다고 한다. 한창 짐을 싸고 있는 데 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다.
"여보세요."
"혹시 겔다씨 전화가 맞나요?"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들었는 데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시죠?"
"나.. 카이의 고등학교 친구인데.. 네게 만나서 얘기할 것이 있어."
사실 네가 떠나고 며칠간은 너를 찾으려고 너의 지인들, 학교, 아르바이트하던 카페, 고시원까지 찾아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고등학교 친구라고 말하는 그녀 역시도 나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텐데 일 년이 지난 지금 갑자기 할 얘기가 있다며 연락을 하다니 의아했다. 일단 그녀를 만나기로 했다.
그녀는 자기는 카이보다 나이는 한 살 많지만 같은 학년이며, 사실은 카이를 짝사랑하고 있었다고 했다. 내가 너를 찾기 위해 미친 사람처럼 학교에 가서 수소문을 할 때 왜 연락을 하지 않았냐 하니, 그때는 자기도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카이를 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었단다.
"줄려는 게 뭐야?"
그녀는 우물쭈물하며 얘기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카이를 찾으러 너처럼 그 아이가 평소에 다녔던 동선을 다 추적했어. 하지만 카이는 마치 이 세상에서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흔적 없이 사라져 있더라. 어느 정도 포기를 하려고 했을 때 사진이 생각이 난 거야..... 내가... 카이를 너무 좋아해서 사진을 몰래 좀 찍었었어. 알아! 하면 안 되는 행동이라는 거....... 카이의 사진을 보면 뭔가 단서가 나오지 않을까 해서 사진을 하나하나씩 다 살펴보기 시작했어.... 그리고 찾아낸 게 있었어."
그러니까 그녀가 그동안 너를 스토킹 했고, 그 덕분에 그녀는 사진에서 너를 찾을 만한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는 말을 하고 있다. 어이가 없었지만 지금 상황에 이는 중요한 게 아니므로 다급하게 그녀의 다음 말을 재촉했다.
"이 사진 좀 봐봐. 이 빨간색 스포츠카 보여?"
그녀가 보여준 사진들에는 네가 매일 새벽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고시원에서 나오는 사진과 지하철 역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이 찍혀 있었다. 그런데 카이가 사라질 즈음 며칠 전부터 그의 고시원 앞에 어울리지 않은 스포츠카가 주차되어 있었다며 사진 여러 장을 보여 주었다. 그러고 보니, 네가 이런 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사라졌었지.
"내가 아는 사람에게 비밀로 부탁해서 이 차의 번호를 조회해 차주의 신상 정보를 알아내고 그 사람의 집주소를 알아냈어. 사실 내가 가보려고 했는 데.. 만약에 그곳에 카이가 있더라도 카이는 나를 반기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 더군다나 그 애가 자진해서 머무르고 있다면, 내 말은 더욱 들으려 하지 않을 거고. 그래서 너에게 이 주소를 주려고 해."
그녀는 내게 메모를 하나 건넸다.
'카이가 이 집에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의 엄청 큰 대저택이었다.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고 초인종을 계속 눌러도 대답이 없었다. 몇 번이나 다른 날 찾아가 봤지만 항상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이상한 건, 이 저택 부근에만 가면 얼음이 언 곳이 많고, 눈이 항상 녹지 않고 가득 쌓여 있었다.
'오늘 마지막으로 가 보고 얻는 게 없다면 다른 방도를 찾아야겠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저택으로 향한다. 평소와 달리, 집 가까이 다가가 보니 철문이 살짝 어긋난 것처럼 보였다. 설마.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문을 살짝 밀어보니 '끼익' 소리를 내며 철문이 열렸다. 나는 덜덜 떨리는 오른손을 움켜쥐며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집은 더 크고 아니 웅장했다. 특이한 건 정원 중앙에 연말 파티에서나 볼 법한 얼음으로 만들어진 여자의 대형 조각상이 있었다.
저택은 사방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서 안이 훤히 보이는 구조였다. 굳이 집안에 들어가지 않아도 카이를 찾을 수 있을 거 같아 집 주변을 찬찬히 돌아보는데 집의 뒤편으로 돌아서는 순간 커다란 거실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카이다.'
나도 모르게 주먹으로 통유리를 마구 쳐댔다. 쾅쾅쾅.
"카이야!!! 나야!!! 겔다야!!!!"
바로 눈앞에 네가 있는 데 너는 돌아보지 않고 책만 보고 있다. 주먹이 빨개질 때까지 두드리다가 바닥에 있는 커다란 돌을 하나 주워 들어 통유리로 된 창문을 깨기 시작했다. 끼익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이내 와장창 깨졌다.
유리 조각이 날카롭게 흩어져 있는 바닥을 바사삭 밟고 달려가 이름을 부르며 너의 어깨를 세차게 흔들었다.
하지만 너의 눈은 계속 책에만 고정된 채 나를 쳐다보지 않고 있다. 너에게서 책을 뺏으려 하자, 이내 내 쪽으로 눈을 돌려 날카롭게 쏘아본다. 내가 아는 카이의 눈이 아니다.
너의 눈은 동공이 풀려 있고 까만 눈동자가 흐릿한 회색처럼 변해 있었다. 나를 쳐다보는 눈이 너무 혼탁해서 내 모습이 전혀 비치지 않았다.
"카이야. 내가 너를 얼마나 찾았는 줄 알아? 이제 나도 못 알아보는 거야?"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치 커다란 얼음 조각이 나의 심장에 박히는 거 같다. 서러운 눈물이 흘렀다.
불과 일 년 전까지만 해도 다른 이보다 따뜻한 마음을 가졌던 네가 이렇게까지 변해버린 모습을 보니 바로 널 찾지 못한 스스로에게 후회가 되었다. 아이처럼 엉엉 소리를 내고 울었다.
그 순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네가 갑자기 눈을 감싸고 쓰러지면서 함께 들고 있던 책의 페이지 위로 내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러자 책에 내 눈물이 떨어진 곳의 글자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문득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이 어쩌면 너를 예전으로 돌려줄 해결책일지 몰라.'
쓰러진 너의 손에서 책을 빼앗아 눈이 가득 쌓인 창 밖으로 나가 눈을 페이지 위에 문대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종이 책임에도 불구하고 책은 젖지 않았고 어떤 한 문장이 흐릿하게 나타나는데.
"겔다야."
뒤에서 나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네 창백했던 혈색이 돌아와 있고 눈은 예전과도 같은 흑빛의 눈동자로 돌아와 있다. 너를 와락 안았다.
"어떡해 여기까지 왔어?"
너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너는 왜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와 이 저택으로 온 이유, 알약을 먹기 시작하자 과거의 감정과 모든 기억이 서서히 사라졌다는 점, 그리고 왜 홀린 듯이 책을 보고 있었는지 나에게 설명했다.
"그러면 이 책에서 '영원'이 들어간 문장을 찾아내면 되는 거네."
아까 눈 위에 팽개쳤던 책을 찾아들고 책 안을 들여다보았다.
하얀 페이지에 한 문장이 보였다.
[ 누군가 너를 위해 이곳까지 찾아와 진실된 눈물을 흘린다면 너는 영원히 자유를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