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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LAXY IN EUROPE Oct 22. 2024

[고요함의 지혜] 앎

무엇에 대한 앎 vs 개념을 떠난 깊은 앎

한 사람을 진정 제대로 알려면
그에 '대한' 어떤 것도 알 필요가 없다.


<고요함의 지혜> 제8장 관계를 이어 읽으며 처음 들어온 문장입니다. "알려면, 알 필요가 없다"니 무슨 뜻일까요? 이어 읽어봤습니다.


그의 과거와 역사, 그의 이야기를 알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무엇에 대한 앎’과 ‘개념을 떠난 깊은 앎’을 혼동한다. 이 두 가지 양식의 앎은 서로 차원이 다르다. 전자는 형상에 속해 있고, 후자는 형상을 떠나 있다. 전자는 생각을 통해서 작용하고, 후자는 고요함을 통해서 작용한다. - 고요함의 지혜 | 에크하르트 톨레 / 제8장 관계


조금 이해가 더 되는 것도 같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판단할 때, 근거를 가지려고 합니다. 그 근거가 되는 것들이 그 사람의 외모, 옷차림, 가족, 학력이나 경력 등이고, 이러한 것들과 내가 가진 일반 지식을 결합시켜 그 사람을 알려고 합니다. "저 사람은 ~~~ 하니까, ~~~~ 한 게 틀림없다." 하는 식으로 말이죠.


요즘 제가 즐겨보는 <조립식 가족>이라는 드라마 속 세 주인공은 엄마가 돌아가셔서, 엄마가 돈 벌러 떠나서, 엄마가 아빠와 이혼을 해서 엄마 없이 두 아빠와 살게 되는데요. 세 명은 혈연관계가 아니지만 서로 오빠 동생처럼 10여 년을 함께 지냅니다. 그런데 이들이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너희 셋 다 참 기구하다."라며 안 됐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거나, "편부 가족에서 자랐는데 너는 참 밝아."라는 나름 칭찬이라고 뱉는 말들입니다.

이들은 엄마가 없어도 서로를 챙기며, 자신의 방식대로 하루하루 평범하게,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그저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의해 왜곡되고, 그들이 틀렸다고 반박하고 증명하며 살아야 합니다. 조금의 - 엄마가 없다는 사실과 전혀 상관없는 - 문제가 발생해도 모두 그런 탓으로 여겨질 게 뻔하니까요.


저는 이화여대를 나왔는데요. 이 사실을 아는 주변 사람들의 반응 중 재미있는 것이 "이대 나온 여자 같지 않다."는 것이에요. 맥락상 칭찬의 의미로 말했다는 건 알겠지만, 기분이 참 묘해집니다. '이대 나온 여자'에 대한 선입견과 사회적 평가가 들어 있는 것이잖아요? 심지어 저는 90년대 후반 학번으로, 2024년에 이화여대를 다니고 있는 학생들이나 그 사이에 또는 그전에 학교를 다녔고 졸업한 학생들 사이에 통하는 공통점을 갖기란 쉬운 일이 아닌데도 말이죠.


이렇듯 '무엇에 대한 앎'은 에크하르트 톨레가 말하는 '개념적 정체성'에 기반한 앎인 것 같습니다. 톨레는 "개념적 정체성이란 그가 누구이고 과거에 무엇을 했다는 내 나름의 주관적 판단을 말한다."라고 설명하는데요. 이를 넘어설 때, 그 사람과 온전히 함께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개념을 떠난 깊은 앎'이 이루어지는 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온 마음을 다 줄 때, 그와 나의 인간관계에서 과거와 미래가 다 사라지고 다만 실제적인 것에만 집중할 수 있다. 누구를 만나든 그와 온전히 함께할 수 있을 때 그에 대한 개념적 정체성을 넘어서서 두려움이나 욕망에 휘둘리는 일 없이 그와 대화할 수 있다. - 고요함의 지혜 | 에크하르트 톨레 / 제8장 관계


물론, '무엇에 대한 앎'은 필요합니다. 그리고 살면서 서로를 알아간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지요. 나이를 물어보지 않아도 연배를 짐작할 수 있을 때도 있고, 사용하는 언어나 억양 등으로 출신 국가와 지역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알게 되더라도 나의 주관적 판단을 개입시켜 일반화하거나 왜곡하는 행위를 멈추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무엇에 대한 앎’은 실용적인 목적에 유용하다. 실용적 수준의 일에서는 그것이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하지만 인간관계에서 ‘무엇에 대한 앎’이 주도권을 잡을 때 삶은 격하되며 심지어 파괴되기까지 한다. 사고와 개념은 인위적인 장벽을 만들어 사람들을 갈라놓는다. - 고요함의 지혜 | 에크하르트 톨레 / 제8장 관계


예전에는 내가 사람을 꽤 잘 본다고 자신했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행동하거나, 눈짓이나 말투가 어떻다 하면 이런 사람, 저런 사람으로 구분했어요. 하지만 나의 예측이 얼마나 잘 맞았고 정확했느냐를 따지기 이전에 이러한 개념적 정체성에 기준한 판단은 파괴적이고 폭력적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은 내가 진심으로 타인과 관계를 맺는 것에 방해만 될 뿐이며, 모두 나와 다른 타인에 대한 무의식적인 두려움과 나의 이기심을 채우려는 욕망에서 비롯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욕망을 채우려 하면 할수록 쌓이는 것은 두려움일 뿐입니다.


인간관계에서 두려움과 욕망을
넘어서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사랑은 그무엇도 원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그저 사랑으로, 타인의 행동을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저럴 수도 있구나'하고 수용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전에 이렇게 말했는데 지금 이렇게 행동하니까 위선자가 아니라, 전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생각이 바뀐 걸까? 하고 물어봐준다면 어떨까요? 왜냐하면 그게 저 사람이 아니라 나라면 충분히 바뀔만한 이유가 있었을 테니까요. 물론 모든 것을 용서하고 관대한 성인(聖人)이 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저 타인을 바라보는 렌즈에서 '개념적 정체성'이라는 색()을 빼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진: Unsplash의 Harry Qu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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