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실체를 찾아서
'무엇이 내가 아닌가'를 아는 순간
'나는 누구인가'가 저절로 나타난다.
에크하르트 톨레의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에서 가장 가슴에 남는 문구입니다. 나를 어떠한 틀에 맞춰 넣으려고 하는 순간 고뇌는 시작되지만, 그 생각에서 놓여날 때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자유를 느꼈었는데요. <고요함의 지혜> 필사 중에 다시 한번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분노한 사람은 내가 아니다. 두려운 사람은 내가 아니다. 권태, 분노, 슬픔, 공포는 '나의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다지 마음 상태를 가리키는 지표이며 늘 가고 오는 것이다. 가고 오는 것은 그 무엇도 내가 아니다 - 고요함의 지혜 | 에크하르트 톨레 / 제2장 생각하는 마음을 넘어서
하지만 권태, 분노, 슬픔, 공포의 중심에는 '내'가 있습니다. 감정이라는 높은 벽에 둘러싸여 절대 나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안에서 나오려고 애쓸수록 벽은 더 높아지는 것 같죠. 하지만 감정이 가라앉고, 주변을 찬찬히 둘러볼 수 있게 됐을 때 순식간에 평정심을 되찾습니다. 그러면 더 이상 권태, 분노, 슬픔, 공포는 내가 아닙니다. 그렇게 쉽게 말이죠.
‘나’를 생각하고 ‘나’를 말할 때 내가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나와 나의 이야기’이다. 그것은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들, 두려운 것들, 갈망하는 것들로 이루어진 ‘나’이며, 결코 만족을 모르고 혹여 만족이 있다 해도 잠시뿐인 ‘나’이다. 그것은 마음이 지어낸 자아상으로서 늘 과거에 얽매이고 미래에서 만족을 구하는 나이다. ... (중략) ... 그러한 ‘나’를 보는 사람은 누구인가? 나의 육체와 정신을 담은 틀이 잠시만 존재하는 무상한 것임을 아는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나의 실체이다. 깊은 차원에 존재하며 과거나 미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나’이다. - 고요함의 지혜 | 에크하르트 톨레 / 제3장 나의 에고
즉, '나와 나의 이야기'들로 나는 어떤 사람인지 정의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20대의 나는 젊고 많은 가능성이 있었지만 30대의 나에 비해서는 아는 것이 많이 없었지요. 30대의 나는 더 많이 알고, 더 많은 일을 하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지만, 40대의 나에 비해서는 단편적인 생각에 사로 잡혀 성급하게 감정에 굴복했습니다. 그게 나일까요? 더 이상 젊지 않으니, 새로운 능력을 갖게 됐으니 나는 내가 아닌 걸까요? 시간과 변화에 상관없이 변하지 않는 나, 이 모든 변화를 지켜보는 내가 진정한 나인 것이라고 에크하르트 톨레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내가 아닌 것'을 정의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계속 '나'를 정의하고 '남'과 비교하며 우위를 점하려는 나의 에고를 멈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과 의견 차가 있을 때, 거기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나를 에고가 부추겨 분노하게 하는데요. '나의 의견=나'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함으로써 의견 차를 나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길 멈추게 됩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힘듦을 들어주고, 그 마음을 보듬어주는 와중에도 '나의 행동=나'라는 생각에 착한 일을 하는 내 모습에 도취되기가 쉽죠. 이 또한 에고가 하는 일입니다. 그때도 이러한 연결고리를 끊음으로써 그 순간에 존재하면서 다른 사람의 아픔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나의 실체를 찾는 일은 '내가 아닌 것'을 정의하는데서 시작한다는 것 매 순간 기억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