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나의 동시 해방
가족, 친구, 친척, 직장 동료부터 친구의 남편 또는 아내, 친구의 친구처럼 한 단계 건너 아는 사이도 있고, 여러 온오프라인 모임의 멤버들처럼 선택적 만남이 가능한 느슨한 관계들도 있지요. 이러한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엄청납니다. 무엇을 하든 '인간관계가 가장 힘들다'는 하소연을 많이 듣게 되는데요. 큰 문제가 생기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메뉴를 정해 밥을 먹거나 다과를 먹고, 적절한 시간에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는 과정은 제법 피곤을 느끼게 합니다.
왜? 피곤을 느끼나 가만히 저를 들여다봤는데, 두 가지인 것 같아요. 나도 남도 서로를 평가하고, 서로에게 어떻게 평가될까 신경을 씁니다. 저 사람이 좋은 사람이면 좋겠고, 나도 좋은 사람으로 보이며 좋겠죠. 문제는 뭐가 '좋은 사람'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누군가가 어떤 사람이라는 판단을 내릴 때 우리는 그의 길들여진 마음의 양상을 본연의 모습과 혼동한다. 그런 판단 행위 자체도 습관적이고 무의식적인 마음의 양상이다. 내가 그에게 개념적 정체성을 주는 순간 그것은 그와 나를 동시에 가두어버린다. - 고요함의 지혜 | 에크하르트 톨레 / 제8장 관계
자신의 과거에 만들어진 어떤 기준에 근거해 습관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을 판단합니다.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떤 존재인지 모르면서요. 그리고 상대방도 나에게 자신의 기준을 들이댑니다. 그러면 나는 왠지 억울합니다. 하지만 상대방에 가지는 나의 평가와 판단은 옳다고 믿습니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이것을 폭력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눈앞에 있는 사람을 살아있는 인간으로 보지 않고 나의 사고가 만들어낸 개념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생생히 살아있는 사람을 죽어버린 개념으로 격하시키는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 고요함의 지혜 | 에크하르트 톨레 / 제2장 생각하는 마음을 넘어서
하지만 그 폭력은 상대방에게만 행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에게 어떤 평가 기준을 적용할 때, 그 기준은 나 자신에게도 적용됩니다. 예를 들어 잘 웃지 않는 사람이 차갑고 무례하다고 생각한다면, 나 자신도 슬프고 힘들 때, 피곤하고 아플 때도 웃어야 합니다. 물론 미소는 좋은 것이지만, 상황과 관련 없이 웃어야 한다면 이는 폭력적이라 할 수 있을 거예요.
여기서 인간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은 그가 하는 행동에 눈을 감으란 뜻이 아니다. 다만 그의 행동을 길들여진 양상으로 인식하고 수용하라는 뜻이다. 그의 정체성을 그것에만 근거해서 수립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당신뿐 아니라 그 사람도 습관, 형식, 생각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동일하게 여기는 것에서 해방된다. 이제 에고는 더 이상 당신의 인간관계를 지배하지 않는다. - 고요함의 지혜 | 에크하르트 톨레 / 제8장 관계
이렇게 습관적이고 무의식적인 평가에서 벗어날 때, 상대방도 나도 해방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의 겉이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면 볼 수 있는 게 많은 것 같아요. 어제 민승기 교수님 강의에서 서양 철학은 '(시각적) 봄'을 중시한다고 설명하셨는데요. 이때 본다는 것은 보는 주체(나)와 보이는 대상(남)으로 이분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바뀔 수 없는 관계라고 하셨어요. 하지만 시각이 아닌 촉각은 '사랑'이라고 설명하셨는데요. 손을 잡고, 안고, 뺨을 비비는 행위는 주체와 대상이 없어지기 때문이죠.
평가하는 주체와 대상이 없어지기 때문에 편안할 수 있고, 우리를 옭아매는 어떤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관계는 더이상 피곤하지 않은 것 같아요. 언제 어디서 누구와 있던 나는 나일 수 있고, 나는 타인의 '나'를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요. 즉, 남이 아닌 나를 위해 내가 바껴야 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