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신곡/지옥편 | 단테 알리기에리 _ 두 번째
오늘은 단테의 신곡을 두 번째로 만났습니다. 그리고 반해버렸어요. 더 정확히는 신곡 지옥편 전편도 아닌, 제1곡의 6줄만으로 우리가 단테의 신곡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찾아주신 민승기 교수님께 반해버렸다고 말하는 게 맞겠네요.
우리 인생길 반 고비에
올바른 길을 잃고서 난
어두운 숲에 처했었네.
아, 이 거친 숲이 얼마나 가혹하며 완강했는지
얼마나 말하기 힘든 일인가!
생각만 해도 두려움이 새로 솟는다.
(신곡/지옥편 | 단테 알리기에리 - 제1곡)
민승기 교수님은 어두운 숲을 헤매었던 '순례자'로서의 과거(~처했었네, ~ 완강했는지~), 지옥-연옥-천국을 순례하고 돌아와 글을 쓰고 있는 '작가'로서의 현재(얼마나 말하기 힘든~, ~새로 솟는다)를 비교하며, 이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간극'이 2024년 현재를 사는 독자가 1300년대에 지어진 '신곡(Commedia)'에 매력을 느끼는 포인트이며, 단테의 신곡을 읽어야 하는 이유라고 설명하시는데요.
즉, 순례를 하는 시점에서 글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순례를 마치고 다시 돌아와 글을 쓰는 시점에서 작가가 가지는 1. 온전하지 않은 기억으로 인해, 2. 글을 쓰는 현재의 작가가 가지는 욕망이 반영되어 기억은 변형될 수밖에 없고, 3. 이러한 간극은 순례자와 작가의 충돌로 이어진다는 것이죠. 순례를 마치고 지옥-연옥-천국까지 이르렀다가 다시 돌아온 단테는 순례를 막 시작한 '어둠의 숲'에 있을 때의 단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입니다. 지옥에서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이 그의 몸과 마음에 흔적으로 새겨져 있기 때문이죠.
이러한 간극, 틈은 우리를 존재하게 합니다. 빛과 어둠이 나뉘고 하늘과 땅이 나뉜 그 사이에 우리는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 '사이'에서 우리의 삶은, 이야기는 이어집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과 죽음 사이에도 간극이, 틈이 존재합니다.
삶과 죽음은 함께 있다고 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 우리에겐 '죽음의 가능성'이 드리워 있으니까요.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평생을 잘 살다가 마지막 순간에만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매일매일 죽음을 연기하고 있는 것이며, 죽음은 내가 존재하는 이상 떼어낼 수 없는 그림자와 같다는 설명에 맞는 말 같으면서도 어쩐지 무서워졌습니다. 자크 데리다(Jaques Derrida)라는 프랑스 철학자의 '사후를 숨 쉰다'는 표현에 나도 지금 이 강의실이 아닌 단테와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지옥을 걷고 있는 듯한 생각도 들었어요.
이후에도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리스 로마 신화와 성경,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공자와 장자, 카프카와 프로이트, 히치콕과 홍상수 감독 등 동서양과 시대, 장르를 넘나들며 간극의 의미와 인간의 삶과 죽음에의 대면에 대해 얘기해 주셨지만, 이를 모두 소화해서 글을 쓰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할 듯합니다. 연옥 편과 지옥편까지 읽고, 교수님의 설명을 좀 더 고민한 후에 이어가려고요.
나이지만 내가 아닌 타자(他者)의 의미, 지옥-연옥-천국을 거쳐 다시 돌아오는, 내려오는 것의 의미, 나와 너의 구분이 없는 촉각의 의미 등 다양한 이야기를 문학적으로, 그리고 또 철학적으로 풀어볼 수 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