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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리 Feb 27. 2022

전쟁을 마주하는 자세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전쟁이 났단다. 몇 주째 집에서 놀고.. 아니 재택근무를 하는 신랑은 온종일 유튜브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는 뉴스를 틀어놓고 있다. 침공이니, 전쟁이니 비현실적인 단어들이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것 같지만 또 가볍게만 여길 수 없는 참담한 것들이다. 책과 영상으로만 전쟁을 접한, 평화 시대에 사는 우리는 전쟁에 무지하고 무감각하다.


아직도 대한민국에는 국가보안법이 존치하고 우리의 주적이 존재하는, 휴전 상태라고 하지만 그것을 감각하고 사는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보이는 주적이 있다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에 온 세상이 뒤바뀌고,  일상이 송두리째 달라진 현재가 내게는 더 무섭다.


자연스레 사람을 덜 만나고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났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덩어리와 싸우느라 지칠 새도 없이 집안에서 내 손으로 먹이고 입혀야 하는 아이들만 보고 있으면 하루가 쉴 새 없이 몰아친다. 외부로 뻗어 나가지 못하는 에너지는 결국 내 안으로 모여든다. 자꾸 무언가 내 안에 채워지는 것들을 경험하고 있다. 그것이 감사와 충만함이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하루하루가 그럴 수 있는 경지에 다다르지 못한다. 짜증과 울화, 서운함과 답답함의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뒤섞여 내 안으로 밀려 들어온다. 그 기운과 맞서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하는 것이 흡사 적과 대결하는 것만큼 진지하달까.


사람이 한계에 다다라 임계점을 넘어서면 자신의 본모습이 드러난다. 그때의 모습이 진짜 나 자신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요즘 여러모로 한계점에 다다르면서 낯선 나를 마주했고, 피하고 싶은 내 참 자아를 보게 됐다. 도대체 고난의 최고치에 도달했을 때도 그 여유와 웃음을 잃지 않는 이들의 비결은 무엇일까?





이런 고민이 차오를 때 꼭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나의 인생 영화라 부를 수 있는 그것, 바로 <인생은 아름다워>이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인생은 아름다워>는 수용소 영화로 분류될 수 있지만, 난 그 어떤 영화보다 빛나는 로맨스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귀도의 가족들이 나치 정권하에 수용소로 끌려가기 전에 귀도와 그의 공주님, 도라의 러브스토리가 나온다. 총천연색 만화처럼 유쾌하고 설레는, 아름다운 러브스토리.


약혼자까지 있었던 도라는 귀도에게 끌려 약혼식을 탈출해 귀도와 결혼한다. 그녀가 그를 선택한 이유는 바로 귀도가 수용소에서 아들을 구해낼 수 있었던 유머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떤 상황에도 재미를 추구하며 상대를 웃게 해 주는 강력한 마법. 귀도는 그 마법을 부릴 수 있는 이였다. 비 오는 날 레드카펫을 깔아주는 남자, 하늘에서 열쇠가 떨어지게 만드는 남자, 젖은 모자를 마른 것으로 바꾸는 능력이 있는 남자, 그리고 자신을 범속한 일상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남자였다.


귀도에게 한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온 우주가 자신을 도우리란 믿음으로 몰입하는 것이었고, 아들을 지킨다는 것은 아들의 얼굴에 웃음을 잃지 않도록 비극을 희극으로 치환하는 게임을 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심지어 죽음까지도. 그 무엇에도 기죽지 않았기에 귀도는 여유가 넘쳤고, 유머가 가득했다. 그는 고난 속에서도 재미를 찾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그 재미가 결국 모든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마스터키가 되리라는 것을 알았으리라.




실제로 영화는 재미있다. 감동도 슬픔도, 눈물도 있지만, 그 어떤 감정보다 ‘재미’가 있다는 것. 그것이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재미’의 힘을 신랑을 만나면서 알았다. 형이상학적 철학을 함께 나누는 것도, 고차원적인 학문을 논하는 것도, 영적인 신앙의 깊이를 공유하는 것도 그것을 넘어선 ‘재미’가 없다면 그저 공허로 끝난다는 것을 신랑을 만나면서 알았다. 때론 단순하고 멋없는 남자처럼 보였던 그와 대화를 하는 내내 웃음이 났다. 너무 웃어서 배가 당기고 턱이 아플 정도로 재미있고 웃긴 사람이었다. 이런 유머를 가진 사람이라면 평생 함께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


“실제로 위기 상황에 닥치면 인간은 두 가지로 딱 갈라져. 코로나 때를 생각해보면 알지….. 고난 앞에서 네거티브로 가면 인간은 짐승보다 더 나빠져. 포지티브로 가면 초인이 되는 거야. 인간이 저렇게 위대해질 수도 있구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p228



영화 <인생의 아름다워>를 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가 떠오른다. 나치 수용소를 직접 체험한 정신과 의사의 생생한 기록이다. 그의 책에서는 극단적 고난에 반응하는 인간의 양극단의 모습이 생생하게 보인다. 같은 동족이지만 나치의 앞잡이가 되어 짐승처럼 동족을 물어 죽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편엔 아주 평범한 보통의 사람들의 숭고한 희생을 보여주기도 한다.


고난에 처했을 때 인간은 비참해지거나 숭고해지거나 두 부류로 갈린다면 그것을 가르는 것은 무엇일까?


앞서 인용한 책,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 이어령 선생님은  누가 짐승이 되고 누가 초인이 될지는 예측할 수 없다고 한다. 백두산 물이 두만강이 되고 압록강이 되는 것은 0.1초 차이로 벌어지는 것으로 그 상황에 닥쳤을 때 알게 되는 것이라고. 결국 그것은 영적인 영역이 될 거라고  한다. 그리고 빅터 프랭클은 수용소에서도 사람됨을 잃지 않고 살아남았던 사람들에게는 ‘삶의 의미’가 있었다고 말한다. 나는 여기에 감히 덧붙이고 싶다. 어떤 상황에도 ‘재미’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지난한 삶을 버틸 수 있을 거라고. 귀도가 영화에서 보여준 ‘재미’를 떠올리면 그 단어가 그저 수사적 표현이 아닌, 얼마나 묵직한 느낌인지 알게 될 것이다. 묵직하면서도 유쾌한 것. 그것이 내가 바라는 참 아름다운 인생이다.


아들 조슈아의 시선으로 본 아빠의 마지막 모습



‘재미’란 것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사람마다 그 기준이 다를 것이다. 모두가 저마다의 재미를 발견한다면 전쟁통에서도 인생은 그리 각박하지 않고 ‘아름답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귀도가 보여준 그 고귀한 희생과 사랑에는 간절한 ‘재미’가 있었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 한다.


현재 전쟁을 겪고 있는 그곳에도 부디 귀도와 같은 이들이 많길, 그리고 다시는 전쟁이란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되길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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