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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혜진 Jan 05. 2018

뚜벅이 in 제주

세 번째, 제주 혼자 여행을 떠나다


세 번째 제주 여행이 끝났다. 뭔가 ‘호시절은 다 갔네’ 같은 쓸쓸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아마 이번 여행에서 보고 들었던 것, 만났던 사람들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아서겠지.


이번까지 하면 혼자 제주 여행을 떠나는 게 세 번째인데, 모두 뚜벅이 여행자 모드였다. (물론 학교에서 수학여행으로 간 적도 있지만, 그건 여행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견학’에 가까웠으므로) 버스를 타고 주요 여행지를 이동할 때마다 기본으로 1~2시간은 소요되는 터라, 아주 효율적인 여행이라고 볼 수는 없다. 게다가 버스 하나를 놓치면 30분 이상 기다려야 하는 건 기본이고, 버스에 꾸깃꾸깃 몸을 접고 이동하는 것도 고역이다. 그런데도 뚜벅이 여행을 하는 이유는 편리함과 시간을 포기하는 대신 볼 수 있는 것, 만나는 사람들이 여행의 여운을 짙게 만들기 때문이다.




1

츤데레 제주 버스 기사 아저씨

처음 혼자 제주에 내려갔을 때, 멋모르고 해외여행에나 가져갈 법한 28인치 캐리어를 끌었다. 버스가 와서 끙끙대며 캐리어를 들고 버스에 탔는데, 기사 아저씨가 "짐칸에 실어야지"라며 약간 화난 듯한 말투로 말을 하셨다. 쭈뼛쭈뼛 대며 계단을 다시 내려가 짐칸에 실으려 하는데, 기사 아저씨가 "뒤에 버스 밀려서 빨리 가야 하는데, 나 참" 이러시면서 무거운 캐리어를 번쩍 들어서 짐칸에 넣으시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빨리 타요 늦었으니까" 하면서 또 버럭하시는 아저씨. 약간 벙쪄 있었는데, 뒤이어 들리는 말. "넘어지니까 손잡이 꽉 잡고.(츤츤)" 츤데레의 정석이 아닐까 싶은 그 기사 아저씨의 말투를 떠올리면 아직도 웃음이 난다. 화난 것 같은 말투로 오래 알고 지내던 주민들에게 인사를 하기도 하고, 여행자들을 무심히 챙긴다. 은근하게 따뜻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아, 그리고 이번 겨울에도 신기한 일이 있었다. 제주 서쪽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느라 202번 버스를 하루에 세 번 정도 타게 되었다. 그런데 버스를 탈 때마다 똑같은 기사 아저씨가 계셨다는! 나 혼자 흠칫 놀랐지만, 애써 놀라지 않은 척했다. (그 기사 아저씨도 말투가 츤츤이었다!)



2

인공적인 빛 대신 보이는 것들에 대하여

제주는 온통 하늘이고 바다다. 하늘인지 바다인지 모를 파란 것들을 바라보며, 높은 건물과 인공적인 빛대신 보이는 것들에 대해 새삼 생각한다. 해가 지고 나면 칠흑 같은 어둠이 짙게 깔리는 제주 시골 마을을 보며, 그동안 얼마나 인공적인 빛에 시달렸는지 깨닫는다. 이렇게 어두울 수가 있구나 싶기도 하고. 해가 떨어지면 카페나 식당 문도 일찍 닫는 덕분에 여행 내내 일찍 하루를 마무리하고 다음날 조금 일찍 하루를 시작하는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 (물론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규칙적인 생활의 밸런스가 와장창 깨졌지만.)  



3

제주에서 만난 따뜻한 사람들

재작년과 마찬가지로 2017년 마지막 날도 제주에서 맞았다. 이번에는 처음으로 에어비앤비 숙소를 잡았는데, 주인 언니의 친구도 마침 서울에서 내려와 옆 방에 머물렀다. 12월 31일, 마지막 날 혼자 피시앤칩스에 맥주를 한 잔 마시고 숙소에 돌아와서 일찍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 주인 언니가 같이 맥주 마시자고 나를 불렀다. 그렇게 우연히 만들어진2017년 마지막 술자리! 주인 언니와 그 친구는 원래부터 알던 사이가 아니라, 방콕에서 우연히 배낭여행을 하다 만난 사이라 했다. 너무 잘 맞아서 지금까지도 연락하며 친하게 지낸다고.


그날 언니들에게서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뿜어내는 자유로움과 긍정적인 에너지를 듬뿍 느꼈다. 처음 본 언니들이었는데도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사이처럼 몇 시간을 웃고 떠들었다. (언니들! 언니들이 말했던 ‘제2의 신성우’ 이덕진도 오늘 검색해봤답니다! 흐흐) 함께 새해 카운트다운도 하고, 아침 일찍 차 타고 송악산으로 가서 빛나는 새해 해돋이를 함께 봤던 기억. 아마 제주에 올 때마다 생각나겠지.


그런가 하면 지난여름 여행 때도 우연히 히치하이킹을 한 적이 있다. 월정리에서 성산일출봉까지 가는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데, 한 아저씨가 어디까지 가느냐고 태워주시겠다고 하는 게 아닌가. 그분은 서울에서 살다가 제주에 내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가끔 이렇게 차 타고 드라이브하다가 여행자들을 태워주면서 본인도 제주 여행을 하고 있다고. 그 말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이런 분들 덕분에 여행지의 추억이 더 짙어지는 거니까.  


평소에 나는 경계심이 많은 편인데, 이렇게 여행지에만 오면 경계심이 허물어지고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는 것이 마냥 재미있게 느껴진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여행의 마법이 이런 게 아닐는지 싶다. 앞으로 혼자 훌쩍 여행을 떠날 수 있는 날이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기회가 닿는 한 열심히 떠나고 싶다. 내 20대를 찬란하게 만드는, 아름다운 여정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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