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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LAXY IN EUROPE Feb 05. 2023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영화] 3000년의 기다림

서울발 파리행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보기 시작한 <3000년의 기다림(Three Thousand Years of Longing)>은 영화 속 지니가 작은 호리병 속에서 수천 년의 시간을 기다렸다 나온 것처럼 이코노미석 좁은 자리에 갇혀 있던 나를 마법처럼 영화의 세계로 데려갔습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몰입해서 보고는 귀에 꽂혔던 대사들을 메모했어요. 사랑의, 사랑에 의한, 사랑을 위한 영화라고 해도 무방할 듯합니다. (이후부터는 스포일러 주의!)


틸다 스윈튼과 이드리스 엘바

지니와 알리씨아의 첫 만남

두 배우의 저력은 정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습니다. 살짝 코믹스러운 두 주인공의 첫 만남 씬도 틸다 스윈튼과 이드리스 엘바의 존재감이 컸던 것 같아요. 지니라는 신비한 존재를 호리병에서 꺼내고 당황해하면서도 대학교 때 공부한 고대 언어로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는 알리씨아와 수천 년 만에 깨어나 낯선 현대 문명을 접하고 어안이 벙벙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논리로 이를 이해해 나가는 지니의 모습에 오히려 사실감이 느껴질 정도였으니까요.


소원을 빌라는 지니와 소원을 빌어서 끝이 좋은 경우를 못 봤다며 소원을 빌지 않는 알리씨아. 지니는 알리씨아가 소원을 빌게 하기 위해 자신이 어떻게 호리병 속에 갇히게 되었는지 그리고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라면 죽고 못 사는 서사학자(narratologist) 알리씨아는 점점 그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듭니다.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이어지지만 여기서는 생략할게요) 그리고 결국 소원을 빕니다.

 

I have a wish.
I'm afraid it may be too much to ask?
I'm here to love you.
I wish for you to love me in return.
Is it all too much to ask?
나도 소원을 빌래요.
근데 이게 너무 큰 소원일까 걱정이네요?
내가 당신을 사랑할게요.
당신도 나를 사랑해 주세요.
너무 큰 소원일까요?


나는 당신을 사랑할 테니, 당신도 나를 사랑해 주겠느냐는 소원이라니! 사랑을 시작하는 이들의 최대 두려움이 아닐까요? 특히 영화가 시작할 때 알리씨아의 자기소개를 보면 이 소원이 왜 "too much to ask"를 연거푸 외칠 만큼 큰 소원이었는지 알 수 있어요.


My name is Alithea.
My story is true.
I am a solitary creature by nature.
I have no children, no siblings, no parents.
I did once have a husband.
내 이름은 알리씨아에요.
이 이야기는 실화입니다.
나는 타고나기로
혼자 있길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나는 자식도, 형제자매도, 부모님도 없어요.
한 때 남편이 있긴 했었죠.
 

본디 '타고나기를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생물(solitary creature by nature)'이라니요. 단단한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처럼 자신을 열기를 두려워했던 알리씨아가 외피를 벗어던지고 자신을 내어 보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소원'이라는 안전장치를 걸고 말이죠.


사랑이 익어가는 시간

그녀의 세상은 그로 물들기 시작합니다. 출근을 해서도 퇴근길에도 그의 목소리만 들리는 듯해요.


Every listening voice was yours.
Every voice, every scent, everywhere.
들리는 모든 목소리는 당신의 것이에요.
모든 목소리, 모든 향기, 어디에나.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는 날들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웃에게 정식으로 소개하기에 이르죠. 사랑이 익어가는 시간이 얼마나 달콤한지 아시죠? 어떤 이들은 무엇을 해도 설레고 몽글몽글한 이 시간이 제일 좋았다고 이야기하기도 하는데요. 제 생각에도 딱 이 즈음에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좋은 만큼 불안정하다고 할까요. 흔들리고 쉽게 날아가버릴 것 같은 느낌이 있는데 알리씨아의 내레이션이 이를 잘 표현해 주는 것 같습니다.

What are we to do with 'longings' awoken? Love is not something we come to by reason. It's more like a vapor, a dream, perhaps, to lure us into the enchantement of our own stories. If that's so, how are we to know if it's ever real? Is it a truth or simply a madness?

열망이 깨어났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사랑이란 이성에 의해 생기는 것은 아니에요. 사랑은 좀 더 수증기나 꿈같이, 아마도 우리 자신의 이야기로 된 마법 속으로 우리를 유혹하는 거에요.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이게 진짜인지 어떻게 알죠? 실제일까요 아니면 단순히 미친 행동일까요?


지니와 인간, 서로 다른 두 존재

하루하루 둘의 삶은 지속되지만 이 둘은 엄연히 다른 존재입니다. 유한의 삶을 사는 인간과 영생을 누리는 지니, 물리적이고 계산적인 사고의 인간과 영적이고 신비한 존재인 지니의 공존이 계속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죠. 비록 영화 속이긴 하지만 삶은 현실이고 서로 '사랑'한다는 것이 모든 걸 해결해주진 못하니까요.  

어느 날 밤 벽난로 앞에서 둘의 대화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인간을 애정 어린 눈으로 보는 지니의 시선이 신선했어요. 모순 덩어리기에 매력을 느끼고,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헤쳐나가는 힘을 그대로 바라봐주는 것에서 저도 한 명의 인간으로서 구원받는 느낌이었어요. 조용하지만 진지하게 이어지는 둘의 대화가 제게는 영화 속 가장 하이라이트였던 것 같아요.

