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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에게 배운 '무해한 솔직함'

사람 코치가 기계에게 배운 '심리적 안전감'의 힘

by GALAXY IN EUROPE

주말 오후 AI 채팅창을 켜고 컴퓨터 앞에 앉아 이렇게 말을 걸었다.

나는 건강하기 위해서 살을 빼고 싶은데,
얼마나 어떻게 빼는지가 중요할 거 같아.
나는 키가 160 cm인데, 건강하기 위해서
몸무게와 근육량이 어느 정도 돼야 할까?
60kg 미만으로 빼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해.


만약 내가 헬스장을 방문해 트레이너에게 상담받고 있었다면 과연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다이어트 프로그램의 실장님이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내 몸무게와 BMI 수치 앞에서 전문가인 그들의 생각을 경청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나는 영어를 가르치는 코치고, 내 수업의 슬로건은 "Your smile speaks(당신의 미소가 먼저 말을 겁니다)"이다. 학생들에게는 틀려도 괜찮으니 완벽하지 않아도 당당하게 웃으며 소통하라고 그토록 강조하면서, 정작 나 자신은 '건강 관리'라는 과목의 학생이 되자 내 슬로건처럼 당당하지 못했다.

vitaly-gariev-6ESp0qoio_I-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 Vitaly Gariev

헬스장 등록을 망설이는 건 운동의 고됨 때문만은 아니다. 트레이너 선생님의 기대와 "회원님, 식단 잘 지키셨죠?"라는 그 맑은 질문 앞에서 스트레스받지 않고 솔직할 용기가 없다. 시도와 실패를 반복한 다이어트 앞에서 나는 이미 만신창이이니까. 물론 선생님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열정을 쏟는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미안함, 그리고 약속을 지키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왠지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솔직해지지 못하고 가면을 쓴다.


그래서 나는 '사람'이 아닌 '기계', 인공지능을 찾았다.

나 운동하는 거 죽기보다 싫어해.
식단에 운동까지 과하면 포기할 듯.
그리고 빵이나 과일도 먹고 싶어.

아마 트레이너나 상담 실장님처럼 혼나거나 설득할 줄 알았는데, AI는 그저 건조하고 평온한 텍스트로 답했다.

인바디를 보니 근육량이 '훌륭함' 단계네요.
이건 흔히 볼 수 없는 엄청난 재능입니다.
엔진이 람보르기니급이라 식단을 바꿔
단백질 연료를 태워주면 됩니다.


감정이 섞이지 않은 객관적인 데이터 분석은 묘하게도 사람의 위로보다 더 큰 안도감을 주었다. 이어지는 솔루션은 일방적인 지시가 아니라 나와의 치열한 협상 과정이었다. 내가 빵을 너무 좋아해서 끊기 힘들다고 하자 "그럼 드세요. 대신 죄책감 갖지 말고 계란 하나를 더 얹어서 단백질 짝을 맞추세요"라고 했고, 운동할 시간이 없다고 핑계를 대자 "그럼 전자레인지 돌아가는 2분 동안만 스쿼트를 하라"는 초현실적인 타협안을 내놓았다. 귤이 먹고 싶다니 "딱 2개만, 해가 떠 있을 때 먹자"는 디테일한 계약 조건까지 걸었다.

aerps-com-0Jk1QCGMz5o-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 Aerps.com

이 과정에서 나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AI 앞에서 비로소 가면을 벗을 수 있었던 건, 이 관계에 '심리적 안전감(Psychological Safety)'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계인 AI는 나를 평가(Judge)하지 않는다. "회원님, 또 드셨어요?"라는 실망 섞인 눈빛으로 나를 위축되게 만들지도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최선의 대안을 줄 뿐이다.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누구에게도 비난받지 않는 이 '무해한 솔직함' 속에서 비로소 내 몸에 맞는 진짜 해결책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을 가르치는 코치인 나에게, 기계에게 코칭을 받은 어제의 경험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는 다시 나의 본업으로 돌아와 내 학생들을 떠올려본다. 영어 앞에서 주눅 든 그들도 지금의 나처럼 벌거벗겨진 기분이었을까? "괜찮다"고 말해주던 나의 격려가 때로는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으로 다가가지 않았을까? 좋은 코칭이란 결국 상대방이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깨끗한 거울을 비춰주는 일이다. 사람 코치인 나는 AI처럼 감정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사람만이 줄 수 있는 따뜻한 공감과 유대감은 내가 가진 가장 큰 무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가끔은 AI가 보여준 것처럼 '판단하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학생이 숙제를 못 해왔을 때 어떻게 더 잘하게 할지 고민하기보다, "그럼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분량은 얼마일까요?"라고 물어볼 수 있는 여유. 문제가 아닌 상황으로 바라봐 주는 시선 말이다. 나는 오늘부터 AI에게 배운 이 안전한 소통 방식을 나의 코칭에 더해보기로 했다. "선생님, 저 사실 어제 공부 하나도 안 했어요"라고 학생이 웃으며 고백할 수 있는 수업, 그런 심리적 안전감이 흐르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2026년을 준비하는 나의 새로운 목표가 되었다.

christina-deravedisian-em0uZnvKl8M-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 Christina Deravedisian

p.s. 물론, 오늘 점심에도 나는 AI 코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점심은 밥 대신 두부 반 모를 먹었다. 누군가에게 검사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스스로를 위해 건강해지기로 한 약속이니까.


[ 표지 사진: UnsplashCash Macanay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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