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ALAXY IN EUROPE Oct 12. 2023

등장인물들을 연민하다

[고전] 백치(상) | 도스토예프스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백치> 상권을 빛의 속도로 읽었습니다. 지하철 안에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어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보다 더 인물들 하나하나에 몰입되는 것 같아요. 도스토옙스키가 애정하는 작품이라고 들었는데, 그 이유를 알 것 같다고 할까요.

<백치(상)> 표도르 도스또예프스키 | 김근식 옮김 - 열린책들

#고전살롱 #도스토옙스키 #도선생님 #두번째 

처음엔 스스로를 백치라 부르고,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지칭해도 화를 내지 않는 미쉬낀 공작이 한심했습니다. 바보같이 무시받고, 당하고만 사는 캐릭터라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점점 그의 존재감이 느껴졌고, 그를 어느 정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 다른 이들에게 아첨하거나 허세를 부리지 않았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불평하거나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로고진이나 레베제프, 예빤친 장군과 가브릴라, 그리고 그 집의 시종에게도 똑같은 태도로 대하는데요. 의심의 눈초리에도, 조소 어린 시선과 조롱, 격한 비난과 분노에도 자신이 할 말은 다 하면서 특유의 예의와 친절함을 잃지 않습니다.

수많은 <백치> 표지들 중 하나 - 잘생긴 미쉬킨 공작의 모습일까?

처음에는 어떻게 저럴 수 있지 하며,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했어요. 그리스도를 모델로 한 인물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럼 그렇지 하고 무릎을 쳤습니다. 그러다 그와 다른 등장인물들의 차이점을 생각해 보게 되었고, 순결하다 못해 고결한 정신을 가진 미쉬낀 공작이 백치라고 묘사된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의 세상에 사는
겉과 속이 빤히 보이는 이는 백치가 된다.

외눈박이 세상에서는 두눈박이가 정상이 아닌 것과 같은 원리인 거죠. 모두가 모든 것을 가지려고 드는 세상에서 자기 것이 아닌 것을 내어주는데 망설임이 없는 미쉬낀 공작은 백치, 바보 천치일지도 모릅니다. 모두가 모든 것을 가지려 한다는 사실을 서로 알고(또 그렇게 믿고) 있기에 등장인물들은 겉과 속이 다를 수밖에 없는데요. 내가 너의 것을 노린다는 사실을 그대로 알려주면, 상대방은 주지 않으려고 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죠.

또 다른 <백치> 표지 - 나스따시야에게  돈다발을 내미는 로고진

더 나아가 <백치>의 등장인물들은 상대방을 조종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미쉬낀 공작이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하고, 다른 사람을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 자체가 없는 것과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로고진은 나스따시야가 자신을 사랑했으면 하고, 또쯔끼는 나스따시야를 시집보내고 자신의 과거를 묻으려 합니다. 예빤친에게 딸의 결혼은 하나의 비즈니스 수단인 듯하고, 리자베따 쁘로꼬피예브나 역시 남편인 예빤친과 세 딸은 물론, 주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여주길 바라죠. 가브릴라와 그의 가족들도 레베제프와 다른 등장인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스따시야 또한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에 또쯔끼나 예빤친, 가브릴라와 로고진 등이 당황하거나 절망하고, 때론 희망을 갖는 모습에 따라 극단적으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행복해졌을까요? 대답은 No입니다. 잠깐의 성취나 즐거움은 있을지 모르지만 다시 가진 것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못 가진 것에 대해 분노하며 각자의 삶이 이어집니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서로 미워하고, 탓하며, 타협했다가, 다시 돌아서기도 합니다. 이쯤 되면 정작 누가 백치인지 의문이 들기까지 합니다. 특히 나스따시야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그녀가 스스로의 안위와 행복 따윈 염두에 두지 않고 파멸의 구덩이로 뛰어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니까요. 그 뒤를 쫓고 있는 로고진 또한 곧 무슨 일을 저지를 듯 위태위태해 보이긴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 더해 이후 미쉬낀 공작의 재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나타난 부르도프스끼와 그의 일행들, 미쉬낀 공작의 눈과 귀를 막고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은 레베제프, 입만 열면 거짓말뿐인 이볼긴 장군 등의 모습도 한심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 모든 등장인물들에게 연민과 애정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희한하게도 나는 모든 등장인물들에게 연민을 느꼈다. 이름이 아무리 어려워도 누구인지 헷갈리지 않았고, 아무리 미운 짓을 해도 측은하게 여겨졌다. 더 나아가 모든 행위들이 사랑스럽고 깜찍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들의 화나 부끄러움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등장인물 모두는 어리고 젊은 시절, 과거 나의 치기 어린 모습이고, 점점 나이가 들어 길들여지고 겁이 많아진, 세상에 물들어버린 현재의 나이고, 늙고 병약해져 쉽게 지치고 어쩔 줄 모르는 미래의 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백치> 상권을 읽고 난 직후에 제가 남긴 메모입니다. 처음엔 미쉬낀 공작에게 빠져들었습니다. 그건 저만은 아니에요. 책 속 인물들도 처음엔 미쉬낀 공작을 의심하고, 조롱하고, 백치라 하지만 정작 그와 가까이서 이야기를 나누기만 하면 그에게 빠져들어 친구가 되거든요. 그리고는 이해타산적인 가브릴라도 가족을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어쩔 수 없지 않았나 싶어 연민을 느꼈습니다. 제멋대로인 리자베따의 행동도 그 저변에는 미쉬낀 공작을 걱정하는 마음이 있지 않나 해서 시끄럽지만 따뜻하게 느껴졌고요. 사납고 거친 로고진도 집에 온 미쉬낀 공작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서 내면에 숨겨진 어린아이가 보이는 듯했습니다. 폐병으로 죽어가는 이뽈리뜨와 돈 때문에 자신의 어머니를 욕되게 한 부르도프스끼, 거짓 기사를 꾸며쓴 복서 껠레르 등 나열하자면 끝이 없지만, 미쉬낀 공작을 거쳐간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에 대해 저도 미쉬낀 공작과 같은, 연민(憐憫)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 듯합니다. 

한스 홀바인 作  <무덤 속 그리스도의 시신>

하지만, 연민은 그 무엇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미쉬낀 공작의 선의는 곡해되고, 비난받고, 주변 사람들은 변할 기미가 보이지 않아요. 책 속에 등장하는 한스 홀바인의 <무덤 속 그리스도의 시신(The body of the Dead Christ in the Tomb)>의 그림이나 아글라야가 읊은 시 속의 <가난한 기사>는 한 명의 선한 인간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음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많은 일이 일어났지만 아직 어떻게 결론이 날지 모르는 상권을 마치고, 하권을 읽을 생각에 매우 흥분된 상태예요. 줄거리와 작가의 의도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책을 완독 한 이후에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알고는 있지만, 제대로 읽지 못했던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었는데요. <백치(상)> 리뷰를 쓰면서 그때 쓴 리뷰(미완결이 주는 희망)를 읽어보니, 정말 도선생님이 대단하다는 생각과 함께 이러한 훌륭한 글들을 써주셔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계속 신과 이야기 나누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