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ALAXY IN EUROPE Dec 19. 2022

믿음과 용서의 이야기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2022

우연한 기회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뮤지컬을 보고 왔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와 줄리엣>을 원작으로 1957년 브로드웨이 초연 뮤지컬로 워낙 유명한데요. (상세정보: https://bit.ly/westsidestory2022)


*스포일러 얼럿* 아래부터는 스토리 전개와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내용을 모르는 분들은 주의해주세요.


토니와 마리아의 사랑

폴란드계 미국 청년 토니와 푸에르토리코 출신 마리아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집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들의 사랑을 반대하고 걱정하지만 둘은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토니는 폴란드계 갱단 제트파 출신으로 절친한 친구, 리프는 제트파의 리더이죠. 마리아의 오빠, 베르나르도는 이에 반목하는 푸에르토리코계 갱단 샤크파의 리더입니다. 그럼 도대체 뭘 믿고? 그저 첫눈에 반해 쓰인 콩깍지 때문에? 그들의 사랑은 가족도 친구도 나 몰라라 하는 이기적인 사랑일까요?

스티븐 스필버그 영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2022)> 중에서

뮤지컬을 다 보고 길을 나서면서는 이것을 충동적이고 치기 어린 감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이 둘의 사이에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갈등 속에 사랑은 퇴색되어갔을 거라고요. 하지만 지금은 좀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가슴으로 느낀 믿음이 있었을 거라고, 내가 하나를 내어놓으면 상대방도 하나를 내어준다는 이해타산적인 계산 없이도 느낄 수 있는 충만함과 끌림이 있었기 때문이라고요. 세상엔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못하는 일이 더 많은데 우리는 논리적으로 말이 되어야지만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이 되지 않아도, 설명할 수 없어도 믿는 게 진정한 믿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비극의 시작과 끝

걱정대로 그들의 운명은 비극으로 치닫습니다. 둘의 바람과는 반대로 제트파와 샤크파는 싸움을 벌이고, 마리아의 요청으로 이를 말리러 현장에 갔던 토니는 자신의 눈앞에서 리프가 베르나르도의 칼에 찔리자 분노에 차 베르나르도를 찌릅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둘 다 죽어버렸고, 다른 갱단원들은 도망가버렸지요. 토니는 마리아에게 용서를 빌고 자수하기 위해 마리아의 집으로 가는데요. 이 또한 마리아에 대한 토니의 절대적 믿음을 보여주는 부분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으나 마리아가 용서해줄 것이라 믿기에 토니가 도망가지 않고 마리아를 찾아갔으며 자수를 결심한 것이죠.

스티븐 스필버그 영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2022)> 중에서

마리아는 오빠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슬퍼하지만 토니를 용서합니다. 그리고 둘이 멀리 떠나기로 하죠. 친오빠를 죽인 원수와 떠난다니? 그럼 죽은 오빠는 뭐가 되지? 그렇게 쉽게 용서를 한다고? 반대로 잘못을 따지고 미워하는 마음이 죽은 사람을 살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탓하고 증오하는 것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참 어려운 문제죠. 이때 마리아를 방문한 베르나르도의 여자 친구 아니타는 모든 사실을 알아채고 분노합니다. 둘은 언쟁 끝에 한참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는데요. 베르나르도를 열렬히 사랑했지만 그를 잃고 큰 상실감에 빠진 아니타였기에 토니를 잃고 싶지 않은, 그를 믿고 용서하려는 마리아의 심정을 누구보다 이해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결국 사건은 다시 한번 꼬입니다. 베르나르도의 복수를 하려고 토니를 찾아다니던 샤크파에 의해 토니는 마리아의 눈앞에서 죽임을 당하고 마리아는 절규하는데요. 다시 샤크파와 제트파가 맞붙기 일보 직전 마리아는 토니를 죽인 총을 빼앗아 들고 자신의 오빠를 죽인 제트파와 토니를 죽인 샤크파에 겨눕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이 모든 것이 사랑하는 오빠와 토니를 다시 자신의 품으로 돌려주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죠. 슬픔 밖에 남지 않은 마리아의 모습에 두 갱단원들은 후회하며 함께 토니의 시신을 옮기며 뮤지컬은 막을 내립니다.


뮤지컬이 끝난 직후에는 드라마틱한 요소가 부족한 듯했습니다. 더 큰 싸움이 벌어져 모두 죽거나 총을 빼앗아 든 마리아가 자살을 할 거라 생각했거든요. 계속 갈등하던 두 갱단의 단원들이 한순간에 싸움을 멈추는 부분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곧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봤는데요. 그들은 절망에 빠진 마리아의 모습에서 자신들의 충동적인 행동에서 이러한 비극이 발생했음에 괴로웠을 겁니다. 또한 복수는 복수를 부르는, 죽음은 또 다른 죽음에 이르는 끝이 없는 굴레를 누구보다 멈추고 싶었겠죠.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 다음 희생자가 될 수 있으니까요. 여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폭주기관차 같이 질주하던 증오와 복수를 멈추는 방법은 법도 규제도 또 다른 폭력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용서... Let it go.

제트파와 샤크파의 갈등은 서로에 대한 견제와 경멸, 미움에서 비롯된 사소한 다툼에서 시작됩니다. 갈등의 골이 점점 깊어간 거죠. 지나가던 누군가를 조롱했다, 기분 나빠서 한 대 때리고 도망쳤다, 잡으러 가서는 다른 친구들과 힘을 합해 흠씬 두들겨줬다는 식으로 사소한 미움을 그저 보내버리지(let it go) 못했기 때문에 점점 더 문제가 커졌던 겁니다. 어찌 보면 서로에게 칼을 겨눠 죽음에 이르러서야 복수의 굴레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서로에 대한 복수는 진행되고 있었던 겁니다.


이 굴레를 끊어낸 것은 이들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쉬랭크 형사와 경찰들이 아니었습니다. 힘없고 연약한, 사랑하는 이들을 모두 잃어버린 마리아였습니다. 총을 들고 겨눴지만, 마리아는 총을 어떻게 쏠 줄도 몰랐죠. 하지만 마리아는 복수에 눈이 먼 사람들의 정신을 차리게 했습니다. 아주 길고 긴 악몽을 꾼 것처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제게 <웨스트 사이트 스토리> 결말은 어느 전쟁 영화나 영웅 영화보다 웅장하고 드라마틱한 엔딩이 되었습니다.

토니와 마리아의 행복을 꿈꾸며(Photo by Nathan Dumlao on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미완결의 인간이 주는 희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