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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LAXY IN EUROPE Oct 18. 2024

단테의 지옥, 당신의 지옥

[고전] 신곡/지옥편 | 단테 알리기에리

단테의 신곡을 아무 배경 없이 읽기 시작했다.  

그래서 챗GPT(https://chatgpt.com/)에게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끝없는 방랑과 좌절, 고난 속에서 피어난 작품이구나!
그렇다면 '신성한 우리의 삶'이라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지옥(INFERNO)

우리 인생길의 한중간에서
나는 어두운 숲 속에 있었으니
올바른 길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신곡 '지옥'편 제1곡의 첫 문장입니다. "방랑의 고통과 괴로움, 삶의 고난 속"에 있던 단테의 심정이 바로 딱 이렇지 않았을까요? 고향을 지척에 두고도 갈 수 없는 망명생활, 가족들과 떨어져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이곳저곳 전전하는 하루하루가 길을 잃은 마음이었을 거예요.  


그럼 단순히 단테는 자신의 삶이 지옥 같아서 신곡을 쓰기 시작했을까요? 그가 책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10여 년이 넘는 오랜 시간 동안 그는 왜 이 책을 썼을까요?

단테는 실제로 삶에서 길을 잃은 상태에서 신곡을 쓰기 시작했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그 시작이 쉽진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신곡에서도 '햇살에 비치는 언덕'에 닿기 위해 지옥을 통해 가는 긴 여정을 시작하기 전 망설이는 단테가 베르길리우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왜 갑니까? 누가 허락합니까?
저는 아이네아스도, 바오로도 아니고,
그럴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비록 그곳에 간다고 하더라도
잘못된 여행이 아닌지 두렵습니다.
현인이시여, 저보다 잘 이해하소서. 


단테는 두려웠던 게 아닐까요?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버리고, 망명을 끝내고 싶지 않았을까요? 또는 그저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생각을 멈추고 범인으로 편하게 살고 싶지 않았을까요? 신곡 속 단테가 그저 어두운 숲 속에 남아 맹수들에게 먹히기만 기다릴 수도 있는 것처럼요. 하지만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의 입을 빌어 자신에게 용기를 주며 산 자로서 지옥을 통과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왜? 무엇 때문에 멈추는가?
왜 가슴속에 그런 두려움을 갖는가?
왜 용기와 솔직함을 갖지 못하는가?


이는 자신이 멈추지 않으면 '햇살 비치는 언덕'에 도달할 수 있다는, 자기 성찰과 구원의 기회를 단테가 믿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거예요.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제대로 마주하고 들여다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지옥(INFERNO)의 의미(意味)

책을 읽으면서 재미있었던 설정 중 하나는 단테가 '산 자'로서 지옥에 들어간다는 건데요. 과거 삶의 잘못에 대한 벌을 받으러 끔찍한 '지옥'으로 떨어진 게 아닌 거죠. 저는 이 설정에 대해 지금,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삶이 '지옥'이라는 것을 내포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과거'가 아닌 '현재성'을 가진 지옥에 존재하는 '산 자'로서 얼마든지 '자기 성찰'을 통한 '회개'가 가능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따라서 과거의 잘못을 지금 후회하고 벌을 받고 회개한 삶을 산다는, 과거-현재-미래 시간적 순서가 있는 구조가 아닌 거죠. 지금 나의 삶은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바로 지옥일 수 있습니다. 살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바로잡아나가면서 나의 길을 찾아야 해요. 단테가 지옥에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요. 그렇게 나의 지옥, 또는 나의 삶에서 내가 방향을 잡아나가는 것만이 지옥을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라고 생각해요. 가만히 기다려서는, 또는 잘 모르겠지만 그저 '착하게 살겠다'고 무조건적으로 반성만 한다고 누군가 구원해 주는 것이 아니니까요. 

아름다운 삶에서 내가 옳게 판단했다면
네 별을 뒤따르는 한 너는 실패 없이
영광의 항구에 닿을 것이다.


신곡 지옥편 제15곡에서 단테의 스승 브루네토가 단테에게 한 말입니다. '네 별을 뒤따르는 한'의 의미가 자신이 가고자 하는 대로 간다는 뜻인지, 정해진 운명을 따른다는 것인지 다른 해석이 가능할 듯한데, 단테의 대답이 단테의 의지를 보여주는 듯합니다. 


당신에게 분명히 밝히고 싶은 것은,
제 양심이 저를 꾸짖지 않는 한
어떤 운명에도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예언은 저의 귀에 새롭지 않으니,
운명은 원하는 대로 제 바퀴를 돌리고
농부는 괭이를 휘두르게 놔두라지요. 


간단히 풀이하면, 내 앞에 어떤 운명이 놓여있든 그것에 휘둘리지 않고 내 갈 길을 가겠다는 것이 단테의 의지라고 생각했어요. 이 정도의 의지라면 지옥도 뚫고 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죠. 


나의, 그리고 당신의 지옥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어디일까요? 때론 권태의 지옥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다가, 분노의 지옥에서 모든 것을 불사르다가, 질투의 지옥에서 나의 못남을 자책하곤 합니다. 뭔가 큰일이 없더라도 이는 일상의 연속인 것 같아요. 이 일상의 지옥을 우리는 단테처럼 소심함에 망설이고, 두려움에 놀라 숨기도 하면서도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단테가 십여 년에 걸쳐 천국에 도달한 것도 이렇게 평생이 걸리는 여정에 비하면 빠른 도착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네요. 이제 지옥문을 나서니 연옥을 거쳐 천국으로 가는 여정을 계속 따라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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