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영화? 우리의 인생을 담은 영화
인생 책, 인생영화... 하나만 고르긴 세상에 좋은 책들과 영화들이 너무 많아요. 제법 긴 고민 끝에 한 편을 골랐습니다. F. 피츠제랄드의 소설을 각색한 2013년 작 <위대한 개츠비>인데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어요!!] 아직 책이나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은 보고 나신 후 일독을 권합니다.
무엇보다 강렬합니다. 화려한 폭죽과 함께 처음 등장하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모습이 잊히지가 않네요. 모든 것을 가졌지만 비밀스러운 개츠비를 표현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첫 등장이었다 생각되는데요. 이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새로운 개츠비가 있겠지만,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제 인생의 개츠비는 레오나르도 당신뿐입니다.
워낙 모든 장면의 미장센이 훌륭했던 영화인지라, 다시 보면서도 지루할 틈이 없었습니다. 여자 주인공 데이지의 커튼이 나부끼는 속에서의 첫 등장도 청순하면서도 섹시한 그녀의 매력을 아주 잘 부각해주는 설정이었어요. 모든 장면마다 배우들 뿐만 아니라 소품들까지도 함께 연기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영화 속 주요 장면들 감상하고 가시죠.)
처음 영화를 봤을 때, 제게 개츠비는 바보 같은 남자, 데이지는 이기적인 여자였습니다. 남자는 불쌍했고, 여자는 얄미웠죠. 하지만 지금 다시 보니 이 둘 모두 생각과 감정이 모두 과거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불행해져 버린 가여운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개츠비와 데이지는 5년 전에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하지만 둘은 헤어지게 되고, 데이지는 대단한 부잣집 아들과 결혼해 딸을 낳았죠. 개츠비는 데이지를 잊지 못하고, 가난 때문에 데이지가 - 자신을 무척 사랑하지만 - 떠난 것이라는 생각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 상류사회에 화려하게 입성합니다. 남편 톰과 행복한 결혼 생활을 기대했던 데이지는 딸을 낳는 순간에도 병원에 나타나지 않고 바람을 피웠던 그를 끊임없이 의심하며 괴로워합니다. 전화벨 소리만 들려도 누구에게 걸려온 전화일지 몰라 안절부절못하고 일그러지는 데이지의 표정에서 그녀의 괴로움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5년간 데이지를 만나기 위해 살아온 개츠비와 성공해 돌아온 그를 다시 만나 5년 전의 추억 속으로 젖어드는 데이지. 이 둘의 만남은 처음엔 아름다워 보이지만 차츰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잃어버린 과거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데, 이들은 그 속에 머무르려고 합니다. 하지만 누구보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죠. 그래서 힘들고 서로에게 더 의지하게 됩니다. 하지만 타인은 나의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나의 구원이어야 합니다. 다른 이와 함께 해서 얻는 순간의 행복은 조건적이고 유한합니다. 또한 중독적이어서 계속 확인받고 싶어 하고, 더 많은 것을 요구하기 마련이죠. 그렇게 둘은 함께 행복하지 못합니다.
그녀에게 개츠비는 사랑이었을까요? 데이지는 자신의 잘못으로 개츠비가 죽었음에도 그의 장례식에 가기는커녕 꽃도 보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대신해 총을 맞았기에 더욱 황망하고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위협받았다고 생각해 멀리 떠나버리죠. 그녀는 사촌인 닉에게 자신의 딸이 '아름다운 바보'이길 바란다고 이야기하는데요. 남편의 바람이든 자신을 향한 맹목적인 사랑이든 눈앞에 있어도 보이지 않길, 고통받지 않고 싶은 데이지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개츠비에게 데이지는 사랑이었을까요? 하지만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려고 하는 개츠비가 진정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느냐는, 사랑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하게 됩니다. 실제로 개츠비는 자신의 과거사가 톰에 의해 드러나려 하자 톰을 죽일 듯이 화를 내 데이지를 두려움에 떨게 하죠. 그런 개츠비에게 떨고 있는 데이지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자신의 가치를 증명받기 위해 데이지에게 자신만을 사랑했다고, 남편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할 것을 줄기차게 종용합니다.
둘은 어떻게든 시간을 되돌리고자 하였지만, 시간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되돌리려 하면 할수록 그들이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갔지요. 결국 죽음과 떠남으로 일단락되는 듯 하지만, 끝나지 않는 것 또한 시간입니다. 데이지의 사촌이자 개츠비가 모든 고민과 아픔을 공유했던 닉은 모든 사건의 끝에 충격을 받아 정신 병원에 들어가죠. 그 또한 과거에 사로잡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다가 의사의 권유로 있었던 일에 대해 글을 쓰고는 마음을 정리하는 듯합니다. 등장하진 않지만 데이지와 톰, 데이지의 절친 조던도 과거에 사로잡혀서는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었을 것 같습니다.
아픔과 미련, 실패와 후회는 사람마다 그 크기는 다르지만 누구나 살면서 겪는 일종의 통과의례입니다. 그로 인한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았어도 시간은 흐르고 그 상처와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아프니까 쉬어갈 수도, 못 걷겠다고 멈출 수도 없는 게 인생이지요. 또 그렇게 계속 걷다 보면 상처가 아물어 있음을 발견할 때도 있을 겁니다. 가끔 비 오는 날 그 상처가 쑤실 때도 있겠지만, 계속 돌아보기만 하고 가는 길을 제대로 보지 않으면 더 큰 후회만 남을 뿐이라는, 우리 인생 같은 영화가 바로 <위대한 개츠비>가 아닌가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