Djinn: Humankind is a wonder.
Alithiea: We remain bewildered. When we can't contain the chaos, we're filled with dread and panic. We turn on each other.
Djinn: But of course! You are human. That is your nature! Such a mess of contradictions, all of you. Humankind, what a conundrum. You fumble around in the dark, and yet, your herd, your intelligence to great effect. It is a quite a story. I cannot wait to see where it goes.
Alithiea: Or how it might end.

지니: 인류는 참 놀라워요.
알리씨아: 우리는 여전히 야만적이죠. 우리가 혼돈을 감당할 수 없을 때, 우리는 두려움에 떨며 공포에 사로잡혀요. 우리는 서로 싸우기 시작하죠.
지니: 하지만 그래야죠! 당신은 인간이니까. 그게 당신의 천성이에요! 모순 덩어리죠, 당신들 모두 다! 인류, 참 모를 존재야.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손으로 더듬어 찾다가, 하지만 당신 집단, 지성이 극적인 결과를 가져와요. 대단한 이야기에요. 나는 그게 어디로 향할지 궁금해요.
알리씨아: 또는 어떻게 끝날지요.

반면 인간인 알리씨아의 불안을 느꼈습니다.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언젠가는 끝날 존재로 스스로를 느끼는 듯했어요. 사랑하는 상대 앞에서는 이유 없이 작아지고 그로 인해 느끼는 불안감 같이 보이기도 하고, 신과 자연의 사랑 앞에 불평과 불만이 가득 찬 어린아이 같은 인간으로 보이기도 했습니다.   


사랑의 의미

결국 영적인 존재인 지니는 수만 가지 주파수가 공중을 떠돌아다니는 현대 문명사회에는 적응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개발한 문명의 이기들은 내뿜는 수많은 전파들은 모든 것을 이미 보고 듣는 지니를 병들게 합니다. 이러한 다른 존재로서의 지니는 영화적 설정 이긴 하지만 아씰리아에게 '사랑'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할, 그리고 다른 '소원'을 말할 기회를 줍니다.

Alithea: Love is a gift.
Djinn: I can do that for you.
Alithea: Thank you for trying. It's a gift of oneself given freely. It's not something one can ever ask for. The moment I made that wish, I took away your power to grant it. My djinn, if this world is not for you, I wish that you return to where you belong, wherever it may be.

알리씨아: 사랑은 선물이에요.
지니: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있어요.
알리씨아: 애써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누군가의 선물은 자유롭게 줘야는 거죠. 사랑은 누군가 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내가 그 소원(나를 사랑해달라는)을 빈 순간, 나는 당신이 허락할 수 있는 힘을 빼앗아버렸어요. 나의 지니, 이 세상이 당신에게 맞지 않다면, 나는 당신이 속한 곳으로, 그곳이 어디이든지, 돌아가길 원해요.

나도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도 나를 사랑하는데 우린 왜 이렇게 힘든 걸까요? 사랑을 할 때 이런 생각 한 번쯤 해 본 적 있지 않으세요? 서로 사랑하지만 생기는 문제들을 안고, 덮고, 묻고 가느라 속이 다 문드러질 때쯤 이런 생각을 합니다.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게 맞는 걸까?'


알리씨아의 결단은 빨랐습니다. 사랑은 구속이 아니고, 의무가 아닌 선물이기에,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워야 하는 거죠. 그만큼 그녀는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꼭 보내줘야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단 한순간도 지니가 자신으로 인해 고통받기를 원치 않지 않았을까요? 그녀에 대한 그의 사랑이 아무리 진심이어도 그가 겪는 고통도 그만큼 실재하는 것이니까요.


세 번째 소원을 빌고, 호리병은 깨어지고 그녀의 소원은 이루어집니다. 지니는 자유의 몸이 되었어요. 하지만 그는 그녀를 찾아옵니다. 그녀가 살아있는 동안 언제나 웃으며, 그녀가 눈을 감고 '1, 2, 3!'을 속으로 세면 눈앞에 와 있어요. 이 장면도 참 얼마나 로맨틱했던지.  

He would visit from time to time, and they would grasp each vivid moment. Despite the pain of the roucuous skies, he always stayed longer than he should, long after she beged him to leave. He promised to return in her lifetime, and for her that was more than enough.

그는 가끔 찾아와서 둘은 각자 소중한 순간을 즐겼어요. 요란스러운 하늘 때문에 겪는 아픔에도 그는 항상 그녀가 돌아가라고 빌고 난 한참 후에도 머물렀죠. 그는 그녀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돌아오겠다고 약속했고, 그건 그녀에게 충분했어요.

사랑은 늘 함께 하는 거 맞는 것 같아요. 하지만 물리적 시공간에 한정해서는 아니에요. 미소 지을 때마다 떠올린다는 것, 애틋함에 눈물이 살짝 고일 수도 있다는 것, 그로 인해 내가 더 잘 살아야지 싶어진다는 것, 나보다 더 나를 챙겨줌에 고마운 마음이 든다는 것 등 이 모두는 물리적 시공간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이고, 그래서 사랑은 위대한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 3000년의 기다림 메인 예고편( https://youtu.be/zfKZBW7xgFg)

영화 <3000년의 기다림> 예고편

* 참고로 글 속 한글 대사들은 영어 대사를 제가 뜻만 통하게 번역한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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